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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행복(3)-온유 (마 05:5, 갈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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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인간생존에 없어서는 안될 필요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땅을 차 지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을 벌여 왔다. 나라마다 영토확장에 혈안이 되어 왔다. 우리 나라에서는 기업의 부동산투기가 사회 문제화되고 있다. 그래서 "토지공개념" 문제가 우리나라 경제의 최대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하느님은 땅을 인간에게 맡겼다. "생육하며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 라."(창세기 1:28) 최근 생태학계에서는 이 성구가 자연파괴, 자연오염의 원인으로 지적하되 비판되고 있다. 모두가 땅을 정복하기 위해 온갖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여 왔다. 그 결과 자연은 스스로 생존할 힘을 잃어 버리고 있다. "약육강식"의 잔인한 투쟁 속에서 땅은 황폐해지기 시작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땅은 강자, 잔인한 자에게 정복되어서는 안되고 "온유 한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니 온유한 자가 땅의 주인이 되는 복을 누릴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 세상의 법칙과는 전혀 다른 땅의 법칙을 설교 하신 것이다. 아무튼 땅 위에서 최강의 존재였다는 공룡은 전설의 존재 로, 박물관에 비치된 인간의 상상력의 존재로 퇴화되고 말았다. 카인은 아벧을 죽일 힘은 있었으나 역사의 주역으로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하느 님은 그를 버리고 셋을 보내어 인류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셨다.

(1) 온유한 사람이란 누구일까 "양보하는 사람"이다.(내촌감삼) 아브라함 은 조카의 양부였다. 때가 되어 이들은 부득이 살림을 나누게 되었다. 가부 장시대(가부장시대)이었으니 모든 결정권, 우선권은 마땅히 아브라함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카에게 그 모든 것을 양보했다. 그에게는 기성체제 나 기성가치 보다 조카를 사랑하는 일이 더 귀중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좋 은 것은 무엇이든지 조카에게 양보했다.

롯은 물이 철철 넘쳐 흐르는 요단땅을 차지하는 요행을 얻었다. 얼마 나 벅차고 희망찬 일이었을까 역사는 바야흐로 아브라함에게서 자기 자신 에게로 옮겨지는 대변혁의 추세에 있었다. 그러나 후일 롯은 소돔 고모라의 세속주의문화의 희생제물이 되어 버렸다. 소돔 고모라의 파멸과 함께 그와 그의 모든 후예는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했다. 인류역사상 최초의 근친상 간의 죄인으로 타락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후일 히브리문명의 씨앗이 되어 모든 성서적 인간 들의 추앙과 사랑을 받는 믿음의 사람, 복의 사람의 사표가 되었다. 그를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믿음 만큼의 믿음, 아브라함이 누린 행복 만큼의 행복을 사모하며 추구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을 능가할 사람도, 능가 할 수 있다고 자부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다만 성서의 교훈과 증언을 믿 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뿐이다. 전신마비의 신체장애자 김옥진씨는 89년 도에 시집을 간행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는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여 인, 손마저 쓸 수 없는 연약하고 버림받은 여인이 시를 쓴 것이다. 그것 은 너무나 장하고 기특한 일이었다. 그해 8월 KBS TV "11시에 만납시다"의 제작팀은 그를 초대 특별방영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울타리에서 사 진을 찍으려다 실족 전신마비의 불행을 겪게 된 여인이었다. 그의 시는 " 옥진이의 시"라는 책으로 엮어져 간행되었다.

"소요가 아닌 빈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받아서 채워지는 가슴보다 주어서 비워지는 가슴이 되게 하소서.

천진스런 아기를 바라보다가 나는 엄마가 되고 싶었습니다. 다정스런 연인들을 바라보다가 나도 사랑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직 하나 하얀 맨몸, 어둠을 밝혀 주는 한 자루 촛불로 살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자기를 불태우는 초와 같은 인생, 자기를 송두리째 내어 주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김옥진 여인이야말로 온유한 사람, 자기를 양보하는 삶의 진리 를 터득한 사람이다.(엄요섭 목사의 설교집에서)

(2) 온유한 사람이란 너그러운 사람이다. 중세기의 성자 암브로우스 감독 은 "분을 내지 않는 사람, 복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이라 해석했다. 너그러 운 사람은 사소한 일에 분을 내지 않는다. 복수의 칼을 갈지 않는다. 그 리스도교가 인류역사에 끼친 공헌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써 망한다"는 이 두가지이다.(토인비)

