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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임마누엘 예수(2) (마 0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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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주 해

< 18절 >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여기서 "나심"은 원어로 인데, 어떤 사본에는 γεννηαιs로 나온다. γεννηαιs는 γενναν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서 출생 자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γενεσιs는 γιγνομαι는 다른 동사에서 온 것으로 의미가 조금 다르다. 창세기를 LXX(70인역)에서 γενεσιs라고 불렀고, 창2:4에서 "천지의 창조된 대략"을 LXX은 역시 γενεσιs ανθρωπων라고 했으며, 창 5:1에도 "아담 자손의 계보"를 역시 LXX에서 γενεσιs으로 번역하는 등 여러 번 "족보" "계보" "대략"등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즉 창세기에서는 geneology(족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저자는 LXX 창세기를 염두에 두고 1:1에서 예수의 족보를 γεννηαιs라는 말로 표현한 것 같다. 그런데 1:18 이하는 예수의 족보가 아니고 예수가 세상에 태어나는 이야기인데도 그것을 γενεσιs라고 했으니,γιγνομαι의 다른 뜻,즉 "생겨난다" "창조한다"등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샹각된다. 예수의 족보 이야기가 아니라 천지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지혜의 의하여 무(無)에서부터 생겨난 것처럼,예수가 초자연적으로,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생겨난 사건을 말하기 위해서,창세기의 헬라어 이름을 여기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L 사본이나 기타 소문자 사본들이 γεννηαιs로 대치한 것은 예수의 자연적 출생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하니라"는 이미 위에서 지적한대로 마태복음 저자가 복음을 쓸 때를 기점으로 해서 이미 수 십년 전의 일을 뒤돌아보면서 과거사로 기록한 것이어서 "이러하였다"라고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이것은 정혼한 사실과 동거한 사실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표현이다. 원문에는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했다는 사실을 대 전제로 하고 있다. 즉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한 상태였었는데,정혼한 시간으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에 돌연 불의의 사태가 벌어졌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정혼하는 일과 동거하는 일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일정한 기간 후에 신부집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에 남편의 집으로 데려옴으로써 결혼이 완성되고 그 때부터 동거하는 것이기 때문에,약혼 기간을 여기서 전제하는 것이다. 마리아와 요셉의 정혼은 동네가 공공연히 다 아는 가운데 행해진 것으로, 정식으로 결혼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정식 결혼도 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선 마리아와 요셉의 집안에서 내밀히 그 사건이 논의되고,결국 야단법석이 일어났슬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알아보고 조사하는 중에 밝혀진 것은,마리아가 결코 외갓 남자와의 불륜의 관계를 맺은 일이 없고 어디까지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초자연적인 사건으로서,하나님의 영이 천지창조에 동역하셔서 무에서 유를 낳은 것처럼 새 인류(New Hu man ity)의 머리가 되시는 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는 창조적 초월적 사건이 마리아에게 나타나게 한 것이다. 이방 신화에 종종 나타나는 것처럼 신적 존재와 인간이 교배(交配)하여 거인,걸인,장수,기인을 낳았다는 이야기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 19절 >

