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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세대를무엇으로비유할꼬 (마 11: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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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이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라는 표현으로 지작되고 있다 이 완악하고 거짓된 세대.

회개하지 않는 구제불능의 이 세대를 무엇으로 어떻게 비유하여야 되겠느냐고 하시면서 오늘 이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하는 탄식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 세대는 비숫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사람을 믿지 못하는 불신이 여전하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 기를 싫어하는 세대로 살아가는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합니다

흔히들 현대를 가르켜서 단절의 세대라고 합니다

언어의 단절이 있다:어른의 말이 젊은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고 또 젊은 사람들의 말이 어른들이 이해할수가 없고 남성의 말이 여성에게 통 하지 않고 여성의 말이 남성에게 통하지 않는 그래서 말은 많 은 대 대화는 없다는 말로 언어의 단절의 시대

가치관의 단절이다:이 사람에게는 옳다고 하는 일이 저사람에게는 옳은 일이 아니고 때로는 이사람은 애국적인 일이라며 열심히 한일이 저쪽에서 볼때 에는 매국하는 일이 아닌 매국하는 일이고 ...

이편에서는 절대로 잘못 되었다는데 저편에서는 절대로 옳은 것이 니다 이처럼 가치관이 전혀 다른 시대

그런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는 마음이 통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이해되지 않을 때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답답함 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누구든지 그런 경우가 되면:미치겠다:라는 말을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왜 너나 할것 없이 왜 이렇게 통하지 않느냐며 나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 이해를 촉고하고 있을 뿐이지 어느 누구도 내가 다 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겠다고 생각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할 생각은 없고 이해해 달라고만 하니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예수님게서도 하시는 말씀의 내용은 세례요한의 외침에도 예수님의 가 르침에도 듣고 받아들이는 바가 전혀 없는 답답한 저들 세대를 비유하여 어떻게 생각해 보면 매우 장난기 섞은 말씀으로 다시 말하면 철없는 어린애 들의 노는 모습을 그대로 옮겨 진리 앞에 무감각한 세대를 설명하고 있는 데...이러한 행동들을 보면서 무엇으로 비유할고하는 것입니다

그당시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지 않는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는 먼저 자기 희생과 십자가의 정신은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교회에 나오면 "당신들은 참으로 훌륭하오.정말 이세대에 대표적인 종교인들이요.하늘 나 라야 말로 바로 당신들과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요..

라고 일단 인정해 놓은 다음 일반 사람들을 향하여 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든지 속물이라고 하든지 했으면 당시의 종교 자도자들이 기분이 좋았겠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말입니 다

세례요한은 하나같이 죄인 취급을 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 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며 마구 호령을 쳐대니 이것이 못 마땅한 것입니다 저들이 생각할 때에는 나는 저 사람들.

 저 속물들 하고는 달라도 보통 다른 것이 아닌데  왜 같이 취급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때문에 한편으로는 세례 요한을 휼륭하게 보면서도 훌륭하게 받아들일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나는 저 사람들하고는 다르다는 생각 때문에 교회 에 나오면서도 특별 대우를 받기을 원하는 사람들이 종종있는 것을 볼수가 있는데 막약에 이러한 생각이 있는 성도라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신앙생 활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부터 회개해야 할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눅18:9-14)가 비유하신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나에도 나를 저들과 달리 특별 취급을 해 준다면 예수를 믿고 그렇지 않으면 안 믿겠다는 태도가 있읍니다만 세례요한은 그가 누구든 그 의 종교적인 신분도 그의 의도 인정하지 않았읍니다 모두를 다 독사의 자식 이라며 같은 죄인으로 취급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저들은 세례 요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저들의 외식주의 입니다 저들의 위선과 그 외식주의에 세례 요한이 동참해 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매우 화려하 옷을 길게 입고는 점잖은 걸음걸 이로 다녀으며 길거리의 한복판에서도 "오 하나님 "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 를 할 말큼 눈에 듸는 굉장한 종교적인 생활을 하였던 것에 비해

세례 요한의 생활이란 약대털 옷에 허리에는 가죽띠의 험상궂은 모습에 막 대기 하나를 들고는 광야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이것은 자기들의 생활 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란 말입니다 사람의 심리가 고약해서 이렇게 되면 곧잘 상대방을 고발하게 됩닙다

그 때문에 가만히 보면 사치한 사람은 검소한 사람을 비난하고 게으른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을 비난하고 이는 왜냐하면 게으름도 다같이 게으르고 보면 그대로 괜찮은데 부지런한 몇 사람이 있으므로 이제는 별수 없이 나의 게으름이 노출되기 마련인 것입 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감추어지기도 어렵고 받아들여지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거짓되다고 하면 나 또한 함께 거짓되어야 저들 이 받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들 위선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례 요한 앞에서 그 의선과 거짓이 다 노출된 체 꼼작을 못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러자니 못마당한 것은 물론바이요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우리가 에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즉 내가 이렇게 아이고,아이고,하며 애곡을 하면 너희들도 따라 울어야 무 엇이 좀 될 것이 아니냐그런데 같이 놀면서 나는 우는데 너희들은 왜 울지 않느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종교의 두가지의 형태 중의 하나인 금욕적인 종교를 내어 놓 고는 적어도 종교적인 생활을 제댈 하려면 먹을 것.입을 것 등 제반 생활 에 있어서 짜벌재하고 극기하는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세례 요한은 부르카고 잇으니 그당시 점T9잖은 걸음 거리로 팔장을 끼고 대감 노릇하던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이 가만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언제가 하넙능 매우 대조적인 체격의 동기 동창인 목사님 두 분이 앉아 농 담을 하시는데 그, 내용이 우습기도 학도 둘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읍니다

