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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막 09: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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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후에 지도자인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 40일 기도 하면서 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 왔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가 없는 사이에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주님도 변화산에 오르실 때에 세 제자만 동행하고 나머지 아홉의 제자는 산 아래 두고 가셨다 오셨을 때, 제자들은 영적 무기력과 좌절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도자인 예수님을 항상 마음에 모시고 살지 않으면 우리도 같은 죄악에 빠질수 밖에 없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변화산의 영광에 대조되는 산아래의 상황을 보게 됩니다. 산위에의 영광과 산아래의 어두움, 최상의 축제와 산 아래의 시련은, 우리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영적 축복과 함께 우리는 이 땅에서 영적 싸움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롬8:17절에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것이니라 ’고말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풍성하신 은혜 가운데 살다가도 때로는 어려운 시련에 부딛쳐 아픔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시련 가운데서 우리만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시며 주님이 우리를 찿아 주신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딱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홉 제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으로 부터 능력을 받았지만 그 능력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무능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주신 능력을 전매 특허 맡듯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고 언제고 쓰고 싶으면 쓸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귀신들린 사람을 데려 왔을 때 시험을 하다가 결국은 실패하여 낭패를 당하고 그만 좌절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라 보여 집니다. 왜 실패 했느냐 그것은 예수님 말씀과 같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기도하지 않고는 절대로 우리의 것이 될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절대로 능력있는 은혜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아주 딱한 처지에 있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자식이 귀신이 들려서 고통중에 있는 사실을 보고 어쩌지 못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오죽이나 괴롭겠습니까 귀신이 아이를 꺼꾸러 뜨려서 아이가 입에 거품을 물고 이를 갈며 경련을 일으킵니다. 때로는 물에도 불에도 넘어 집니다. 이것은 이런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보지 않고는 아무도 이 아버지의 아픔을 가늠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으나 예수님은 계시지 않자 제자들에게 보여주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능력을 주신것을 써먹을때다 생각하고 자신있게 아이에게 손을 얹었거나 기도했을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자신들이 능력을 믿다가 낭패를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은 결단코 승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사람과 주님은 함께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신앙의 사람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하느 동안은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한번 자신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내가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인가 과연 우리 가정에 주님이 함께 하시는 가정인가 과연 내가 하는 일들이 주님이 인정하시는 일인가를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자신 있는 대답을 할 수가 없다면 여러분은 회개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변화산에 올라가셨다가 제자들에게 내려 오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영적싸움에서 패배한 상태에 낙심하고 있을 때 입니다. 주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실패를, 자기의 부족을 주님께 솔직히 고백하는 한은 다시 재기 할 수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의 부족을 자신들이 기도가 부족하였음을 고백할 때 주님은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저들은 주님과 불과 몇시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영적 싸움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물을 떠난 고기는 혹 살 수 있을런지 몰라도 주님을 떠난 삶을 반드시 실패요 죽음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속에서 주님을 제해 놓는다면 우리의 삶은 의미도 가치도 승리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한 순간도 주님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고 말씀보고 몸된 교회를 중심하여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한아이가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땅에 엎드러져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관심을 가지도록 우리는 우리의 범사를 주님께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세상 아버지는 모든 일들을 아버지께 가지고 나오는 것을 싫어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만, 우리의 영의 아버지께서는 절대로 싫어 하시지 않고 우리의 범사를 간섭하고 승리하도록 역사하시 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예수님이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여기 아이의 아버지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소서’라고 애원합니다.
여기 아버지의 애원은 당연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아버지의 형편에서는 그렇게 부르 짖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애원, 부르짖음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다만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스가랴서6:8에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고전16:18절에 보면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바울의 마음을 시원케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러분은 믿음이 답답한 믿음이 아니라, 여러분을 볼때에 하나님의 마음이 저의 마음이 시원케 하는 믿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만 한다면,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자라’는 것과 같은 복을 받게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탄원과 호소는 애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확실한 믿음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의 믿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무엇을 하실수 있거든’이라는 이라는 믿음은 제자들이 자기 아이를 고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지라도 주님께 대한 불성실한 믿음이라고 밖에 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지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책망하시면서 문제의 해결의 열쇠가 치료가 아니라 믿음에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아주 좋아하며 많이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믿는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은 믿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믿는 사람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하시는 일이 없다는 말씀입 니다. 즉 사람은 연약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 예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5:7절에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약합니다. 우리는 넘어 집니다. 솔직히 우리의 믿음은 보잘것 없습니다. 오죽 하였으면 ‘너희의 믿음이 겨자씨 만큼만 있어도 된다’고 하셨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 만할 지라도 예수안에 있을 때 모든것이 가능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긍정적 믿음, 적극적 사고는 매우 유익하고 좋은 것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신념이나 각오 자체가 믿음이 아니라는 점을 잊어 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믿는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은 인간 자체안에 어떤 가능성이 있다고 긍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만, 인간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거룩한 뜻을 이룰수 없는 죄인이요 전적으로 무능하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인간의 적극적인 사고나 긍적적 자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 하리로다’ 한것 같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나의 믿음은 겨자씨만 한 것이지만, 예수님의 능력이 나의 믿음의 통로를 통하여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책망을 받은 아이의 아비는 아주 의미있는 고백을 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이게 무슨 말입니까 믿는다고 고백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 없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이 사람이 먼저는 아이를 살려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믿음이 없음을 도와 달라고 간구 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 사람은 입으로는 믿나이다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믿지 못하는 것을 솔직히 고백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믿는다고 선언하면서도 자신의 不信仰을 인정했습니다.
여러분! 사실 이 사람의 고백은 우리 모두의 고백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부분적으로 불신자들 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여기 이 사람처럼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불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할 수있다고 하면 하나님은 활동하시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할수 있다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적어도 신앙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할수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실한 믿음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깊은 신앙심이 소문이 나서, 그 신앙의 비결을 배우겠다고 어떤 사람이 찾아 갔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찾아온 사람을 향하여 어떻게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그저 열심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열심히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라고 하시겠습니까
찾아간 사람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큰 믿음을 배우고 싶어서 찾아 왔습니다. 그 비결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하니까...
여인은 부끄러워 하면서 ‘아닙니다 잘못 아셨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지극히 지극히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무슨일을 하든지 ‘내 믿음으로 이루워 졌다’하는 사람은 실상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믿었기 때문에 믿음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가능케 해 주신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내가 못믿고 나의 믿음이 보잘것 없을 지라도 主님은 나를 사랑하사 은혜로 이루워 주신것이 많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안에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진정 주님앞에 서게 되면 믿음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불가능을 십자가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라고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할때 사랑많으신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겨자씨만한 믿음을 인정하시고 믿음안에서 주 에수의 능하신 손으로 축복해 주심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 멘

능력의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는 못하는 일이 너무 많고 안되는 일이 많고 또 시행착오도 너무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능하신 손으로 이끄시고 보호 축복하여 주신 은혜 가운데 여기까지 왔음을 고백하고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금 주님께 기도 합니다.저희의 믿음이 연약함을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일할 수 있도록 주님안에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의 믿음이 이 제단에 나타나 확증되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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