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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랑 (요 0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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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할 수 있는 구절은 요3:16절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 ‘이처럼’이라는 말씀을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가 바로 요나서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가 받은 한없는 사랑, 영원한 사랑, 아낌없이 주는 사랑, 받을수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이렇게 노래 합니다.‘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수 없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제, 3치 혀와 언어 구사능력으로서는 도저히 표현 할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는 것이 어쩌면 속된 일이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오늘은 하나님의 사랑을 한번 생각해 보고 싶은데,요나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요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요나서의 핵심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도망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아 항복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요나는, 악독이 하나님께 상달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자옵고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타야 하는데, 그는 반대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게 된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나가 가는 배위에 대풍이 불게 해서 고난을 받고, 그 폭풍의 원인자로 지적받아 바다에 던져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에 삼켜져 삼일 삼야를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다시 나온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게 됩니다.
요나의 심판의 예언을 받고 니느웨성은 왕으로 부터 온 백성이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회개 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한편 요나는 니느웨 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 받을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서, 니느웨가 멸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니느웨성의 멸망하는 장관을 보고자 하여 성 동편 언덕에 올라 자리를 마련하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요나에게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머리위에 그늘을 마련하여 주시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여름8월의 한낮의 뙤약볕아래가 얼마나 뜨겁습니까 그런데 중동지방의 한낮의 뜨거움이란, 그저 깜박 할 정도로 현기증을 일으키는 뜨거움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요나에게 박넝쿨 그늘의 소중함과 고마움이란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늘에 앉아 곧 벌어질 장관을 기다리며 만족하여 있는 요나인데, 하나님은 벌레를준비하시어 박넝쿨을 씹어 순식간에 박넝쿨이 시들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혼곤하여 하나님께 죽기를 청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요나를 책망하시면서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루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아껴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고 책망하여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가치가 전도된 이기적인 사랑-
요나가, 니느웨성의 멸망을 바라는 마음은 이기적인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자기에게 잠시의 그늘을 만들어준 박넝쿨은 소중히 여기면서 저 큰 성읍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라는, 이 요나의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 이기적인 마음입니까 박넝쿨과 니느웨성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는 것이로되, 요나는 박넝쿨을 인하여 기뻐하다가 그것이 시들어 버리니까 화를 내면서 심판을 선언한 니느웨성이 빨리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하기를 기다리는 인간의 무서운 마음을 보게 됩니다.
예전에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로마의 황제 네로는 로마시에 불을 질러놓고 하프를 뜯으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 사랑하는 신하가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는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속담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남의 염병은 자기 곱불만도 못하다’는 말입니다. 힛틀러는 유대인을 자그만치 600만명을 학살하면서도 추호의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던 인간이라고 할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힛틀러가 자기의 애완용개가 죽었을때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극단적 이기적주의 풍조가 만연되어 인간성 상실이라는 중한 중병에 걸려 있습니다. 이와 같이 價値가 전도된 마음은 오직 자기만 볼줄아는 근시안적인 인간이되어, 이웃을 볼수 없는 이웃이 없는 사회, 자기만 잘 살고자 하는 마음가운데 부정부패와 무서운 범죄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이웃이 돈이 없어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도 거기에는 관심이 없으나, 자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라도 병들라 치면 병원으로 안고 달음질 치는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저 분당에는 3천평 대지위에 온갖 위락시설을 갗춘 교회를 세운다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올바른 교회관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의 가치관도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이웃이 없습니다. 이웃이 없는 교회는 이웃을 모르는 교인만을 양산할 뿐 입니다.
요나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 보다도 하찬은 박넝쿨에게 더 큰 관심과 애착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느웨성의 죄인들을 사랑하셨고 그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여러분 니느웨성 백성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니느웨성 사람들처럼 우리들도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였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들이였습니다. 세상에 소망이 없는자요 하나님이 없는자로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며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입니다.
니느웨 백성은 우상을 섬기며, 이웃 나라들에게 전쟁을 일으킨 잔인한 백성입니다.또한 하나님께 대해서 교만한 자입니다. 그들은 손으로 악한일을 행하며 회개할 줄도 모르는 자들이였습니다.
이와같이 죄악 가운데서 진노로 마땅히 멸망받을수 밖에 없는 니느웨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사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게 된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들이 알지도, 요청하지도 않은 요나 선지자를 택하여 복음의 사자로 보내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롬5:8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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