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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메시아 취임과 사탄의 반응 (막 0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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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확정(원문비평)

이 토막에는 원문비평적 문제가 별로 많지 않다. 사소한 것들은 놔두고 1:11의 문제 하나만을 거론하기로 하자.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이 원문 사본에서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1)…egeneto ek ton ouranon혹은(tou oupanou).
(2)…ek ton ouranon ekousthe.
(3)…ek ton ouranon .

이렇게 세 가지 종류로 분류된다. 둘째는 동사 egeveto가 ekousthe로 바뀌면서 자리도 옮겼다. 그렇게 되면 "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왔다는 말이 된다. UBS 비평판과 Nestle-Aland판이 줄곧 (1)을 원본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UBS 비평판 제3판까지는 (C)급으로 취급했고, 제4판에서는 (B)급으로 승급시켰다. 원문비평학자들이 (1)과 (3)을 다루어 보는 가운데 (1)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즉 (1)을 지지하는 사본이나 고대 역본이나 교부들의 인용들이 다른 두 가지 경우를 지지하는 것들보다 더 권위가 있어 보인다는 말이다. 결정인 것은 아니기에 (A)급은 아니고 (B)급에 두고 있다.

II. 문법적 고찰

< 9절 >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개역에서는 9절을 "…시고"라는 형식으로 마쳐서 10절과 연결시키는 동시에 9절 전체가 `물에서 올라 오셨다'라는 10절의 동사의 부사절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실은 9절을 완전히 독립된 문장으로 보는 것이 옳고 또 좋을 것이다. 즉 kai egeneto…elthen…kai ebaptisthn를 문자적으로 영어로 번역한다면 and it came to pass that he came … and that he was baptized가 된다. 그러니까 예수가 가셨다(elthen) 는 사건과 세례를 받으셨다(ebaptisthe)는 두 사건이 일어났었다(egeneto)는 말이다.

그 때에는 en ekeinais tais emepais의 번역인데 아주 막연한 느낌을 준다. 영어로는 in those days라는 말이니까 어느 정도의 시간적 과정을 짐작하게 한다. 세례요한이 광야에 나타나고, 고함을 지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세례를 주고 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 그 무렵이라는 말일 것이다.

요단강에서는 1:5에도 있는데 원문은 약간 다르다. 5절에는 전치사가 (in)이어서 "…에서"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9절에는 (into)라는 전치사가 나오기 때문에 의미가 다를 것이라는 추측을 자아낸다. 5절에서는 요한이 세례 주는 행위의 일반적 위치를 말하는 것 같으며, 9절에서는 예수가 세례 받는 사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 같다. 즉 물 속에(into) 잠겼다가 그리로부터 나온(ek tou udatos,1:10)사건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본다.

< 10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 내려오심 sxijonenous tous ouravous… to fneuma katabainon. 여기서 하늘이 갈라진다는 동사와 성령이 내려오신다는 동사는 현재 분사이며,글자대로 번역한다면,"그가 하늘을 보니 그것이 갈라지고 있었으며,또 성령이 보였는데 그가 그(예수)속으로 내려오고 있었다"가 될 것이다. 이미 완료된 동작들이 아니라 진행중인 동작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 12절 >

몰아내신지라 ekballei는 역사적 현재형으로서,과거사를 보다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한 현재동사이다.

< 13절 >

사십 일을 계셔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는 두 가지 동작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계시는 동작과 시험받으시는 동작 말이다. 그러나 en...peipajo enos를 두 동사로 여긴 것은 잘못이다. 단지 완전한 과거진행형으로 해석하면 그만이다.즉 "그는 얼마 동안 계속 시험을 받고 있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두 개의 미완료동사(en과 siekonoun)도 과거 진행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III. 문학적,편집사적 고찰

오늘의 본문은 116개 토막으로 이루어진 마가복음의 세째와 네째 토막의 연결이다. 누가복음은 그 두 토막 사이에 예수의 족보를 삽입했는데,그 족보만 빼면 공관복음 셋이 다 같이 그 두 토막의 사건을 연속적 사건으로 배열하고 있는 셈이다.

