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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단의 타협안 (출 08: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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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세상을 살아갈때 적당히라는 말이 요긴하게 쓰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적당이라는 말은 국어 사전에는 정도에 알맞다는 말인데, 어떤 거래를 할때 양쪽의 요구와 양보를 조절하여 타협할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가 정치적 사회적 조건들은 어느 적절한 수준에서 절충안을 놓고 타협점을 찾아 해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與.野의 정치적 타협 勞.使간의 타협 또 우리나라의 현실적인 문제로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와서 정치적 경제적인 여러가지 요구를 하게 될것입니다. 이때 양국이 國益을 위한 타협을 하게 될텐데 이때에 적당한 선에서 절충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그런데 이 적당히라는 타협이 절대로 용납될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에 관한한 어떠한 타협도 있을수 없으며 타협안이라는 그 자체마저도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적당히라는 식의 타협안을 가져오는 사단의 전략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왕의 통치하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출하도록 모세를 애굽에 보내시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왕을 찾아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으나 바로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애굽땅에는 災殃이 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잘아는대로 재앙이 내려졌는데 그중 처음 세가지 재앙은 애굽땅 전역에 구별없이 임하였습니다. 그런데 3번째 재앙이 다 지나가기 까지 바로는 완강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다가 4번째 재앙이 임할때부터 바로는 태도를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앞에 굴복하는듯 하지만은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묶어두려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단의 교활한 방법의 공격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사단은 에덴동산으로 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에게도 시험을 하였고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끝없이 시험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단의 괴계를 알지 않으면 결코 사단을 이길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최초에 바로에게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멧세지의 주제는 아닙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Key Word가 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원받은자의 생리적 현상이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큰일나는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드리려 광야에 나가겠다는 제의에 바로의 妥協案은

(1)째로 이땅에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파격적인 타협안이라고 할수가 있습니댜. 왜냐하면 당시 애굽은 우상숭배의 제국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허락하는 것은 대단한 양보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떠나야 하겠다는 요구를 너희가 양보하고 여기서 예배하라는 合理的인 절충안을 낸 것입니다. 이말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적절한 타협안이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적으로 볼때 이렇게 타협할수가 있습니다.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여기서고 저기서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고 할수 가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마음가운데도 이와같은 타협안을 사단은 제시하는것입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이미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것입니다.

또 현실적으로 살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곳은 비록 애굽에서 종노릇하

는 삶이지만 거기에는 적당한 풍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속에서 애굽에서 풍요롭게 먹던 시절을 추억하면서 모세를 원망하던 시절이 한두번이 아니였음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애굽은 죄악의 도성입니다. 이곳은 떠나야 할 장소입니다. 예배자는 이런 자리를 떠나지 않고는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들일수 없습니다. 세상이 아름답고 아무리 짜릿한 쾌감을 줄지라도 과감하게 그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결국은 죽음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선택은 세상의 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신앙의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갈수 가 없습니다. 고후6:17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 따로 있으라 고 하였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해라 그러나 적당히 해라. 헌금생활을 해라 그러나 희생적으로 하지는 말아라, 봉사도 해라 선행도 해라 그러나 적당히 하라, 천천히 하라, 이담에 하라 ,성공한다음 하라 이담에 나이 들어서 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악인과 함께 죄악의 천날보다 하나님전 에서의 한날을 더 기쁘게 여길줄아는 신앙인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끌어 가시기를 계획하고 계십니다.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40년길을 유리한 그곳은 지금의 시나이 반도입니다. 이곳은 물도 없는 곳이며 풀한포기 자랄수 없는 그런곳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곳으로 이스라엘을 이끄셨는가 도저히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경영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것을 이해할수 있을 정도일 것입니다. 광야는 그야말로 외롭고 고독하고 위험하고 도저히 인간이 살아갈수 없는 곳입니다.

이곳은 인간의 힘으로는 살아갈수 없는곳이기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오직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양식으로만이 살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 하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곳으로 인도하여 연단을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간 연단을 받고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엘리야가 광야길 40주야를 보내며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고 돌보심을 받았던 사실도 보게 됩니다. 바울 사도가 아라비야 광야에서 연단과 기도생활을 하다가 3층천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던것을 보게됩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며 기도하셨던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교회 생활을 하는것은 광야생활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교회생활을 통하여 훈련을 받고 연단을 받고 기도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혹자는 내가 편안하고 복받을려고 교회를 다니는데, 또 내가 사회에서는 그래도 한다하는 지위에 있는데 교회에 와서 목사에게 이런 저런 간섭을 받고 섬기라는 소리나 듣고 다닐수 있느냐 할분이 있다면 이 분은 하나님의 나라인 가나안에는 들어갈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모세에게 반항하며 원망한 사람은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교회생활을 열심이 하시어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사단의 두번째 妥協案은 8:28에 보면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두번째 타협안은 먼저의 타협안보다 좀더 신축성있는 조건을 내세웁니다. 이것은 바로의 간계로서 언제고 광야에 나간 이스라엘을 군대를 보내어 다시 잡아 오려는 속셈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이 있을때마다 그들은 애굽을 생각하며 다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했던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광야에 너무 멀리 나가면 다시 돌아오기가 어렵지만 저들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면 언제가 다시 돌아 올수가 있게 되기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단의 고등술책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되너무 열심히 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는 참여하되 저녁예배는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저녁예배는 참여하되 삼일 예배는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삼일예배는 참여하되 새벽기도까지야 할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는 하되 금요일 기도까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단의 이 전략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유혹의 포로되어 우유부단한 신앙생활을 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완전히 떠나지 않으면, 안떠난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폼이 아니라 삶 자체입니다. 죄악의 땅을 완전히 떠나는 결단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결단코 허락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서는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흘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서 되돌아올수 없는 것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저들이 추격하여 따라올수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흘길은 의미적으로 죽음과 부활의 간격을 만드는 날자 입니다.이스라엘은 죽어야 합니다. 육이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려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밖혀 죽었고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고 내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과는 단절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전히 그리스도안에서 새 생명으로 누리게 되는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째로타협안은 모세가 10:9절에서 男女老少와 牛羊을 데리고 가겠다고 하자 바로는 10:11절에 보면 남자만 가라는 것입니다.

