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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사람이 누구인가 ?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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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있는 자들이 말타고 다니는 시대에 한 마리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초라하지 않았다. 허다한 사람들이 손에 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라고 소리높여 환영한 것을 보면 결코 초라하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그가 예루살렘에 들어 설 때마다 사람들은 깜짝깜짝 놀랄 일들이 있었다. 성경은 그것들을 여과없이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전 생애에 예루살렘을 출입한 일은 몇번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들은 한번도 자기를 위한 일은 아니었다. 오늘은 그분이 예루살렘에서 행하였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내 아버지 집'
예수님의 첫번째 예루살렘 출입은 유아기에서 보게 된다.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 유대인의 예법대로 그는 부모의 품에 안겨서 성전에 올라 갔다. 열두살 되던 해에 예수님은 또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 갔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서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종노릇하던 애급에서의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오늘 우리로 말하자면 광복절이라고나 할까 하나님의 재앙이 이스라엘을 지나쳐 애급의 장자를 앗아감으로 바로의 힘이 무너져 내리게 한 역사적인 기념일이다.
이스라엘은 이 날을 기념하여 예루살렘에 모여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예수님도 이 날을 기억하고 부모와 함께 성전에 올라 가셨다. 예수는 이 성전에 머물면서 선생들과 함께 지냈다. 그곳에서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는' 참으로 즐거운 시간들을 가졌다. 집으로 돌아 가던 부모님이 되돌아와 왜 이렇게 부모를 놀라게 했느냐고 물었을 때도 예수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 하면서 이해못할 말씀을 부모에게 던졌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를 죄와 허물에서 구원해 주신 그 분의 은혜를 기억하고 모이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자녀들이 마치 '내 아버지의 집'에 들어 온 것과 같은 감격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오늘 이곳에 모이신 성도 여러분들에게 언제나 '내 아버지의 집'에 들어 온 감격이 넘치시기를 축원한다.

2. 성전 숙청
예수님의 성전숙정에 관한 견해는 복음서마다 서로 다르다. 마태는 예수님의 생애 말미에 이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요한은 그의 생애 초기에 성전숙청을 말하고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시기를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오늘은 성전숙정에 중점적인 내용을 두고자 한다.

성전숙정은 예수님의 개혁작업이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군사 정치 경제 사회등 모든 면에서 사정없는 사정작업을 진행하였다. 이 작업에는 오래동안 야당 정치인이었던 김영삼씨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앞장섰던 사람들 조차도 사정 바람에 밀려났다. 어떤 사람은 아뭇소리 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토사구팽(兎死狗烹)' 이라는 말을 남기고 하와이로 훌쩍 떠났다가 소리없이 돌아 온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구차스럽게 이리 저리 변명하고 호소하다가 수치스럽게 자리를 떠난 사람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개혁이란 모두를 좋게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씁슬한 미소를 짓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성전숙정을 행하실 때도 몹시 분함을 감추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잘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디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대로는 예수님이 무슨 혁명적인 것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무슨 정치적인 의도나 경제적인 흑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당시의 성전이 성전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그분의 입을 통해 나온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배워 아는대로는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어야 했다. 기도하는 집이 어떻게 강도의 굴혈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가지 의문을 가진다.1) 성전은 분명히 기도하는 집인가 하는 질문과
2) 강도의 굴혈이라는 말은 과연 옳은 표현인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은 이의가 없을 것이다. 성전에는 바리새인도 기도하고 세리도 와서 기도하는 집이다.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다. 하나님앞에 나아와 기도하는데는 의인도 죄인도 구별이 없다. 새벽에도 기도하고 저녁에도 기도한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기도하고 금식하면도 기도한다. 철야하면서도 기도한다. 이 교회가 기도하는 집인 줄 믿으면 아멘 ! 하시라.
날마다 시간마다 그리고 언제든지 어느 방에서나 기도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원일 교회가 되어야 한다. 원일교회는 감사와 감격의 간증과 영광의 찬송과 간절한 기도가 계속되는 성전인 줄로 믿는다.(아멘!)

두번째, 예루살렘 성전이 왜/어떻게 강도의 굴혈이 되었는가
예루살렘은 누구나 들어 갈 수 있는 이방인의 뜰, 여인들의 뜰, 이스라엘 사람들의 뜰을 지나 제사장의 뜰에 들어 간다. 번제단은 여기에 있었다. 성소를 지나 지성소가 있는데 지성소는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만 들어 갈 수 있었다. 예수님이 숙정을 하신 장소는 누구나 들어가는 이방인의 뜰이다. 대제사장인 안나스의 집안에서 여기에 매점을 마련하였다. 백성들은 그들의 제물에 대하여 흠이 없는지 검사과정을 거쳐야 했다. 검사가 까다로울 뿐더러 많은 수수료를 지불해야 하였다.