마가가 무수히 많은 사건들 가운데서 100여 개의 이야기만을 선발해서 수록한 것을 생각할 때,그 하나하나가 저자에게 얼마나 귀중하게 여겨졌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저자의 저술 목적을 달성하기에 불가결의 것들만을 골랐을 것이니 말이다. 마가복음저자가 확실히 마가 요한일 경우, 그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한 지식을 간접적으로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은 비교적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가복음의 마지막 4분의 일이 예수의 수난사화 즉 예루살렘 사화라는 사실은 그가 예수의 수난에 중점을 둔 때문이라고 말하지만,예루살렘 태생인 마가에게 있어서는 그가 제일 익숙히 알고 있고 또 목격한 일들을 세밀히 그리고 많이 기록할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반면에 갈릴리 사화에 대해서는 베드로를 위시하여 다른 사람들에게서 간접으로 들어서 아는 것들이었을 것이다.

마가가 수록한 것은 주로 예수의 수난사화와 기적사화들이며 예수의 교훈과 말씀자료는 매우 적다. 소위 Q자료(Logia)는 마가의 관심 밖의 것이었든지 아니면 그것을 입수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우리의 본문도 마가가 수집한 아주 간결한 두 토막의 이야기로서 그야말로 뼈만 있고 살은 붙어 있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마가의 이야기들이 대개 그렇게 간결하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을 자료로 사용하는 동시에 또 하나의 자료(Q)를 추가 자료로 사용하면서 살을 붙인 것을 우리는 그 세 복음 대조를 통하여 알 수 있다. 1:12-13을 마4:1-11과 눅 4:1-13과 비교하는 가운데서도 그 현상을 확실히 볼 수 있다.

마가는 이 두 토막의 짧은 이야기도 자신의 저술 의도를 잘 성취해 준다고 생각했기에 여기에 수록한 것이 틀림없다. 예수가 세례를 받았고 그 직후에 광야에서 40일간을 지내신 객관적인 사실을 단순히 보도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건들이 가지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들이 저자가 의도하는 목적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예수에 대한 무수한 구두전승은 이미 순수한 사건 묘사만이 아니라 신학적 해석과 설명이 붙은 것들이었다. 보통 인간의 눈이나 감각으로써는 알거나 느끼거나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을,성령강림 후부터 깨달은 사람들이 해석을 붙여서 구두로 전해 준 것들이 시간이 감에 따라서 더 세련된 설명과 해석이 붙어서 더 복잡한 이야기로 변해 갔다. 마가는 구전 변천의 비교적 초보 단계의 것들 중에서도 자기가 설정한 의도에 걸맞는 것들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점에서 이 토막들이 그의 의도를 만족시켰고 그것들이 가지는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마가는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을 확립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 많은 신도들의 그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사람들의 대속물(10:45)이 되시려고 오셨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의 신성에 대한 신념이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마가는 예수의 공생애의 길이라든가 예루살렘 순례의 회수라든가 예수의 족보가 어떻다든가 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다만 예수의 언동에 있어서 그가 틀림없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을 집중적으로 말하여 그에 대한 신앙을 일으키고,그러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수난하셨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박해받는 교회로 하여금 새 힘을 얻고 난관을 극복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수가 세례 받은 사건은 보통 사람의 눈에 조금도 특수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령한 눈으로 볼 때 매우 특수한 사건이었으며 마가의 시선을 끌고도 남을 사건이었다. 예수가 시험받은 사건 역시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깨달을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마가에게는 필요불가결의 것으로 여겨졌기에 그것을 수록한 것이다. 즉 그것들이 다 예수의 신성을 웅변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는 말이다.

