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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마 0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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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356년에 태어나서 20세에 왕의 자리에 오르고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과 예수님은 공통점과 상반된 점을 소개를 합니다. 예수님과 알렉산더 대왕은 아주 젊은 나이인 33세에 생을 마쳤습니다. 알렉산더는 왕궁에서 왕자로 태어나 왕자로 자랐고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목수의 일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왕궁에서 열병에 걸려 며칠을 앓다가 여러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고귀한 왕으로 바벨론 왕궁에서 죽었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다가 잡히셔서 조롱을 받으시면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일생은 위대한 것같고 성공적인 것 같지만 자신 한 사람의 소유와 야망을 불태우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피를 흘렸고 예수님의 일생은 실패한 인생과 같지만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버리고 자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알렉산더는 모든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버렸지만 예수님은 모든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으며 알렉산더는 역사를 만들었고 예수님은 역사를 변화시켰다고 합니다.

이제 한 주간만 지나면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탄생하신 성탄절이 됩니다. 오늘날 성탄절에는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가 그 참된 의미를 잊어버리고 그저 즐거운 날이 되었고 아이들에게는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 아니라 싼타할아버지가 되었으며 엄마 아빠에게 좋은 선물을 받는 날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크리스마스는 천주교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성탄절보다는 부활절이 더 의미가 있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천주교인들은 이 성탄절을 통하여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보다 마리아를 더 위대하게 만들고 숭배하는 신앙을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탄절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인 말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마리아가 중요한 인물이 아닙니다. 마리아라는 여인은 위대한 신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시기 위하여 잠시 빌려 쓰신 여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만드시고 하늘을 지으시고 하늘에 계셨던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셔서 친히 이 죄많은 세상에 나려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는가를 생각하여 보면서 은혜를 받고 성탄절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1. 임마누엘 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셨습니다. 즉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 곳에 아담과 하와를 만드셔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와 함께 계셨습니다. 동산 나무 숲을 거닐 때도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와 함께 대화를 나누시며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사단의 말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배신한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 후에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인간은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 숲 어두운 곳에 숨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잊어버리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떠나셔서 인간이 사시던 땅에 계시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름은 노아, 아브라함, 이삭, 요셉, 그리고 모세와 같은 사람들이었고 또한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운 사람들에게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과 함께 하시고 모든 인간들과 동행하셨다는 증거는 성경에서 찾아 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2천년전 유대 땅의 베들레헴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며 인도자가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범환 죄가 두려워서 동산 나무숲 속에 숨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아담에게 나타나셔서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부르시고 찾아 오셨습니다. 이는 죄를 범한 아담이지만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이시고 죄를 범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이셨습니다.

