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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과 우리의 연약 (롬 08: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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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즈음 건강이 나쁘면서 느끼는 것은 인간은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예수를 믿으면서 깨달은 진리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인간으로서 의 연약은 벗어 날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을 입고,땅에 발을 붙이고,숨을 쉬고 사는 이상 인간의 연약함의 십자가를 벗 어 버릴수 없다는 것은 저는 경험으로 알고 있고, 여러분들도 이미 경험으로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는 신학자의 표현대로 한다면, 우리의 이 연약함음 [인간 조건의 총체]라고도 말할수 있고 또 [피조물 다움]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26절에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할 때에 이 연약함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은 설명이 필요없는 익히 아는,아주 친근한 개념으로 우 리에게 와서 닿습니다.

"아 그렇구나,하나님도 우리 연약함을 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이 본문을 읽 을 때 마다 가슴을 파고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몸은 깨어지기 쉬운지 질그릇이라고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너무 약해 서 무엇이나,모자라도 안되고 너무 많아도 안됩니다.

돈이 너무 없어도 않되고 많아도 않되고, 사랑을 너무 안해도 안되고 너무 많이 해주어도 않되고, 종 잡을 수 없는 연약성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은혜를 보아도 분수에 맡게 은혜를 받아야지, 분수에 지나치게 은혜를 받으면 잘못되는 것을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얼마나 연약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도 마음대로 받을수 없을 만큼, 우리의 영육이 퍽 약합니 다.

균형과 또 중용이라는 것을 지키기가 너무 힘들어서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 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연약은 아담이 범죄함으로 온 원죄가 유전 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타락의 결과이기 때문에 중생 받았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믿음이 좋다고 해서 금방 벗어 던질 수 있는 겉옷이 아니요, 성령이 충만하다고 해서 슬그머니 사라지는 증세가 안닙니다.

일생을 우리는 연약한 존재로, 연약한 인생으로 피조물 답게 살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고 말할수 있습니 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연약한 우리를 갑자기 천사로 바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 대신 세상에 살동안에는 우리를 도와 주시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돕기를 원합니 까 성령을 보내셔서 돕기를 원합니다.

 8장에 들어와서부터 우리는 성령의 존재에 대해서 살펴 볼수 있는 말씀을 아주 많이 읽었습니다.

 성령은 본래 육신의 사람이었던 우리를 영의 사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계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 광을 누릴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령은 또한 소망을 찾을수 없는 이 세상에서 오직 우리에게 나타날 소망을 바 라보고 사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26절 처음 시작될 때에 [이와같이]라는 접속사가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8장에서 내내 성령이 우리를 어떻게 도우시는가를 설명해 왔기 때문에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를 돕는다고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저는 26절 중에 번역 상에 한가지 불만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성령도 라고 했는데 이 도자를 왜 붙였을까 도자는 또한이라는 말이거든요 그러 므로 지금까지 성령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하지 않다가 갑자기 성령이 등장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오히려 제대로 앞뒤를 맞추어서 번역을 할려면 이와같이 성 령은 우리를 도우신다.이렇게 해야 말이 맡는 것입니다.그런데 왜 도자를 붙였 는지 모르겠어요.

성경 번역이라는 것이 토씨 하나하나까지 얼마나 예민하게 다루어야 되는지 모 릅니다. 성령이 갑자기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를 돕고 계셨 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이와같이 도우셨습니다. 이 이와같이 를 설명하려고 26-27절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보혜사라는 이름을 가지고있습니다.보혜사라는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돕는자라는 뜻이지요. 돕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파악할 필요 가 있습니다.[성령이 돕는다] 그 돕는다는 의미가 어떤 것일까 함께 담당한다는 뜻이고, 좀더 알기 쉽게 설명하면 맞잡아 준다 는 뜻으로 해석 하는 것이 좋습니다.

큰 통나무를 메고 힘들게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것을 대신해서 져 주는 것도 좋겠지만, 한 쪽 끝을 마주 잡아 줄 때에 가볍게 들고 갈수 있지 않습니까

눅 10:40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이 갑자기 12제자를 데리고,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장정이 열 몇명이 들이 닥쳤으니 얼마나 분주했겠습니 까 마르다는 부엌에 들어가서 정신없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생 인 마리아는 눈치도 없이 예수님 곁에 바싹 붙어 앉아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데만 혼이 빠졌어요 마르다가 볼때는 염치가 없는 애지요 참다 못한 마르다가 예수님 앞에 가서 얘가 이렇게 철이 없어요, 얘를 내 보내 서 저를 좀 도와 주도록 하세요 할 때에 [도와 주도록] 이 말이 곧 성령이 우 리를 도우신다는 말과 똑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면 마르다가 와서 '동생을 보내서 나를 좀 도와 주도록 하세요'할 때의 돕 는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언니 일하는데 옆에서 거들어 달라는 의미이지요 성령이 우리를 돕는다는 것도 이와같은 성격을 갖습니다.

 영국의 스펄젼이라고 하는 유명한 설교자는 이 성령의 도우심을 놓고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었습니다.