IV. 주 해

< 9절 >

그 때에 (en ekeinais tais emerais). 세례요한의 운동은 팔레스타인 전역을 뒤흔들었다. 온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은 물론 기타 지방에서부터도 모든 사람이 그에게로 몰려 왔고,"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그의 설교의 말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 참회케 했고,또 세례를 받게 했다. 그들이 그토록 오래 동안 강대국의 속국이 되어 무진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그들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회개하라는 요한의 외침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찔렀을 것이다. 민족을 걱정하는 지사들은 오매불망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하던 터인지라 요한의 출현은 그들에게 큰 흥분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들은 재빨리 요한 주위에 모여들어 요한을 중심한 구국운동,독립운동을 꾀하며 미래를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외국의 점령 하에서도 약삭빠를 사람들은 만년 여당의 기질을 가지고 집권자들에게 아부하며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요한의 정체를 묻기도 했다. 자기들의 현재의 안일한 삶에 어떤 지장이라도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서였겠지. 이렇게 세례요한으로 인한 술렁거림이 지속되는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어떤 날,예수도 갈릴리 나사렛 동네를 떠나 이웃들과 함께 요한을 찾아온 것이었다. 사방에서 모여든 많은 군중이 앞을 다투어 요한에게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었다. 나사렛에서부터 먼 길을 걸어 요한에게 간 여러 사람들도 하나씩 세례를 받는 것이었다. 예수도 그들 중에 끼어서 꼭 같이 세례를 받으셨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가 받으신 세례도 자기들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꼭 같이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았으니 말이다. 물로 세례를 받을 때 나타나는 물리적인 효과는 우선 더위가 한 순간이나마 가시는 것이다. 요단 계곡은 무척 더운 곳이기 때문이다. 멀리서 걸어오느라고 땀이 났고 먼지가 묻고 땀이 흘렀었는데 물에 들어갔다 나옴으로써 땀과 먼지가 조금 씻긴다. 심리적으로는 그들이 자기들의 죄를 이미 고백했기 때문에 마음에 개운함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깨끗이 사죄를 받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상은 아니었다. 예수의 수세도 외견상 그들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 10절 >

그러나 예수가 세례를 받은 사건은 하나의 시공적, 물리적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시공을 초월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예수가 요단강 물 속에 잠겼다가 올라오실 때 그의 눈 앞에 신비한 광경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이 사건의 진상을 본 사람은 예수 자신과 세례요한 외에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요1:33에서 세례요한이 고백한대로 하나님께서 계시의 영을 주셨기 때문에 요한이 예수의 수세 사건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그의 사역의 어느 순간에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세 사건의 비밀을 설명해 주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수세 사건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감지될 수 없는 신비하고도 초월적인 사건이었고,따라서 그 사건이 가지는 의미는 사람의 일반적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이 사건을 구전으로 물려준 이유,그리고 마가가 이 사건을 여기에 소개하는 이유는 이 사건이 예수의 신성을 잘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하늘이 갈라짐 (sxijomenous tous oupanous). 다른 사람들이 세례 받을 때에는 그들 자신의 주관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데 불과했다. 그러나 예수가 세례 받을 때에는 우주적인 현상이 일어났다는 말이다. 그것이 가시적인 사건이었다면 적어도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다 목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예수 자신과 요한만이 보았다는 것은 그것이 영적인 사건이거나, 상징적 계시의 사건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수세와 하늘이 갈라진 사건이 신학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 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마태와 누가는 "갈라진다"는 표현을 "열린다" (aneoxthenai)로 바꾸었는데 그것은 하늘의 그 변동을 약간 약화시킨 감이 있다. 하늘의 문이 있어 그것이 자연스럽게 열렸다는 감을 준다. 그러나 "갈라진다"는 표현은 "찢어진다"는 뜻으로서, 하늘이 하나의 고체로 된 칸막이와 같이(하늘을 firma ment라고 할 때 굳은 물체를 연상케 한다) 꽉 막아 놓아 이 쪽과 저 쪽이 통과불능의 상태였는데 그 하늘이 누군가에 의해서 찢어지고 갈라져서 인제 이쪽과 저쪽이 서로 통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사건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순간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막은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사건과 통하는 것이며 (막15:38 ; 마 27:51 ; 눅 23:45)공관복음 저자들이 한결같이 "갈라진다, 찢어진다"(esxisthe)라는 동사를 사용했다. 예수가 세례 받은 사건은 보통 사람 하나의 수세와는 근본적으로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거이다. 즉 예수는 보통 사람 하나가 아니다. 사람은 죄가 있기 때문에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하며,그 표로서 세례를 바는 것이지만, 예수는 무죄하신 분으로서 죄의 고백이나 사죄나 그 표징인 세례 받는 일이 필요하지 않은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마태복음이 제시한대로(마 3:15) "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마 1:21) 위해서 오신 분으로서 인간 전체의 죄를 한 몸에 걸머지시고 물 속에 들어가신 것이다. 예수의 수세 사건은 인간의 죄를 몽땅 물 속에 매장하신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가 물에서 올라오신 것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 승천하시는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가 본래의 계획대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결국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장벽이 무너지고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예수의 수세가 구원론적인 사건이라는 것,그리고 예수가 보통 사람 하나가 아니라 인류를 죄에서 구출하시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오신 대속의 주시라는 것을 말해 준다. 물론 속죄 사업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에야 될 일이지만 예수의 수세 사건을 통하여 예표적(豫表的)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예시한 것이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 (to pneuma os peristeran kataba inon eis auton). 예수가 물에서 올라오시면서 스스로 본 둘째 번 사실이 바로 이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세례 받고 올라올 때는 아무런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는데,예수의 경우에는 이렇게 또 하나의 신비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목격한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 신비한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확신 있게 증언했다. 예수야말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것과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요 1:33-34). 성령이 내려오셔서 예수 속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예수가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 그 속에 같이 계신 분, 즉 신-인(神-人)이심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는 말이 없다. 다만 그 사건의 의미가 뭐라는 것을 설명하는데 치중한 것 같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예수 안에 같이 계셨다는 것은, 예수가 사람 보기에 사람으로 밖에 안 보이지만 그는 확실히 사람 이상이며, 신-인이었음을 나타낸다.

