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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사랑하라 (요 13: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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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고별설교를 하신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33절 말씀에서 예수께서 '소자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이 말은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아가야 차조심해라'하고 타이르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다정스럽게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유다는 이런 호칭을 듣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으나 그 사랑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신 주님의 사랑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비록 개개인에게 인격적인 결함들이 다 있었지만 주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소자들아 하고 다정스럽게 부르시고 귀중한 말씀을 전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진리를 배우는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주께서 깊은 사랑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윗은, 시131:2, "내 중심이 젓뗀 아이와 같도다"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이시간 젓뗀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간절히 사모하듯이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큰 은혜를 달라고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무엇인가

1.34절,"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주의 말씀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저들에게 가장 강조했던 말씀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배웠던 주의 제자 요한은 늙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한 상태에서도 말끝마다 "소자들아 서로 사랑 하라"고 외쳤답니다.
한 제자가 사도여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자꾸 하시는 겁니까 하자 그것으로 충분하다네 라고 대답했답니다.
우리 한번 옆 사람을 바라보고 “서로 주의 사랑으로 사랑 합니다” 라고 해봅시다. 좀 쑥스럽기는 하겠습니다만,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1)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자 명령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무엇입니까 명령입니다. 계명입니다. 우리가 지켜도 되고 안지켜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명입니다. 이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사무엘 루터포드는. 스콧틀랜드의 위대한 설교가. 루터포드는 안워드라 는 곳에 있는 장로교회의 목사였는데 영국정부로부터 교리적인 핍박을 받았습니다. 영국정부는 국교(성공회)의 교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루터포드를 애버딘으로 추방명령을 내렸습니다.
루터포드는 자기가 믿는 교리와 다른 것을 신봉하는 사람하고는 절대로 교제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추방당하기 전에 루터포드의 집에 나그네가 찾아들었습니다. 나그네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루터포드는 친절히 맞이 하고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난 후 루터포드는 늘 하던대로 성경공부및 교리공부를 식구들과 함께 하는데 나그네에게도 같이 하자고 청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는 같이 성경공부및 교리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루터포드가 문답식으로 십계명을 가르쳤는데 그리고 나서 나그네를 보고 "얼마나 많은 계명들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나그네는 주저하지 않고 "열 하나입니다" 했습니다.
루터포드는 당황해 하면서 다시 "계명이 몇개냐고 물었습니다" 했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열 하나입니다." 루터포드, "스콧틀랜드에서 십계명을 모르는 사람은 내가 처음 보았습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힘찬 소리로,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외쳤습니다.
루터포드는 놀라서 "당신은 누굽니까" 하고 물었더니 "내가 바로 아일랜드의 주교 어셔입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셔 감독은 매우 복음적인 감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셔 감독이라는 말을 듣고 루터포드 목사는 자기의 교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과는 교제하지 않겠다고 한 자신의 고집을 부끄러워하면서 어셔 감독에게 성경공부의 마무리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여러분이여,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명입니다.
2)예수님은 이것을 새 계명이라 말씀하십니다.
새계명이란 전에는 없었다가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계명이라는 뜻이 아니다. 전에도 그 계명이 있었지만(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진정 그 계명을 새롭게 깊이 깨닫고 지켜야할 계명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껏 사랑을 외쳐왔다. 그러나 그것이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옛 계명이 될 뿐이다.
요일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 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느니라." 요일3:17,18,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주님은 다시 한번 우리들에게 새 계명을 주신다. "서로 사랑하라." 천국은 사랑하는 사람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사랑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2. 새 계명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 도 사랑하라." 우리가 어디까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가
주께서 보이신 사랑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기를 “아가파스 메” 두번째도 “아가파스 메”입니다. 즉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린도전서13장에다 예수님을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었나 그리고 나를 적용해 보라. 주님이 사랑한 대로 사랑합시다.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입니까
(1) 참 사랑은 남이 나에게 도움을 주었을 때보다 나에게 해를 끼쳤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상대방이 완벽할 때가 아니라 너무도 부족하고 모자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직후 제자들 중에 가장 많이 생각했던 제자가 누구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베드로입니다. 막16장 7절. 천사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의 부활 알리면서 이 사실을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라"고 합니다.
