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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된 고난 (마 0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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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이며 고난주간의 시작 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으셨음을 우리가 잘알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할것이고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게 될것이라고 하셨는데, 오늘 고난주일을 맞이 하면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이말은 좀 지나친 말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을 위하면 얼마나 위하고 주님을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얼마나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쨌거나 주님을 위하여 의 때문에 고난을 받을수 만 있다면 그것은 복이 된다는 말씀을 생각하며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욥기5장7절에 보면“ 인생은 苦難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고 했고, 모세도“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고해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살아가기가 힘든것이기 때문 일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고난을 겪어야만 합니다. 형태는 다르고 강도는 다 다를 지라도 나름대로 모든 사람은 다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난을 받되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고난을 받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가령 자기罪 때문에 교도소에 들어가서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요 부끄러운 고난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고난은 반드시 필요한 고난이라고 생각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고난이 있으므로 죄를 무서워 하게 될것이고 죄를 멀리하게 될것이기 때문 입니다. 또 자기는 아무런 죄도 없는데 억울하게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처럼 분통이 터질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義를 위하여 옳은일 때문에 고난이 온다는 것은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인 것입니다. 償은 주지 못할 망정 고난이라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에 정치인들 공직자들이 재산공개를 통해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취득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공직에서 물러났고, 일부 사람들은 많은 불만이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들이 죄의식을 가지고 부끄럽게 생각하는것 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억울하다거나 재수가 없었다거나 하는것이지요. 또 저들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어찌 이럴수가 있는가 하고 흥분을 하고 있으나, 저들과 같은 입장이 되어 기회가 주어지고 돈이 있다고 한다면 부동산 투기 안할 사람이 몇이나 있었겠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즉 세상主義 세상價値觀으로 저들과 같이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사람이 다 그렇게 사는데 하면서 자신을 변명하는데,세상이 어떻든간에 우리는 바르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될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을 가르켜 성경은 악한세대, 거스리는 세대, 패역한 세대, 음란한 세대,믿음이 없는 세대, 죄많은 세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의를 행하면서 살기란 여간 어려운것이 아닙니다.

의롭게 사는것이 바보가 되는것같이 생각 될수도 있습니다. 남들은 수단이 좋아서 부동산 투기도 잘하여서 엄청나게 돈을 버는데 나는 못난 사람이 아닌가하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예전에 저는 저의 아버님이 끔찍이도 수단이 없는분이고, 소위 시류를 탈줄 모르는 분이시다. 라고 생각했드랬습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그 만큼 배우고 그만한 위치에 있으면서 거짖말같이 가난하게 살았던 것이 기억 됩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무능한 사람이요 세상에서는 바보가 되어야만 하는것입니다.

이번 재산공개를 한 정치인들 공직자들 중에 부정과 불의한 방법으로 축재를했다는 사람중에도 더러 기독인들이 끼여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런 명단에는 들어가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차라리 바보가 되는것이 났습니다. 왜 바보라고 하는지 아세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속담중에 아주 못된 속담이 하나 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인들은 ‘서울은 못가도 좋으니 바로 가라’ 이렇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60년대 이후 하도 못살던 시대이라 잘살아 보자는 구호아래 잘살기 위해 경제부흥운동이 일어 났습니다. 그때 광화문 네거리 시청앞 같은데 나가면 아침에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잘사는것 중요합니다. 그런데 잘사는데만 가치를 두다가 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치 지도자도 고위 공무원도 법관도 검사도 변호사도 교수도 군인도 재벌도 장사도 회사원도 노동자도 심지어는 교회도 모두가 돈을 모을수 있다면 무슨짖이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질적인 인간이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은 아니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그는 단순히 물질적인 인간이 아닌 영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영적 가치와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도 가치기준을 세상사람의 기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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