비둘기 모양. 성령을 대표하기에 가장 적당한 표상(表象)으로 비둘기를 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적인 표가 없으면 하나의 환상이라고 생각되기 쉽다. 비둘기는 위에서도 언급된 대로 여라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확실하게 무엇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비둘기다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예수 속에 임하셨다는 것이 요점이다. 보통 사람은 그냥 사람이다.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을 간헐적으로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에는 그가 탄생하실 때부터 성령으로 잉태됨으로 해서 보통 사람이 아님을 나타내셨고,이제는 성령이 "형체로"(눅 3:22) 임하셔서 그 위에 머무실 뿐 아니라,그 속에 들어가 계셨다(막 1:10 eis auton)는 사실로써 그가 신령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은 셋째 사건이 여기 있다. 즉 그들에게는 하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는데 예수에게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예수가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특이하지만,하나님의 음성의 내용이 바로 직접적으로 예수의 신자성(神子性)을 명확히 말해 준다는 데 특이성이 있다. 사람의 증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증언이기에 그 이상 더 좋은 증거가 필요하지 않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의 `사랑하는 아들'(agapetos)은 창 22:2에서 "외아들"을 가리키는 말로 나타난다. 즉 극진히 사랑한다는 말일 것이다. 문자 그대로 예수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는 말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시편 2:7에서는 이스라엘의 왕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고,고금의 역사에서 한 나라의 임금들을 천자(天子)라고 한 것을 볼 때,여기도 예수를 왕으로 선포하는 장면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동시에 역사와 만물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공표하시는 순간이다.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케 하시는 하나님의 엄숙한 선언예식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 이외에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존재가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엄숙히 선포하시는 순간이다. 거기에는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포함되며,하늘의 사탄과 악령들도 다 포함된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의 메시아취임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 한 면 이것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 주권에 도전하고 있던 사탄과 악한 세력에 대한 선전포고이기도 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en soi eudokesa). 이 구절은 이사야 42:1에서 울어 나온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종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좋아하신다는 말이다. 만일 이 말이 이사야서의 말씀을 반영하는 발언이라면 예수를 하나님의 종으로 생각하시고 그를 좋아하신다는 말씀일 것이다. 즉 예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유는 예수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역할을 받아 감당하시기 때문이라는 말이 된다. 예수는 왕으로 군림하시지만 세상에 사시는 동안 확실히 종으로서의 사역을 통해서 그 과업을 완수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기서 예수의 본질적인 신분(아들이시며 왕이신 분)과 아울러 임시적으로 세상에서 가지실 종의 신분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상의 세 가지 사건에서 예수는 특수한 신분의 존재이며 일반인과는 판이한 존재임이심이 잘 드러났다. 마가의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12-13>