이런 엄청난 사건의 직접 관련자인 요셉은 당황하고 답답하고 어쩔줄을 몰랐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엄밀히,자세히 마리아의 사건을 조사했을 것이다. 누가복음의 기사를 참작해 보면 이해가 가능하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났었고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고 일러 주었다는 것이다. 정혼한 남자 요셉에게 마리아가 이 사실을 말했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성령에 의하여 잉태됫다는 말이 동네에 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은 이 신비하면서도 당혹스러운 사실을 당한 당사자로서 어떤 태도를 취하였던가 본문은 먼저 요셉의 사람됨을 설명한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다"라고 설명한다. `디카이오스'라는 형용사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낱말이지만 여기서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 첫째는 마태복음에서 강조하는 율법준수 강조정신에 걸맞게,마태는 하나님의 법도에 충실하고 법을 잘 지키는 곧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반율법주의자들이 골치거리가 되어 있던 마태공동체에게 법을 잘 지키기를 강조하는 글에서 요셉을 의인이라고 소개할 때 의례 법을 잘 지키는 자라는 뜻으로 사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볼 때 그 당시의 일반법을 따라 파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신명기 22:33-34에 의하면 정혼한 여자를 간통하면 그 당사자를 둘 다 돌로 쳐 죽이는 법이었다. 요셉도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는 종교적 의무감을 가졌을 것이라는 말이다. (2) 그러나 18절에서 밝혀진대로 마리아의 임신은 간통으로 된 일이 아니고,성령으로 말미암은 신비한 사건이어서 판단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마리아의 말을 믿는다면 더더욱 그녀에게 죄를 씌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신명기법대로 만인 앞에서 돌에 맞아 죽는 고통과 창피를,사랑하는 약혼녀에게 준다는 것이 양심상 결코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라는 번역은 사실 "저를 드러내기를 원치 아니하고"라 해야 한다. 즉 만인 앞에 조리돌림의 창피를 줄 생각이 없었다는 말이다. 무죄한 자에게 벌을 주는 것도 불의한 일이라고 판단한 것도 의인의 처사이다. 불쌍해서 동정하는 마음을 가진 착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겠지만,역시 무죄한 자가 불의하게 정죄되는 것을 불의로 여기는 의가 바로 요셉의 의(義)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통념과 가문의 빗발치는 비난과 권면에 밀려서 요셉이 마침내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몰래, 슬그머니 파혼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세상 여론이나 관례를 막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요셉은 마리아의 말을 믿었을 것이고,따라서 마리아의 무고함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파혼한다는 것도 마음 내키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의인 요셉을 궁지에서 건진 것은 역시 의를 신원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셨다.

< 20절 >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이 일들(tauta)을 마음먹었을 때"라는 과거사이다(enthumethentos). 마리아를 파혼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것 저것 많은 일이 결부되는 일이어서 복수지시대명사를 쓴 것이다. 재고,망설이고,궁리한 나머지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인간 지혜로써는 최상책을 강구한 것이다. 그러낸 그러한 막다른 골목에 하늘의 음성이 들려 왔다. 요셉이 꿈 속에 하나님의 천사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는 말은 요셉에게 다윗 왕손이라는 사실을 재확인시키는 것이었고,동시에 예수가 혈육으로는 요셉의 자식이 아닐지라도 법적으로는 요셉의 아들로서 다윗의 계보를 잇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요셉은 세상이 무서워서 감히 마리아를 데려올 수 없다고 생각하여 슬그머니 파혼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를 통하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는 것을 허락 내지는 명령을 받은 셈이다. 천사의 말에 대해서 물론 요셉은 항의 했을 것이다. 마리아가 가브리엘에게 한 것처럼 말이다 (눅1:29,34). 그러나 천사는 해명해 주었다.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요셉은 마리아가 정숙(貞淑)한 여자이고 ,그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초자연적인 잉태가 일어난 일을 마리아의 설명을 통하여 듣고,그를 믿으면서도, 또 한편 사람의 풍속,관습,전통에 밀려 반신반의하고 있었고,마침내 마리아를 파혼할 생각까지 하고 있던 터이므로, 천사의 이 설명은 요셉의 마음을 되돌리는 결정적 힘이 되었을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마리아의 말과 천사의 말이 일치하니 더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 21절 >

"아들을 낳으리니." 딸이 아니라 아들을 낳겠고 "이름을 예수라 하라." 여기의 kaleseis라는 미래직설법은 "네가 그의 이름을 예수라 부를 것이다"라는 뜻이고,여기서 명령법으로 해석된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미래직설법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요셉이 마음대로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아들의 이름을 지어 주셨고 요셉은 그 명령을 따른 것이다. 예수라고 부르는 이유(yar)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 자이심이라"는 것이다. 문자대로 번역한다면 "그가 친히(autos)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가 된다. 예수는 히브리어 ( )의 헬라어 표기로서 "구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원래 '야웨는 구원이다'라는 말인 것 같다). 구주이신 예수는 당신의 백성즉 이스라엘을 죄에서 구출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죄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이 처한 모든 어려움,실존은 결국 죄의 문제이고,죄에 빠지고,죄의 종이 되어 있기 때문이어서,죄로부터의 구원이 바로 인간 구원의 요령이다.