애굽의 왕자로 있던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애굽의 감독을 주먹으로 쳐서 죽이고 광야로 도망쳐 나와서 시내산 기슭기에서 양을 치는 목동으로 40년간 살았습니다. 이제 모세는 늙은 몸으로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애굽 땅에서 고통 당하는 자기 동족을 생각할 때에는 가슴이 아프기만 하지만 자기에게는 그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양이나 치다가 늙어서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의 불꽃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 모세와 함께 계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로 지팡이를 들려 주셨는데 그 지팡이는 능력의 지팡이 입니다. 그래서 지팡이를 던지면 뱀이 되기도 하고 지팡이로 홍해를 치며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함께 하심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양을 치던 늙은 목동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고 혼자의 몸으로 강한 군대와 많은 무기를 가진 바로와 싸워서 이겼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모세는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모세와 함께 계시고 다윗과 함께 하시던 하나님께서 오늘 현대에 이 시간에 한국에 사는 나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계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를 주고 놀라운 힘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로울 때 내 옆에 다정한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군대에 있을 때 저희 부대로 파견 나와서 근무하는 방영환이라는 위생병이 있었는데 혼자서 얼마나 외롭게 지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친구가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종일 책을 읽거나 자기 애인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친구가 되주었습니다. 함께 외출도 하고 함께 교회도 가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군대생활 중에 1년정도를 우리와 함께 지냈는데 그 때 우리는 정이 들어서 제대를 한 후에도 그 친구가 우리 집에 찾아오기도 하였고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얼마 전까지도 편지 왕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은 우리가 외롭고 힘들 때 나의 곁에 오셔서 나를 위로하고 함께 계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로울 때 주를 바라보고 슬플 때 주님께 위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71:21에서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하였고 시119:50에서는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은 위로를 얻고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임마누엘 하셔서 우리와 함께 게시고 우리들의 앞길을 인도하시고 위로하시며 힘을 주시는 것을 믿고 용기를 가짓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 다는 믿고 사는 성도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2.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계3:20을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들의 문밖에 서셔서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며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한다면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잃어버린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시기를 기다립니다. 눅15:11이하를 보면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가 둘째 아들의 이야기인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 아래서 아버지를 섬기며 사는 것이 싫고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싫어서 세상으로 떠났던 자입니다. 그래도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간 아들을 못 있고 매일 동구밖에 나가서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에게는 이 세상이 평안하고 행복하며 즐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반대로 세상은 고통이었고 괴로움이었습니다. 자신의 재산은 다 탕진했고 이제 굶주림으로 죽을 지경이 되어서 생각 난 것이 아버지의 집에서 평안하게 살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아! 나에게는 아버지의 집이 있지 그곳은 종들도 배불리 먹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는데 나는 이 고생이 무엇인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자!”
“혹 아버지가 나를 용서하지 않고 꾸짖는다고 하여도 나를 아들로 생각하지 말고 종으로라도 부려달라고 애원을 하자!” 하고 아들은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 왔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는 그 아들의 목을 껴안고 눈물로 맞아 했으며 냄새가 나는 더럽고 추한 죄악의 옷을 벗기고 새옷을 입히고, 새 신을 신기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 아들이라는 약속의 표시인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온 동리 사람들을 부르고 죽었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 왔다고 잔치를 베풀게 된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잃어버린 자들이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을 실천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몇 일전 저희 가정에도 잃어버린 영혼 하나가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 왔습니다. 바로 제 위의 형님이신데 원래 이분은 청년 때 신앙생활을 잘하던 분이십니다. 청년회에도 열심히 참석했고 주일학교 교사도 하였고 산상성회에 참석하여 은혜도 받고 세례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인가 탕자가 되어 하나님의 품을 떠나 20여년 간을 살았습니다. 이제 형님의 큰 아들이 내년에는 고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고 원래가 건강하신 분이라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시는 분으로 올 여름에도 얼마간의 돈을 벌어 통장에 넣어 두시기도 하였습니다.
저희 집은 명절 때가 되면 아침 상을 준비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그 형님은 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이제는 우리도 제사를 드려야 나중에 아이들이 효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사를 지내면 명절 때가 되도 집에 오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11월 4일 금요일 저녁에 형님은 술을 한잔하시고 막내 딸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저녁식사를 하러 오다가 길옆에 세워둔 볕가마에 오토바이가 스치면서 넘어졌는데 귀에서는 피가 나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급하게 평택의 박애병원으로 후송을 했는데 머리는 이상이 없고 뼈하나 부러진 곳이 없는데 넘어질 때의 충격으로 콩팥이 하나 파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하게 수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평택에서도 치료가 잘되지 않아서 제가 앰불랜스에 싣고 서울 고려대학병원으로 가는 데 사람은 호수상태이고 금방 죽을 것 같기만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잘 치료가 되어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 정도 넘어져서는 콩팥이 다칠 이유가 없는데 콩팥이 상한 것입니다. 절벽으로 떨어진 것도 아니오 그저 오토바이를 안고 넘어졌는데 콩팥이 파열된 것입니다. 그리고 콩팥이 파열될 정도면 갈비뼈가 몇 개 부러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머리에서 피가 났는데 머리가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천운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난 주에 교회에 나가서 회개를 하고 하나님 품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전화를 드렸더니 식사도 잘하시고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콩팥은 하나 없지만 이제 몇 개월만 지나면 하나 남은 콩팥이 잘 발달하여 크기가 커지고 없어진 콩팥의 기능까지 감당한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잃어버린 자는 어떻게 해서라도 찾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건강할 때에는 건강함을 의지하고 자기 고집대로 살고 제 마음대로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찾으시니 꼼짝 못하고 탕자처럼 굶주림에 지쳐 있다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정에도 잃어버린 자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속히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들은 언젠가는 회개하고 돌아올 것입니다. 그 때까지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것입니다.
창3장을 보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하고 하나님이 두려워서 숲 속에 숨어버린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한 마리 잡으셔서 가죽을 벗기시고 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운 죄악의 모습을 가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시대에는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하여 소나 양 염소를 잡아서 피를 제단에 뿌리며 하나님께 속죄의 제물을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짐승으로 피로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가릴 수 없고 씻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우리들의 모든 죄에서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으며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신의 생명을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을 믿는 성도에게는 새생명을 소유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다미엔 성당에서 기도를 드릴 때 환상을 보게 되었는데 그 모습은 십자가에 달려서 붉은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프란시스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주신 주님이시여” 라고 눈물로 고백하고 그 후에 자신도 온전히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받쳤다는 것입니다.

모라비안교를 창설한 젠센돌프도 어느 날 박물관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 있는 성화를 보는 순간 성화에서 예수님의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지금도 고난을 받으시는 주님이시여” 라고 통곡하면서 헌신을 결단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제물이 되시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는 성도는 지금도 누구나 죄에서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을 것이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고 천국백성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주님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시기 위한 길과 진리가 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갈 길을 잃고 있는 무리들을 인도하시며 이 땅에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시고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시고 계십니다. 또한 잃어버린 영혼들 하나님을 떠나고 죄악의 길에서 허덕이는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성탄절에 우리들은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힘을 얻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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