소돔지방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왕들의 배신과 야망의 결과로 빚어진 전쟁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이 전쟁의 희생물이 되었다. 침략군에게 포로로 잡혀 갔다. 롯은 숙부에 대한 윤리도, 의리도 저버린 배은망덕한 사람이었다. 그 형벌을 면치 못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 전쟁은 자연의 가지치기"(헤셀)라고들 한다. 죽은 가지는 쳐 버려야 한다. 너무 가지가 무성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래서 불필요한 가지도 쳐 버 려야 한다. 롯은 바로 하느님의 가지치기의 일환으로 포로로 잡혀 갔는지 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좌시하지 않았다. 400명 가까운 군사를 동원, 적으 로부터 조카인 롯을 건져냈다. 배은망덕한 사람, 의리없는 사람은 버림받아 마땅하다. 그런 사람의 실패와 패배는 정의를 위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롯에 대해 분을 내거나 그를 괘씸하게 여기고 복수한 것이 아니 라 오히려 조카를 위험에서 건지기 위해 스스로 위험에 뛰어든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 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 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마태 5:43-45)

마음이 좁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모든 사람에 대해 경계심을 품으며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신경질적이 된다. 그래 서 사소한 일에도 분을 내고 복수심에 불타게 된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사회학자들은 폐쇄적인 사람이라 한다. 개인이나 사회나 공개적이고, 마음 문을 열어 놓지 않고서는 큰 것은 볼 수도 없고 새로운 것을 접할 수도 없 게 된다. 마침내 그런 사람, 그런 사회는 역사의 낙오자로 전락되어 버린 다.

땅의 주인은 온유한 사람, 너그러운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땅은 미 움과 싸움으로 피바다가 되고 욕심과 죄악으로 더러워지고 파괴되고 만 다. 온유한 사람이 땅의 주인이 될 때 모든 사람들은 서로 나누어가며, 서로 도와가며, 서로 사랑하며 땅을 가꾸고, 그 열매를 먹을 수 있다. 하느 님은 햇빛과 비를 의인과 악인에게까지 골고루 내리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 아야 한다.

(3) 온유한 사람이란 자기무식을 시인하는 사람이다.(W. 바클레이) 약간은 야릇한 해석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해석은 너무나 오묘하고 감동적인 해석이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말이 많다. 이것이 언제나 문제를 복잡 하게 하는 독소가 되는 수가 많다. 그래서 우리 땅에서는 "말이 많으면 빨 갱이", "예수쟁이"하는 딱지가 붙는다.

왜 말을 많이 하는가 상황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대체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의 심리에는 "자기유식을 확인하려는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일에나 한 마디 하는 사람치고 아는체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자기자 신은 아는체 하여 한 마디 했지만 듣는 사람들로서는 웃기는 말일 뿐, 가 당치도 않는 말 밖에 되지 않다는 사실은 본인은 모르고 있다. 기막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온유한 사람이란 자기무식을 인정하는 사람이라 했으니 한번쯤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몇해 전에 엄요섭 목사님께서 한 설교집을 출판하였다. 그분은 신학에서부터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지식을 설렵 한 분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 제일이라는 서울대학, 연세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목사로서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협동총무도 역 임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유당시절엔 서울시 교육위원, 민주당시절엔 주일 본공사, 제 3공화국시절엔 주이디오피아대사 그리고 경제계에까지 진출 롯데알미늄의 전무이사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Y's Men 국제총재까지. 그야 말로 놀랍고 다채로운 인생역정을 지내온 다재다능한 분이다. 외모에서 풍 기는 인자함과 위엄에서부터 경력을 통해 주는 암시들은 보는 사람, 대하는 사람들마다 너무나 크고 다를 것이다.

그런데 그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관절부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 이 그의 몸을 괴롭혔다. 국내외 의료진의 노력도 허사였다. 끝으로 스웨덴 의 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역시 효험이 없었다.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던 어느 날 같은 병실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다섯살 짜리 어린이로부터 퇴 원선물을 받았다. 어린이는 한 노래를 불러 주었다.

"내게는 은과 금은 없어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는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자신의 믿음생활을 성찰해 보게 되었다. 그 리고 자신의 그 찬란한 학벌이나 경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 게 되었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한다는 사실은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최후의 희망이고 기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남을 해치는 일이 아닌 한 무슨 일이든지 기도를 통해 자신의 완성을 추구할 수 있다. 그 기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과신의 교만의 껍질에 벗게 하는 것 이다. 그리고 자기중심의 욕망에서 온유한 마음의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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