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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쓰시옵소서 (막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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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오늘은 이 날 일어난 사건 가운데서 아주 작은 사건 하나에 우리의 관심을 기울여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을 거쳐 여리고를 지나셔서 예루살렘 가까이 있는 동네인 베다니 벳바게에 도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여행은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는 마지막 여행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는 도보로 여행하여 오셔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예루살렘을 앞에 두시고 새삼스럽게 나귀를 구하시어 타고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또 제자에게 분부하시기를 건너편 베다니로 가서 아무도 아직 타지 아니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사람이 왜 몰고 가느냐고 묻거든 그저 "주께 서 쓰시겠다고 하라"고 분부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분부대로 행하여 나귀 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이 나귀 새끼를 주님께 기꺼이 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마도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으로 예수를 믿게 된 시람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친척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자기가 소유한 짐승을 즐겨 바칠 수 있는 그 마음이 돋보이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께 아무도 타보지 아니한 나귀 새끼를 빌려 드릴 때 어떤 이해 관계를 계산하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자들처럼 예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 한 자리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나귀 새기를 빌려 드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죽었던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굉장히 감동을 받고 있었는데 그 주님께서 자기의 나귀를 쓰시겠다고 하자 즐거운 마음으로 그 요구에 응하였을 것입니다.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이해타산에 밝을 때도 있지만 신앙 속에서 감동을 받을 때는 아낌없이 자기의 소유를 신앙의 대상에게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우상을 숭배하는 신앙의 형태가 어떤 면에서는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데 우상숭배는 어디까지나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것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이기심이 없는 헌신이오, 상호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있습니다. 우상 숭배는 공포나 이기심이 바탕이 되어 있어서 거기에 어떤 인격적인 관계 즉 존경이나 사랑하고 그가 요구하시는 일에 인간이 응답하며 인간적인 교제를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다른 신 보다 높고 크신 분이라 한 것은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또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려고 힘써 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요구를 하시는 까닭은 인간을 사랑하심이요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기 위하여서 입니다.
제가 학교에 있을 때 반에 들어가면 먼저 출석을 부르는데, 내게 펜이 있으면서도 앞에 있는 학생에게 펜을 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학년일 경우는 앞에 있는 학생들이 서로 먼저 자기의 펜을 주려고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자기 것을 사용했다는 것이 학생에게는 기쁜 일이요, 이런 관계를 통해서 사제지간의 존경과 사랑이 싹트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에게 무엇인가 요구하시므로 그의 사랑과 관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요, 우리의 기쁨으로 그와의 교제를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을 때 우리의 생각에는 좀 무리한 요구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이 여기에 아무 항의도 없이 묵묵히 응답하므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는 신뢰와 사랑으로 이루어진 인격적인 관계로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신뢰하였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선한 분으로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관계는 어떤 세력도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고백한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과 욥과의 관계도 이런 관계였습니다. 사탄이 이 관계를 끊어 버리고 욥이 가진 모든 재물과 자식을 빼앗고 그의 품에 종기가 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곤경 가운데서도 결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물질적인 축복이나 어떤 세상적인 축복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이런 인격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신앙을 이렇게 인격적인 관계라고 볼 때, 나귀의 주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주님의 필요에 서슴지 않고 응한 것은 그가 얼마나 주님께 대한 열렬한 신앙을 가졌던가 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의 불신앙은 주님과 더불어 거룩한 교제를 한다면서 주님의 요구에는 일체 응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자기의 요구만 내세우고 주님께 졸라대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내 요구만 철저하게 관철시키려 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는 지극히 적은 일이라도 사양하고 때로는 비겁하게도 주저하고 때로는 못들은 척 외면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너희 날 주라 부르면서도 따르지 않고,
너희 날 빛이라 부르면서도 우러르지 않고,
너희 날 길이라 부르면서도 걷지 않고,
너희 날 삶이라 부르면서도 의지하지 않고,
너희 날 슬기라 부르면서도 배우지 않고,
너희 날 깨끗하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고,
너희 날 부하다 부르면서도 구하지 않고,
너희 날 영원이라 부르면서도 찾지 않고,
너희 날 어질다 부르면서도 오지 않고,
너희 날 존귀하다 하면서도 섬기지 않고,
너희 날 강하다 하면서도 존경하지 않고,
너희 날 의롭다 부르면서도 두려워 않으니,
그런즉 너희들
너희를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의 전부를 주셨습니다. 이에 응답하여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때에 진정한 신앙이 싹트는 것입니다. 주님의 요구에 응답하여 전부를 드리지 아니하고는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부부의 관계로 표현합니다. 부부의 관계란 서로를 전부 줌으로 이루 어지는 관계입니다. 거기에는 조금이라도 가리움이나 남기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있을 때는 이미 부부 관계에 금이 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시려 올라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생명까지도 주시려 하시는 예수님에게 이 나귀 새끼를 바친 그 베다니 사람은 위대한 신앙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과 교제를 나누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기쁨으로 주님의 요구에 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환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고 두려워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사하여 주심을 체험하였고, 그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는 주의 목소리를 듣자 그는 곧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겠다 할 때 비록 보잘 것 없는 우리이지만 "주여, 어서 쓰시옵소서"하면서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신앙의 자리에 이르려고 하는 것 이 우리의 목표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일은, 우리가 주님께 쓰인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쓰일 가치가 없는, 보잘것없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선 무한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다니 작은 마을에서 이름도 소문도 없이 자라난 한 마리 나귀 새끼가 주님의 영광스런 길에 쓰여졌다는 것은 이 짐승의 자랑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전해지는 동안에는 이 이름 없는 나귀 새끼의 자랑이 전해질 것입니다. 그 나귀 새끼에게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주님이 이것을 택하여 자기의 소용에 사용하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변변치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를 쓰시어 옛날 예언자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라9:9)
사람이 쓰임을 받는 꺾는 영광스러운 일이요, 버림을 받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 는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는 말씀처럼 사람이 아무 쓸모가 없어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큰 수치와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고 해도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을 받을 수 있다면 그처럼 보람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아무도 그의 가치나 존재를 인정해 주지 못할 만큼 버림을 받은 사람일 것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택하여 쓰신 인물들을 보면 결코 처음부터 위대한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지혜 있는 자나 능한 자나 문벌 좋은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는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이었으며,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력하다는 자들을 무력하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천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과 존재 없는 자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1:27-28)
장인이 버린 돌이 집모퉁이의 요긴한 머릿돌이 된다는 말씀대로 사람이 쓰지 못할 것이라고 버린 것도 하나님의 손에 쓰여질 때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이룩하게 되 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실 때는 보잘것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주님이 쓰실 때에 큰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고재봉같은 살인자라 할지라도 주님이 들어 쓰시므로 놀라운 전도자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던 것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쓰신다면 사람이 상상도 못할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을 더욱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오늘 내가 너를 쓰겠다"고 요구하고 계신 줄 압니다. 이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보잘 것 없는 자이지만 주의 일에 써주시옵소서"하고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어떤 자이건 상관할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있는 그대로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주저하지 않고 주님의 요구에 응답하면 거기에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를 전부 드릴 때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도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주님과 진정한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철원 성결교회의 새 역사도 주님의 요구에 응답하시는 여러분들의 헌신과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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