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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행복(1)-심령가난 (마 05:1-3, 빌 0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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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은 "원숭이의 해"이다. 사람들은 갑자기 원숭이에 관해 이런 이야 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원숭이 만큼 우애가 있고 정직한 존재가 되었으면 싶다든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설이 있지만 원숭이는 의리를 존중한다는등 매우 원숭이의 존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원 숭이와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똑같은 포유동물이요 영장류에 속하지만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원숭이는 놀라운 지능에도 불구하 고 자신의 생존만으로 만족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생존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사람은 행복을 추구 하는 존재이다.

사람들은 이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처절한 경쟁을 벌인다. 형제 사이에서도 양보와 협조의 미덕을 저버리고 앞서기 위한 싸움을 계속한 다. 이 경쟁을 위해 사람들은 윤리도, 예의도 저버리고, 인정사정없이 먹고 먹히는 비극을 연출한다. 여기에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불행 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행복의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것 은 자신의 믿음과 삶을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교훈대로 사는데 있다. 예수께서 가르친 인간의 행복은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것이다. 하느님이 계시는 그때, 그곳에서 사는 것, 그것이 인간의 행복이다. 미국 흑인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 가운데 이런 귀절이 있다.

"지미와 죠는 감옥에 갇히었네 어느 날 둘은 바깥 세상을 보았다네 지미는 트럭이 달리는 진창길을 보고 죠는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보았다네"

그리스도인은 땅만 바라보며 사는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보 며 사는 존재이다. 하느님의 나라에 인생의 희망을 두고 살며, 하느님의 나라의 진리와 생명으로 이 땅을 가꾸어 가는 존재이다. 하느님의 진리와 생명으로 이 땅을 가꾸어 가는 존재가 되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 야 한다"(마태 5:3)

(1)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자기아집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이다. 한 종 교심리학자(Spencer)가 1천명의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그들의 신앙경력조 사를 했다. 그 가운데 548명이 20세이전에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337명이 20세에서 30세 사이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40-50세 사이엔 겨우 15명, 그리고 50세 넘어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불과 4명 밖에 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이 통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지식이 나 관습 그리고 경험 같은 것에 의존하며 다른 것,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고집스럽게 폐쇄적이라는 사실이다. 세기의 전쟁영웅 나폴레옹의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 아집 때문에 러시아 전선 에서 패퇴하고 마침내 프랑스 제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의 자기고집, 자아도취벽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베드로는 2대에 걸친 어부였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지 리이다"(누가 15:1-)라는 삶의 자세, 자신의 경험이나 기술이 아닌 전혀 새로운 진리를 수용함으로써 좌절과 실패의 한계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완성을 성취한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자기지식이나 기술, 경험이 나 관습 같은 것에만 의존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추세에 주 의하며 새로운 역사의 대의 앞에 자기를 개방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나라 가 죽은 다음의 영생의 세계이든지(요한 14:1-) 역사의 마지막 심판의 세 계이든지(마태 25:31-), 먹을 것,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을 보장하는 세 계이든지(마태 6:33-) 그 세계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세계 요, 주어지는 세계이다. 유대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그들의 고집 때문이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언이다.(로마 2:5) 그리하 여 그들은 예수를 죽이면서도 하느님의 의를 이루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얼 마나 어리석은 자기 도취인가사람은 약간의 성공이나 특이한 재능을 지니 게 되면 곧 자신을 선별된 존재로 착각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이 빠지기 쉬 운 가장 무서운 함정이다. 이 함정에 빠지게 되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그 런 사람들은 자기만을 정당화하고 의롭다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파 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역사를 인류의 핵심부에서 외곽지대로 몰아 넣게 한 것이다.

(2)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자기를 비우는 사람이다. 슈바이처는 아프리 카의 구원자, 인류의 태양이라는 찬양과 존경을 받으며 아프리카 선교에 헌신했다. 물론 그에게도 질시와 멸시의 비판, 매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 다.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를 위해 자기를 비운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슈바이처야말로 낮은데로 찾아간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의 마음을 지니라고 권면했다. 그것만이 그 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육체적인 현상이 아니다. 마음의 변화, 영적인 신생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 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그리스도인이다. "표면적인 유대인이 유 대인이 아니요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인 유대인이 유대 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 다"(로마 2:28-29)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 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느님의 본체이시나 하느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 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립보 2:5-8)예수의 마음은 자기를 비우는 마음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자기를 비우는 사람을 말한다. 마음을 비우는 사람만이 복종할 수 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다.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사람은 아무라도 그리스도인, 하느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 십 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부활의 하느님을 볼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볼 수 있다. 역사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이 아닌 것은 모두가 악마적이요 우상 숭배에 속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누가 14:7-) 이 말씀은 잔치집에 초대받았을 때의 예의에 대한 교훈의 결론이다. 윗자리에 앉은 자는 더 높은 사람에게 그 자리를 내어 놓게 마련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잔치집의 아랫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셨 다. 윗자리는 잔치집 주인만이 정해 주는 자리이다. 초대받은 사람은 아 랫자리에 앉을 자유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느님 나라를 잔치집이라 믿는다면 아랫자리, 낮은 자리에 앉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큰 자리 에 옮겨지게 된다.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자기를 아는 사람을 뜻한다. 서양속담에 "똑 똑한 쥐는 하늘을 날으는 새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대신 깊이 깊이 굴을 뚫는다"는 말이 있다. 쥐는 아무리 뛰어나도 하늘을 날 수 없다. 자기를 아 는 쥐는 자기의 안전을 위해 굴을 뚫는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를 아 는 사람이다. 모든 철학은 자기를 아는 사람을 만드는 연구요 학문이다.

성서에서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규정한다. 이것 때문에 성서에 대해 항 변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증철학자들, 실용주의자들, 과학주의자들은 한결 같이 성서의 인간론에 대해 불평한다. 그러나 사람은 죄인이다. 이것은 부 정 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이다. 죄없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불 행한 일이지만 이것은 변치 않는 인간의 한계상황이다.

죄인이 할 일은 하나 밖에 없다. 참회하며 회개하는 일 뿐이다. 이것 은 인간의 양심(양심)이 공히 인정하는 사실이다. 성서는 회개할 뿐만 아니 라 죄인은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 요청한다. "때가 찼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 1:15) 하느님 나라는 인간에게 회개를 요청한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한 익명의 시인은 이런 기도를 우리 들에게 남겨 놓았다.

"주님, 우리는 남들이 조그만한 실수를 할 때엔 언제나 그들을 탓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커다란 실수에 대해서는 늘 핑계를 찾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하면 우리는 이내 화를 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때엔 그들이 우리를 이해해 주기를 기다립니다."

예수께서 가장 혐오하던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 눈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 속의 티를 빼려고 하는 사람들"(마태 7:3-)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구제불능의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 를 볼 수 없다. 자기 눈 속에 들보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이란 자기를 아는 사람이다.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 람은 모두가 아름답고 당당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사람이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는 행복을 누릴 수 없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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