< 22절 >

"이 모든 일의 된 것." "이 것(단수touto)은 예수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려고 성령으로 잉태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절은 예수 사건에 대한 신학적 설명으로서 구전시대의 해석이다. 초대교회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예수에 관한 증거구절들을 찾아내어 예수를 설명하는 자료로 삼았던 것 같다. (마태복음 저자가 사용한 구약 성취 구절이 열 개나 된다:1:22-23 ; 2:15 ; 2:17-18 ; 2:23 ; 4:14-16 ; 8:17 ; 12:17-21 ; 13:35 ; 21:4-5 ; 27:9-10).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다."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선지자를 통하여 주님이 말씀하신 바 (주님에 의하여 말하여진 바) 가 이루어지기 위함이다"가 된다.

<23절 >

이 구절은 이사야 7:14의 70인역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초대교회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70인역에서 이사야 7:14를 읽으면서 예수의 탄생 사건에 대한 명확한 예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대인 크리스천만 아니라 이방인 크리스천들도 70인 역을 애독하며, 특히 이사야의 이 대목을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증거구절로 사용했기 때문에 불신 유대인들은 반발하여 구약 헬라어 번역을 다시 시도하였다. 히브리 원문의 ( )를 LXX는 "동정녀"(parghenos)라고 번역했는데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해서 Aquila역과 Theodotion역에는 "젊은 여인"(neanis)으로 바꾸었다. 히브리어에 동정녀를 가리키는 말 브툴라가 따로 있는데 그 대신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 )를 썼기 때문에 불신 유대인들이 반발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즉 LXX의 번역이 잘못된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Hare처럼,여기의 palthenos(동정녀)는 아모스 5:2 ; 왕하19:21 ; 사37:22 등의 예언과 같이 이스라엘이나 시온을 가리키는 말로 본다면 해결될 것이다.(D.R.A.Hare, MATTHEW, Interpretation, p 10-11). 즉 처녀 이스라엘이 장차 메시아 예수를 낳는데,이스라엘이 그를 자연 생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처녀가 아기를 배듯,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에 의해서만 그것이 가능하겠고,그렇게 해서 출생한 아들이,하나님을 떠나서 괴롭게,슬프게,어렵게 사는 백성에게 임마누엘의 축복이 될 것이 라는 말이다. 즉 예수의 탄생은 고통 중에 있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이 된다는 것이다. 피난생활을 하면서 불안 속에 있는 마태공동체,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이 오셔서 같이 계셔 주신다는 것 이상 더 큰 위안이 있겠는가 저자는 이렇게 그의 복음 서두에서 자기의 교회에게 큰 위로와 격려를 준 것이다. 즉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간을 찾아 오셔서 함께 계시는 분이시라고 소개한다. 18:20을 거쳐 맨 끝에(28:20) 좀 더 철저하게 임마누엘의 위로를 주고 있다.

< 24절 >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자 자신의 결정을 깨고 천사의 명령에 복종했다.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대한 세상의 몰이해와 오해는 여전히 남아 있고,자기에 대한 비난은 끊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용기와 슬기를 발휘한 것이다.

< 25절 >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는 아들을 낳을 때까지만 동침하지 않고 아기를 낳은 후에는 정상적 부부 생활을 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그는 그녀와 동침하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그녀가 아기를 낳았다"는 식으로 해석하여,해산 후에도 부부생활을 하지 않고 정절을 지켰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천주교의 교리에 맞추려고 원문을 부자연스럽게 해석하는 것이다. 결국 요셉은 천사의 말대로 마리아와 결혼을 성취시켜 집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아기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다는 것은,별도로 천사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일 수 도 있고,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엄숙한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이 감이 육욕을 가지고 마리아를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마리아 편에서 자신의 수태가 초자연적이고 너무도 엄숙한 사건이어서,예수의 출생을 100% 거룩하고 순수한 것으로 지키기 위해서 요셉과 합의 하에 성생활을 억제했을 것이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요셉은 천사의 지시를 순종하여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이름지었다. 누가복음에는 마리아가 가브리엘의 수태고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고,마태복음에는 요셉이 천사의 지시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그 어느 하나만 사실이라고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천사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다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어느 한 편에만 나타났다고 볼 때 다른 쪽(마리아와 요셉이 서로)을 이해하거나 이해시키는 일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V. 사 역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다음과 같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을 했을 때인데, 그들이 아직 동거하기 전에 그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수태한 것이 드러났다.
19 그녀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또한 그녀를 세상에 드러내 창피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그녀를 몰래 파혼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20요셉이 이런 일들을 마음에 품고 있을 때,글쎄,주의 천사 하나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이여,두려워 말고 마리아를 당신의 아내로 맞으시오. 그녀가 수태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21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단신은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시오. 그야말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터이니까요."
22 이 일은 온통 주께서 그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일어났다. 예언자가 말하기를,
23 "보라,그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임마누엘은 곧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라는 뜻이다.
24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 주의 천사가 지시한 대로 하여 그의 아내를 맞이했다.
25 그리고 그녀가 아들을 낳기까지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고,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

