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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사람인가 (딤전 06: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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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실존신학자 폴 틸리히는 사람을 '허무 속에서 불안에 떠는 존재'라고 정의하면서 사람들은 그 공허의 자리를 세가지 것으로 메꾸려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금력의지로, 둘째는 권력의지로 그리고 셋째는 향락의지로 그 실존적 공백, 불안의 자리를 채우려 안간힘을 쓰는게 현대인들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정말 그의 지적처럼 오늘을 사는 인생들은 분주하게 금력과, 권력과, 향락이라는 '세속의 삼위일체 신'을 좇아 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사느냐 물으면 저마다의 대답이 '행복해 지기 위해서'랍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랍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생을 살기 위해서'랍니다. 그러나 왠지 행복해 보이지가 않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보람된 생인 것 같지도 않습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분명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고 또 반드시 행복해 져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고 피조된 우리 모두의 바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애씀에도 불구하고 정작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행복해지고 싶지만 행복해 지지 않고, 사람답게 살고 싶지만 사람답게 살고있지 못하고, 후회없는 삶이고 싶지만은 그러나 지나고 보면 항상 후회가득한 삶일 수 밖에 없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이 풀어야할 생의 숙제인 것입니다.

그 첫번째 원인을 꼽으라면 그것은 먼저 '우리의 행복 개념이 잘못 설정되어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결코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는 프로그램을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프로그램으로 착각하고 그 프로그램을 쫒아살고 있다는데 문제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쉽게 행복을 정의한다면 '만족한 마음의 상태나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욕구가 충족한 상태에서 맛보는 느낌'입니다. 이것을 수학적으로 표시해 보면 '소유 나누기 욕망 이퀄 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소유를 욕망으로 나눈 것이 행복'이라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바라는 것(욕망)'과 '내가 가진 것(소유)' 사이에서 만족과 불만족, 행과 불행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행복론'입니다. 자기 욕망보다 자기소유가 많아지면 행복하다 생각하고, 자기 욕망보다 자기소유가 적다 싶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행복해지려면 자기소유를 늘리든가, 아니면 자기욕망을 줄이든가, 둘 중의 하나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무한한 반면에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은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그런 사고방식에서 행복감을 느끼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한이 없고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은 유한하니 사람 사이에는 시기와 다툼과 분란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요 작금의 우리의 현실입니다.
특히 자유경쟁사회를 지향하는 자본주의국가에서 이것은 더욱 첨예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배금주의를 낳고, 향락주의를 낳고, 한탕주의를 낳는 것입니다. 행복하지못한 게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망을 추구하는 사회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 몇일 우리 사회를 들끓게 하고 있는 '지존파'라는 것이 바로 이런 세태의 현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존재양식적 삶'을 살지 못하고 '소유양식적 삶'을 살고 있다는데 우리 시대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사람을 존재로 인식하지 아니하고 소유로 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이 가진 자가 최고입니다. 많이 가진 자가 대접받습니다. 많이 가진 자가 곧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그러다 보니 많이 갖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150억이라는 국민의 혈세도 얼마든지 가로챌 수 있는 것이고 사람목숨도 파리목숨보다 더 경히 여길 수 있는 겁니다. 더 이상의 부연설명이 필요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그래서 행복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마음에 평온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고 행복함을 누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우리는 원치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자리를 더듬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올바로 알지 못한체 생을 영위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에 보면 인간을 이렇게 정의해 놓고 있습니다. "사람은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모하여 최대한의 안락을 추구하는 자다..." 저는 그 글을 보면서 '역시 브리태니커가 이 시대의 최고의 백과사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적절하게 현대인을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정말 이 시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모해서 최대한 안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정말 인간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 사전의 대답이 올바로 인간을 정의한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 신학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현대인의 비극은 '사람이 누구냐'라는 물음을 잊어버린 데 있다"고 말하면서 '지금의 자기-앎을 휘저어 보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사람이 누구냐'는 실존적 물음을 던지고 내가 나를 누구로 아는지 자신을 한번 휘저어볼 싯점에 있지 않습니까 믿기지 않는 일을 저지른 아이들은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매스컴을 향해 외쳤습니다. 정말입니다. 적어도 화면에 비춰진 저들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누가 인간입니까

우리는 흔히 'What is man/무엇이 사람이냐'는 물음을 던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물음이 아닙니다. '무엇이 사람이냐'는 물음에는 인간을 공간적 사물로 파악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습니다. 물질로서 사람이 무엇이냐를 묻는 겁니다. 이건 물음이 잘못된 것입니다. 뭐라고 대답할 것입니까 '지구라고 하는 자갈 위를 기어달리는 벌레'라고 말할 것입니까, '측량못할 우주 공간을 정처없이 떠다니는 한 점의 생명'이라 대답할 것입니까 이 물음에 가장 충실하게 대답했던 자들이 바로 독일의 나치스트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인간의 몸은 비누 일곱 조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지방질과, 중간 크기의 못 하나를 만들 수 있는 철분, 성냥 알 2천개를 만들 수 있는 인 그리고 한 사람의 몸에 붙어 있는 벼룩을 모두 없앨 수 있는 유황을 포함하고 있다"고 대답했는데 그런 인간이해에 기초해서 유대인들의 육체로 비누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이런 결과도 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인간에 관한 진실을 우리는 어디서 알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What is man/무엇이 사람이냐'가 아니라 'Who is man/누가 사람이냐'를 물을 때에 비로소 밝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로서의 인간'이 아닌 '가치로서의 인간'을 묻는 물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인간이해에 있어 매우 결정적인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 인간은 본래 '공수래공수거의 존재'라는 것입니다.이것이 사도바울의 인간이해의 출발점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존재, 빈손과 빈손 사이에 우리의 인생이 있다는 겁니다. 행복은 먼저 이것을 인정하느냐 않느냐에서 가름됩니다. 이걸 인정하면 그는 참행복을 누릴 수 있지만 이걸 인정치 아니하면 우리가 오늘에 생생히 보고 있는 것처럼 세상의 거짓 행복론에 도취되어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옛시절엔 감사가 있었습니다. 없이 살아도 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각박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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