두분중에 한분은 아마도 몸무게가 95킬로 나가분으로 몸집이 크고 까됴장한 분입니다 그래서 목이 굵고 배가 앞으로 나았는가 하면 그야말로 기름이 번들번들합 니다 그런가 하면 한분은 또 너무 여워어서 조금만 더 살이 빠지게 되면 정말 문 제가 될 정도로 빈약하게 생긴 분인데 이제 이 두분이 앉아서 하시는 농담 으로 ......좀 비대한 목사가 여원 목사를 보고 "목사가 저렇게 말라서야 무슨 은혜가 있겠나 목사가 자기 마음에도 은혜가 없어서 저렇게 삐삐 말 랐으니 어떻게 되겠냐 " 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윈 목사님이 하시는 말이 "세상이 이렇게 죄악된 것을 알면서도 살이 피둥피둥 찌다니 어디 저게 목사인가"하고 나오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둘다 옳은 말입니다 사실 이 험한 세상을 보노라면 우리가 이렇게 안일하게 살수만은 없는 일이지요 정말 금식하고 통곡하며 기도만을 일삼아도 부족할 것이겠지요.그런가 하면 우리가 염려될 정도로 마르고 빈약해서도 안될 것 이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의 말씀입니다 분명 세례 요한은 금욕적이가 하면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심지어는 금식 을 요구하는 자리에서도 혼인집 잔치임을 말씀하실 정도로 기쁨과 잔치의 즐거움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은 기쁨..죄인 하나가 돌아옴으로 모든 것으로 동원하여 잔치를 벌이고 기버하는 모습.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돌아온 탕자의 집이요.나이가 잔치집입니다.따라서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황홀한 감격으로 기쁨과 찬송과 감사가 넘치는 계 속적인 잔치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의 문제는 당시 저들이 이 둘 모두를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례요한은 떡과 포도주도 마시지 않고 금욕 생활을 하였더니 마 침내는 귀신이 들렸다 며 미치광이 취급을 하였고 이제 예수님은 먹고 마시 며 죄인들과 친하다 하여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며 아주 세속주위자로 몰아버리는 것으로 비난합니다 낟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여...

금욕주의자들의 눈으로 볼떠는 이것이 못마땅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무슨 종교 생활이 저 모양이며 무슨 메시야의 생활이 저러느냐는 것이지요 게다가 좀 구별되고 깨끗하게 지내야지 세리와 창기,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지낸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법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저들에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이 모두가 다 아름다운 것이아니겠습니까 금욕적인 것도 신앙 생활에 귀한 것이지요 또한 먹고 마시는 것도 기쁨에 동참해 주시는 것이니 영광스럽고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 없이 보는 사람에게는 이래도 나쁘고 저래도 나쁘니 거기에 문 제가 잇는 것자닙니가 그렇게 따죄면 어쩔수 없이 스스로 불가능해지고 마 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저들의 그 오해를 막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금욕적이란 비난이요 저렇게하면 세속저가이란 비난이니 도대 체 어떻게 하란 말이냐..

이래도 저래도 오해는 오해대로 따르고 있었더란 말입니다 여로뷴 무슨 일이나 믿음로 받아들이는 자에에는 다 귀한 것이 되지만 믿음없이 받 아들이는 자에게는 언제나 오해가 되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에서도 보면 교회를 짓는까다거나 값나가는 물품을 마련하게 되 는 경우가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다 교회를 위한 것이요.하나님의 영 광을 위한 것으로 감사하게 생각되기 마련인데 그렇지 못하고 나쁘게만 보 는 사람은 교회가 어쩌자고 그렇게 큰 돈을 낭비하느냐며 당장에 이의를 제 기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매사를 믿음이 없는 눈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리 귀한 것을 보고 은혜로 내 려진 것을 짜대하여도 이를 소화할 길이 없으며 중요을 취할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게서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갓바 을 치지 안흔 이러가한 무반응과 불신의 세대를 역력히 비판하시면서 동시 에 심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지혜는 그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 을 알느니라'라느 말씀이 잇습니다 이는 역시 지혜있는 사람은 지금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잇는가를 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들으면서 회개할 분만 아니라 예수님 의 복음을 들으면서 세리들과 함게 그 잔치에 참여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둘다가 마음에 걸려서는 이리 하여도 .저리하여 도 거치는 것으만 다가오게 됩니다 지혜는 바른 응답에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외치며 회개와 금욕을 촉구하거든 거기에 따른 응답으 로 하나님 앞에 재를 무릅스는 회개가 있어야 하겠지요 또한자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를 생각하며 영광을 돌릴 때에는 과거 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어둡고 괴로운 것으다 잊어버리고 오직 주님의 은 혜만을 생각하며 감사와 찬양을 마음껏 드릴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

주님게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른 응답이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응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응답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고 또한 지금 어떻게 응 답되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예수님게서는 이 세대를 향하여 자기의 의를 완전히 버린 진저오한 회개가 있어지기를 바라시면 피리를 부십니다.

그렇다면 이재 우리는 지난날 지었던 자신의 죄나 오늘의 근심 걱정은 다 잊어비리고 어린 양 진치에 초대받은 기쁨으로 춤을 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기쁨의 축체에 참여하는 이것이 곧 오늘 주님게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 른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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