VI. 메 시 지

마태복음 저자가 그 당시 독자들에게 주려던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고,그것은 대개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초대교회의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주로 예수의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를 알고 또 믿었을 것이다. 예수의 목격자들은 30세난 성인 예수의 기적을 보고,그의 교훈을 듣고,그의 수난과 부활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이라든가,예수의 본원(本源)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예수의 기적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기는 했지만 예수가 원래 누구이며,어떻게 세상에 태어나게 됐는지 등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먼저 나온 마가복음도 거기에 대해서는 말한 바가 없었으니까). 마태복음 저자는 그 시대 일반과 좁게는 자기의 교회가 궁금해하고,아직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구주 예수의 기원을 설명해 주려고 한 것이다.

(1) 예수의 법적 아버지는 요셉이요 생모는 마리아인 것이 사실이지만,예수는 어디까지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비스럽게 잉태된 자로서,인간의 여러 가지 상상력을 자극하는 탄생이기는 하지만,결국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내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전능의 소치로 생겨난 것처럼 예수의 출현도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과 지혜로 말미암은 사건이요, 천지창조의 신비보다 더 신비로운 사건이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과 솔선적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건이다.

(2) 예수의 탄생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사건으로서,결국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태임을 말해 준다. 예수(구주)가 세상에 탄생하셨다는 것은 타락과 죄로 말미암아 처해있는 인간의 불행을 불쌍히 보시고 조처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사건으로서,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야 할 정도로 인간의 죄 문제가 심각하고 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그만큼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시고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하셨으니,인간 편에서는 우선 감사해야 할 일이고 또 한 편 죄에 대해서 예민한 혐오감과 거부감을 가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죄 없는 세상을 하나님은 원하셔서 아들까지 보내셨으니 말이다.

(3) 인간은 죄를 짓고 타락함으로써 죽음을 초래했다. 즉 생명이신 하나님과 같이 있지 못하고 실낙원의 상태에서 고독한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혼자 사는 삶을 자유라고 착각한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지 않는 상태는 결국 불안, 초조, 고독, 혼돈, 궁핍, 절망이다. 예수 탄생의 예고는 임마누엘의 예고인 바 인간의 근본 문제를 뒤집어놓는 사건이다. 즉 하나님이 같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생겼는데 이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로 하나님 편에서 조치하셨다. 즉 예수의 탄생 사건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우리 인간 속에 와 계시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기쁨과 안도와 만족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임마누엘이 되셨다. 과연 우리는 지금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지 우리가 과연 우리와 같이 계시려고 오신 하나님을 문 밖에 그냥 세워두지나 않았는지

(4) 이 사건은 물론 하나님의 이니셔티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거기에는 마리아와 요셉의 복종과 인내의 공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처녀의 몸에 아기를 가지게 된다는 가브리엘의 고지(告知)를 듣고 펄쩍 뛰면서,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창피합니다" 하면서 거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셉 역시 천사의 지시를 들었을 때 그가 장차,아니 당장에라도 듣게 될,엄청난 비난과 의심과 모욕을 생각하면서 거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아픔,수치,비난,모욕을 달게 받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들의 희생 없이는 이 엄청난 사건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의 의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법도와 뜻에 순종하는 의였다. 자기의 생각을 내세우고 자기의 생각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마음이야말로 옳은 마음이다. 오늘의 세계는 자기의 뜻, 힘센 자의 뜻을 옳다고 하는 세상이다.

(5)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고야 만다. 예수 탄생 사건은 임마누엘이 되시겠다는 주전 8 세기 예언자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다. 임마누엘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내림으로 이루어졌고,예수 승천 후 성령 강림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항상 같이 계시겠다는 약속(28:20)은 지금부터 영원토록 하나님의 나라에서 100%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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