성전 마당에서 파는 것은 검사를 면제하나 대신 값이 비쌌다. 심한 것은 20배 정도나 폭리를 하였다. 예수님께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뒤 엎을 만 하지 않은가 우리는 이 문제를 보다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성전숙정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먼저 살펴보자. 그들는 대제사장,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이라고 말하고 있다.(마 21:15, 23) 그들은 말하기를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라고 물었다. 이 질문은 자기들의 잘못은 깊숙히 감춰 둔채 아무런 배경도 없는 예수 네가 어떻게 이런 건방진 일을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질문이다. 예수님이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굴혈'이라고 선언한 배경은 거룩한 이름을 가지고 거룩하지 못한 일을 연출하기 떠문이다.

만일 우리도 거룩한 이름을 가지고 거룩하지 못한 일을 계속하여 행한다면 우리 주님의 개혁작업이 이 교회에 나타날 것을 두려워 해야 한다.

3. 승리의 입성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나귀를 탄 모습이었다. 고관대작들이 나팔을 불며 들어 오거나 싸움에서 개선한 장군들이 천병만마를 거느리고 입성하는 모습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예수님의 타신 나귀는 그나마 빌린 나귀이다. 예수님을 환영한 인파는 당시 사회에서는 별로 대접받지 못한 평민들과 부녀자들 그리고 대부분이 아이들이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시면 이 모든 정치적인 속박을 깨트리고 로마의 압제에서 민족을 구원하시리라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모습은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로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시기 때문이다.(막 8:31)

죽음의 길을 알면서도 죽기 위하여 그 길로 가는 바보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바보같은 길을 걸어 가신 분이시다. 자신을 붙잡아 결박하는 로마병정을 향하여 칼을 뽑아 든 베드로를 향하여 '네 칼을 집어 넣으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 하신 분이시다. 주님이 한번 말씀 하시면 12 영 더 되는 천군천사들을 동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어떻게 이룰 수 있겠느냐 하신 분이시다.

주후 1 세기 경에 한 똑똑한 청년이 있었다. 나사렛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안 청년이었다. 공부도 할만큼 한 청년이었다. 유대교를 지나칠만큼 열심으로 믿었던 청년이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당시의 통치자에게서 '너 공부를 많이 하더니 참으로 너 미쳤구나 !' 하는 말을 들었다. 예수를 박해하던 청년이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박해하던 예수를 환상중에 만난 이후 청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 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이라는 이 청년은 말하기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하였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어리석은 존재로 여겼던 바울이었는데 이제 보니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자신이 아주 어리석은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나 바울에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상황을 보는 바울, 그의 마음 가짐이 달라졌을 뿐이다.

어느 날 당신이 새로 산 차를 몰고 교외를 달리고 있었다고 하자.
얼마간 달리는데 한 남자 아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차를 세워달라는 것이었다. 갈 것인가 설 것인가 그러나 당신은 기분좋게 그냥 지나쳤다. 그 순간 자동차 옆면에서 심한 소리가 드렸다. '쿵 !' 커다란 돌에 부딛힌 소리임을 직감하고 차를 세워 확인해 보니 심하게 찌그러졌다. 화가 난 당신은 아이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고 혼을 내 주리라 생각하고 달려갈 것이다. '이녀석 너 어디 사는 놈이야 !'하고 그의 목덜미를 잡고 혼을 내려 하는데 아이는 벌써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아저씨 미안해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저씨가 차를 세워줄 것 같지 않아서요." 그러면서 아이는 숲 속에 있는 작은 물체를 가리켰다. '아저씨! 동생이 심하게 다쳤어요. 도와 주세요.' 이 말을 듣는 당신은 아직도 차를 찌그러트린 아이를 나무라겠는가

십자가는 무엇인가
살인 강도의 처형대가 십자가인데 그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목걸이로 귀걸이로 사용하는가 이러한 십자가에 하나님의 아들이 처형을 당했다.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신 것이다. 십자가는 그렇게 자랑할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왜 죽었는가를 깨달은 순간 십자가의 부끄러움은 모두 다 사라지고 십자가를 이해하고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말하기를 '어리석은 자에게는 멸망의 도구이지만 구원얻는 우리에게는 생명'이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한 도구였다.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버리신 것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이기는 유일한 무기이다. 한 알의 밀알되어 자기 생명을 버렸을 때, 그는 많은 생명을 그 품에 안았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아담 하와는 사망의 지배 아래 살게 되었으나 예수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시려고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맡기신 것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태어 났으므로 살아 가지만 예수는 죽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태어나신 하나님이시다.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 보신 것은 순전한 마음으로 경배하는 백성들이 아니었다. 성전을 숙정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하나님의 성전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새롭게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었다. 예수님은 그들 속에 있는 온갖 더러운 속성들을 보시면서 슬퍼하셨다. 그것은 마치 어미 닭이 그 새끼를 품에 안고자 하는 뜨거운 모성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우셨다. 울고 또 우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괴로운 하룻 밤을 지내신 예수는 마침내 로마병정들에게 이끌려 십자가 형장으로 끌려 가셨다. 그는 참으로 살기 위하여 죽음의 길을 나귀타고 올라 가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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