사단의 유혹은 때때로 매우 합리적일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광야는 험난한 곳입니다. 노인이나 부녀자들이 아이들이 가기에는 어려운 곳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들만 가라는 것입니다. 바로는 광야길에 아이들과 노인들 부녀자들을 데리고 가는것은 惡한 經營이라고 하면서 꾸짖게 됩니다.

여러분 주예수를 믿는데는 온가족이 다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가령 오늘은 날씨도 몹시 더운데 이 아버지가 대표로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오겠다 하는 것이나 같을 것입니다. 구원은 개인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너와 네가족이 구원을 얻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어려서 그 어머니 품에서 부터 신앙으로 양육 받았기에 바로의 궁에서 애굽의 모든 학문을 배웠지만 그는 하나님과 민족을 가슴에 품고있었던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어려서 부터 신앙으로 잘 양육하지 않으면 훗날에는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기가 어렵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사단은 네번째 타협안으로서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가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빼았으므로 이스라엘의 마음을 애굽에 묶어 두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소돔성에서 탈출하던 롯의 처가 소돔성에 두고온 재물에 정신을 빼았겨 뒤돌아 보다가 저주를 받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또 물질이 올바른데 쓰여지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단의 소유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우양을 가지고 희생을 드린다고 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께 드릴 희생물을 빼았으므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지 못하게 하려는 아주 고등한 술책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보면 연약한 신자들에게 물질이 많은 문제가 되는것을 보게 됩니다.그래서 나름대로 어떤 절충안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것을 많이 보는데,대개의 그 절충안이라는것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고 사단적인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것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새가 와서 먹을수 밖에 없듯이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것은 사단의 소유일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를 하나들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옛날 지금의 중국땅에 초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초나라에 ‘화’씨 성을 가진 정직한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어느날 이사람이 산에 올라갔다가 아주 귀중한 구슬을 발견 하였습니다. 그래서 선비는 이런 구슬을 왕께 바치면 왕이 기뻐하시겠다고 생각하여 당시 왕인 여왕이라는 사람에게 바치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구슬을 의심하여 감정사에게 의뢰하였더니 이것은 구슬이 아니고 돌이라고 감정을 하는 바람에 임금은 화씨에게 크게 책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화씨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감정사가 잘못안것이라고 주장을 하여 여왕은 크게 노하여 이 선비의 왼쪽 발을 잘라 내쫓았습니다.

그 뒤 초나라에 여왕이 죽고 무왕이 등극을 하게 되자 화씨는 구슬을 왕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무왕역시 감정사를 불러 감정을 하여 구슬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왕은 왕을 속인 죄로 오른발을 자르도록하여 쫓아 내었습니다. 화씨는 왕/게 구슬을 바치려다 두발을 모두 잃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무왕이 죽고 문왕이 등극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화씨는 산속에 들어가 사흘밤사흘낮을 계속 슬피 울었습니다. 어찌나 울었든지 나중에는 눈물이 마르고 눈에서 피가 쏟아져 나올 정도로 울었습니다. 화씨가 산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다는 소문이 문왕의 귀에까지 들어 갔습니다. 그래서 문왕은 화씨를 불러 들여 산속에서 슬피우는 까닭을 물었습니다.

화씨는 그간의 자초지종을 말하였습니다. 화씨는 ‘임금님 저는 두 발이 잘린것이 억울해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 그러면 무엇이 너를 그렇게 슬프게 한다 말이냐 ‘구슬을 돌이라 몰아 붙이고 정직한 선비를 거짓말쟁이로 몰아 붙이는 것이 서러워 우는 것입니다.

그러자 문왕은 화를 내면서 ‘그럼 너는 두다리를 모두 잘리고도 아직까지 그것이 구슬이라고 주장하느냐 네가 계속 구슬이라고 우기면 이번에는 네 목을 잘라 버리겠다’ 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화씨는 굽힘이 없이 ‘임금님께서 제 목을 자른다 하여도 구슬을 돌이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구슬입니다.’ 문왕은 화씨의 꿋꿋한 태도에 감탄을 하며 상을 내렸다고 하는 이야기 입니다.

가령 과게에 술을 드시든 분이 신앙생활을 하게되면 술을 끊으려고 많은 애를 쓰십니다. 그런데 과거의 술친구들이 자꾸 유혹을 해오게 됩니다.처음에는 자리만을 같이 하는데 어떠냐고 하다가 자리를 같이 하게 되면은 한잔만 하라고 하면서 유혹을 하게됩니다.그래서 한잔 두잔 받아 먹고나면 그 다음에 돌아가서 조롱을 합니다. 너도 별수 없구나! 비웃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리를 끝까지 사양했다고 하면 그자리에서는 욕을 할지라도 돌아가서는 속으로 대단한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야 하고 칭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도 우리가 고백한 신앙고백답게 사는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니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세상에서는 어엽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 부터 무시되거나 조롱 받을수 있겠으나 우리는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이세상에서는 타협을 잘하는 사람을 능수능라한 사람으로 인정 받을수 있을수 있을런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닙니다 .우리는 구별된 성도 입니다.반드시 지켜야 할 규범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속적인 삶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것이 비록 광야와 같을 지라도 영적 영역안에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안에서 주님과 동행하시는 아름답고 복된 우리 모두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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