예수가 세례를 받은 사건은 이제부터 그가 공생애에 나서시게 되는 전환점이었다. 성령을 지니신 예수는 문자 그대로 성령의 사람으로 행동하게 된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셨다는 말은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이 이제부터는 인간 예수의 단순한 행동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으로써의 행동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인간을 죄와 악에서 건지는 사역을 수행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은 곧 인간을 범죄케 하고 자기의 하수인을 만든 악마 즉 사탄과의 싸움을 본격적으로 벌려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위에서 사탄에 대한 선전포고라는 말을 했다. 예수가 세례를 받는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 중에 그 사건을 유심히 관심 있게 본 사람은 세례 요한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수세 사건이 외형적으로는 자기들의 것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의미를 알고 초 긴장 속에서 지켜본 자는 사탄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마침내 예수를 향하여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하나님의 선포를 듣는 순간 유독 사탄은 당황하고, 무서워하고, 곤혹스러웠다. 자기의 운명의 시각이 박두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탄의 졸개가 귀신이라고 본다면,그 귀신들의 두목인 사탄이 예수의 메시아취임에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것에서 예수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다. 귀신은 사람을 깔본다. 예수가 한낱 사람에 불과하다면 사탄까지 등장할 필요가 없다. 성령의 사람이신 예수는 물론 사탄의 도태를 모를 이가 없다. 이제부터의 그의 삶은 악마와의 전투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광야(eremou) 는 대개 악령들의 거처로 여겨지고 있다. 예수가 할 일이 사탄과의 전투요 그 전투에서 승리하는 일이기에 예수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지 않으시고,사탄의 고장인 광야로 나가신 것이다. 상징적으로 말한다면 광야는 이 세상일 수도 있다. 예수는 하늘에 계시지 않고 사탄이 광란하는 세상으로 전투를 위해 적극적으로 내림하신 것이다. 마태와 누가에서는 예수가 40일 간 금식하신 다음에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신 것으로 묘사하지만, 마가는 그 40일이 예수의 시험 당하시는 기간인 것으로 말한다. 여기서 40일도 상징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고,예수의 일생을, 특히 공생애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즉 예수의 생애는 전부가 사탄과의 전투의 삶이었고 사탄은 사사건건 예수를 넘어뜨리려는 교묘한 공작을 하면서 끈질기게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광야에서의 실제적 시험 사건은 하나의 축소판이요 예표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험을 받으셨다 (en...peirajomenos). 여기서 "시험"이라는 것은 "유혹"을 의미한다. 예수를 test한 것이 아니고 tempt한 것이다. 사탄은 예수와의 정면 대결을 통해서 결판을 내고 예수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겠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자신이 없기에 옛날 첫 아담을 속임수로 넘어뜨린 것처럼 이 둘째 아담도 유혹을 가지고 속여서 넘어뜨리려고 획책한 것이다. 마태와 누가는 세 가지 미끼를 가지고 교묘하게 예수를 유혹한 구체적인 얘기를 소개한다. 마가는 단순히 사탄이 예수를 40일 간이나 유혹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실제로 마가복음에는 예수가 사탄의 졸개들과 때로는 사탄 자신과 전투하시는 사건들을 복음서 전체에서 다루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도 예수의 계속적인 수난의 모습이 보인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사탄을 멸하시기까지 줄곧 계속적으로 사탄과의 전투를 하는 삶이 바로 예수의 일생이었다.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야수들이 득실거리는 광야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치열한 투쟁을 요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사탄의 유혹을 받는 고통스럽고도 생사결단의 삶을 또 다른 표상을 가지고 묘사한 것이라고도 보여진다. 즉 짐승을 악마의 화신이라고 본다면,결국 예수의 고달프고 고통스러웠던 광야 생활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면모일 수 있다.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광야 40일간의 치열한 싸움에서 예수가 당하신 고통이 크면 클 수록,예수가 그 전투에서 살아남으시고 마침내는 승리자가 되셨다는 데서, 그의 위대하심과 신성의 소유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태와 누가에는