천사가 특별히 베드로의 이름을 말한 것은 예수님의 생각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에수님을 세번 부인했습니다.. 지금 굉장히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나를 세번이나 부인한 녀석은 빼놓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알려라 했을지 모릅니다.
자기에게 손해를 끼친 자를 사랑하는 것이 진정 참 사랑입니다.
미국 역사상 스탠톤(Stanton)처럼 아브라함 링컨을 모욕한 사람은 일찌기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브라함 링컨에게 "저급하고 교활한 어릿광대" "고릴라의 원종"이라고 했읍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이 된 후 스탠톤의 능력을 보고 그를 국방 장관으로 임명하였읍니다. 링컨은 최대의 예절로 그를 대해 주었읍니다. 세월이 흘러 링컨대통령이 극장에서 암살자의 흉탄에 맞아 쓰러져 그 유해가 안치된 좁은 방에서 제일 많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 사람이 스탠톤장관이 었다고 합니다. 그는 링컨 대통령을 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 세계 역사 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누워있다."고 말하였읍니다.
여러분이여, 우리 가운데 너그러이 용서하는 사랑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하라. 잊어버리라. 미친 개를 파묻을 때에 꼬리를 내놓지 말아라." 혐의를 아주 없애버리라는 뜻.
주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2) 끝까지 사랑하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깁니다." 내가 받은 은혜는 잊어버리기 쉽고 내가 손해보고 천대받은 것은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가족간에도, 친척간에도, 친구간에도 적은 일로 대적이 됩니다.
주님은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혹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정말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적이 그 얼마나 많았습니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제자들의 배반.
예수께서 이런 것들을 마음에 새기셨다면 아마 제자들은 지옥의 아랫목에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이여,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깁시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다같이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자.
(3)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 희생적인 사랑.

3. 그리스도인의 참된 표는 사랑입니다.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 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바로 사랑의 실천이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켜 최초로 이방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는데 그때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주님의 참 사랑을 나누는 상태였습니다. 그 사랑의 모습을 보고 이방 사람들은 하도 희한하고 여태 보지 못했던 무리들이라 이름하여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말을 잘하였기 때문에. 안디옥 교회에 심오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아닙니다.
프란시스 쉐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한 세대나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세대와 모든 지역의 그리스도인의 꼬리표로 예수께서 주신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교회, 사랑이 없는 성도, 세상으로부터 심한 질타를 받을 수 밖에 없다(뭔놈의 교회, 뭔놈의 교인...).
지금 예수께서 나에게 주신 꼬리표를 달고 있는가
예화. 브라질의 성자로 불렸던 미국 선교사 멜랜드(Doug Meland) 내외는 깊은 산골에 들어가 선교하며 평생을 사는 중에 네번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곳 주민인 폴리오 인디안은 처음에 멜랜드 내외를 (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그들을 무기로 괴롭혔던 그 허다한 (백인)을 부르던 증오에 찬 명칭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후 멜랜드 내외는 의료 봉사로써 주민들의 목숨을 구하며 병을 치료하는 헌신적인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자 그를 부르는 명칭이 (존경하는 백인) 으로 바뀌었다.
멜랜드 내외는 폴리오 인디안의 언어를 열심히 배워 10년뒤에는 그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유창한 말을 구사하게 되었고 생활도 그들의 풍습대로 살았다. 그랬더니 그들은 멜랜드 내외를 (백인 인디안)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어느날 부상당한 인디안 소년의 발을 씻어주고 있었더니 인디안들이 "인디안의 발을 씻는 백인을 보았는가 이 사람은 하늘이 보내준 사람들이다."고 말했으며 그때부터 멜랜드 부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었던 것이다.
결론) 사랑은 나를 가장 복되게 하는것. 사랑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사랑할 때 내 자신이 가장 고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할 때 마귀가 물러갑니다. 사랑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미워할 때는 곤고함이 깃들지만 용서할 때는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명령이며 주님의 새 계명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징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장을 이식받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여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과 교회를 천극으로 만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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