광야에서 예수가 유혹을 이기신 사실을 말하지만 마가는 그 승리를 뒤로 미룬다. 예수가 사람이라면 의례 사탄의 미미한 졸개 하나에게도 패배를 당할 터인데,악마의 괴수인 사탄에게 계속 시험을 당하면서도,하나님의 사자의 시중을 받으시며 버텨나가시는 모습을 그려줌으로써 수난의 예수와 아울러 인간 이상의 존재이신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V. 사 역

9 그 즈음에 예수가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한에 의하여 요단강 물에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10 그가 곧 물에서 올라오시면서 하늘이 갈라지는 것과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의 속으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1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너를 기뻐한다.
1

2. 그리고 곧 성령이 그를 광야로 몰아내셨다.
13 그는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고 들짐승들과 같이 계셨다. 그러나 천사들이 그를 시중들었다.

VI. 메시지

사람의 지각은 불완전하여 초월 세계를 보거나 감지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이나 신령한 세계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고 감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신령한 세계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생래적으로 인간은 그러한 능력을 못 가지고 태어났을 뿐이다.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그대로 두시기를 원치 않으시고 보다 높은 차원의 세계를 알고 경험하고 마침내는 그 높은 세계에서 살게 하시기로 계획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를 삼으시고 당신의 나라의 시민이 되게 하셔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하시려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계신다. 그 조치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이 성육신 사건이다. 인간을 실존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스스로 인간이 되어 오시고,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은 사람들의 눈에는 오직 사람으로만 보이셨기 때문에 그를 하나님으로,그리고 우리의 구주로 깨닫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그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생전에는 예수를 인간의 참된 구주로 깨달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예수의 제자들도 바로 깨닫지를 못했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의 수세와 시험 당하신 사건에 대해서 신앙의 사람이 말해주는 증언의 한 토막이다. 세례요한이 그의 인간적 감각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깨달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영의 가르치심과 계시를 통해서 깨달은 것이다. 오늘의 본문의 내용도 보통 인간의 눈에는 감지될 수 없는 것을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후에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깨닫고 전한 전승의 한 토막이다.

마가를 통하여 전해진 신앙적 증언에 나타난 예수는 어떤 분이셨는가를 본문에서 알아보아야 한다.

(1) 예수가 물에서 올라오실 때 나타난 우주적 응답은 예수가 우리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신령한 자만이 볼 수 있는 것인 바, 인간의 모든 죄를 한 몸에 걸머지시고 물 속에 매장하심으로 이제는 하늘의 장벽이 무너졌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빠"하면서 나아갈 수 있게 됐다. 그러므로 예수는 우리의 길이요 생명이시며 문이시다. 그냥 여인이 낳은 일개 성현이나 군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열어 주시려고 하늘에서 오셨던 구주이심을 믿고 깨달아야 할 것이다.

(2) 예수는 확실히 역사적 인물이다.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에 유대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던 존재이시다. 그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정신병자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는 사람 이상의 존재였었다. 확실히 사람이시면서 또 하나의 차원을 가지신 존재이셨다. 그에게는 성령이 완전히 내재해 계셨다. 우리들 크리스찬은 성령의 감동을 받으며 그의 가르침과 교통하심을 힘입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이시고 우리 밖에서 우리의 보혜사로서 우리를 지배하신다. 옛날 선지자들도 성령의 감동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 성도나 옛날의 선지와는 달리 성령과 예수가 동재하신 [신-인]이셨다. 그는 어디까지나 사람이시면서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셨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감히 그를 흉내낼 수 없다. 우리는 예수를 그냥 사람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요사이 단원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상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3)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를 당신의 아들로 공포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예수를 만유의 왕으로 공포하셨기에 우리는 그를 도마처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20:28)으로 모셔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이시다.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삭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그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 위해 주신 것은 우리를 또한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4) 예수는 사탄을 이기고 그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역할 을 하시는 분이시다. 사탄이 예수를 유혹하여 넘어뜨리려고 한 것은 사탄의 착각이요 그의 방자함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사탄을 이기고 가둘 자가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기에 하나님이신 예수가 나타나신 것이다. 인간의 소망은 여기에 있다. 예수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영원히 사탄의 하수인,그의 종으로 살다가 영원한 심판의 불구덩이 신세가 됐을 것이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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