 물가에 사는 사람은 10살 남짓되면 아버지에게 노젓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아저 지는 아들에게 노를 저어 보라고 시킵니다. 보기는 쉬워도 노를 잡으면 잘 안됩니 다. 그 아들은 아버지 흉내를 내 가면서 저어 볼려고 애를 쓰지만 자기보다 큰 노 를 잘 다루지를 못합니다. 노 하나만 다루기만 하자고 해도 힘이 드는데 센 물살 을 갈라가면서 배를 나가게 하려니까 자기의 힘으로는 부치는 일입니다. 잘 안됩 니다.낑낑거리고 땀을 뻘뻘 흘립니다. 곁에서 지켜 보던 아버지가 아들에게로 닥 아 와서는 '얘 오른 발은 이 디딤목 위에다가 딱 얹는 거야 그리고 왼발은 바닥 에다가 두고,왼손은 그냥 노 위에다가 얹기만 해도 돼 그리고 오른손은 노를 꽉 잡아야 돼 그리고는 이렇게 젓는 거야'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아들은 그렇 게 해 볼려고 얘를 씁니다만, 익숙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뭐 얼 마나 애를 먹는지 모릅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씩-익 웃으면서 일어나서는 아들 에게로 닥아와서는 아들 등에 자기 몸을 딱 붙이고는 아들의 오른손 위에는 믿음 직한 아버지의 오른손을 얹고,아들의 왼손에는 아버지의 왼손을 얹고는 노를 저어 줍니다. 그러면 아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편합니까 아버지가 젓는대로 움지여 주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해서 노 젓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를 함께 저어 주시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돕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얘야, 그래 가지고 어디 되겠느냐 너는 저기 가서 앉아 있어, 내가 저을 테니까" 이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노를 저을 때에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게 돕는 것이지. "이제 필요없다. 내가 해주마." 이게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해서 갑자기 우리의 연약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 요 우리가 갑자기 영적인 거인이 되는 것도 아니요, 초자연적인 인물이 되는 것 도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는 않아요 우리가 움직일 때,순종할 때 성령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오셨고,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동행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우리의 연약이 없다면 성령이 계실 필요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은 성령이 머물게 하는 필요 조건이 되고, 어떤 의미에서 는 절대조건이라고도 말할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의 연약은 성령을 머물게 하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은 감사의 조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보통 그 반대로 이 연약에 대해서 반응을 보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벗어 날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연약함을 가지고 탄식하고, 자기를 학대합니다. 이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 에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길수 없다고 자주 푸념을 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의 연약은 우리가 탄식할 것도 아니요, 우리가 실패하는 조건도 아니요,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는 장애 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연약이 나로 하여금 성공하게 하고, 능력을 체험하게 하는 비결이라는 것을 배울수 가 있습니니다.

왜 내가 연약하니까 성령이 나를 도웁는것 아닙니까 만약에 내가 연약하지 않 으면 성령이 나를 안 도우십니다. 성령이 나를 돕지 않으시면 그 결과야 뻔하지 요.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을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연약이 성령을 머물게 하는 조건이라고 하면, 오히려 바울처럼 감사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오히려 자랑하노라.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니라. 자기 연약에 대해서 꿰뚫어 보는 영의 눈을 가진 사람 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연약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성령 이 우리의 연약을 돕는 영역은 대단히 많겠는데 왜 하필이면 기도 문제를 특별히 다루실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우리가 육신적으로 연약하든지, 정신적으로 연약하든지, 영적으로 연약하든지 간에 어떤 연약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 제일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이 기돕니다. 우리의 모든 연약은 기도를 공격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를 방해 한다는 말입니다.

열이 조금만 높아도 기도를 못하고 들어 놓습니다.

박에서 조금만 기분이 나빠서 들어와도 기도를 안할려고 듭니다.

조금만 긴장이 풀려서 세상 재미에 맛을 들이면 우리의 영혼이 캄캄해지고 기도 가 막힙니다. 나에게 연약함이 기도를 못하게 하는 쪽으로 공격을 합니다.

성령이 이것을 아시지요.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공격을 받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 때 문에 이 기도를 살리기 위해서 특별히 기도의 연약을 도우신다는 것, 우리가 믿어 야 됩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으로 기도의 지장을 받는다면, 평생 우리는 이 연 약함에 짖 눌려서 살지 이 연약함을 극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 가 지장을 받으면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 를 돕기 위해서 와서 계시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만이 도울수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우리가 성령의 도움을 받기 위한 생명줄과 같습니다.

기도생활에 탈이 나면, 우리는 연약함의 희생물이 될 것이요, 어쩌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파선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재미있는 말을 했어요. 온갖 질병이 감기의 문으로 들어 오듯이 신앙생활의 적신호는 기도의 감기에 걸릴 때 켜진다고 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기도가 고장이 나면 영적으로 문제가 생깁니다. 영적으로 병들어 가는 것입니 다.그러니까 성령께서 기도를 특별히 돕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께서 기도를 돕는다고하는 것은 아주 뜻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께서 기도를 도우십니까 두가지로 돕는다고 성경에 말하고 있지요.

 첫째는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 해 친히 간구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십니 다.(26)

자기가 탄식하면서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해 주므로 돕는다하는 의미겠지요. 기 도는 마땅히 성도가 해야 할 일입니다.기도를 무시하고 산다든지,기도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본문에 보니까 마땅히 빌어야 한다고 합니다. 마땅히 빌어야 하는데,우리는 어떻게 빌어야 할 줄 모르니까,그런 연약함 때문에 성령이 도우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셔서 자기가 직접,우리를 대신 하여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간구하십니까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우리말 번역대로 보면,성령이 직접 탄식하는 것으로 볼수 있습니 다.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성령이 정말 탄식하 는가 성령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어떻게 탄식하느냐 하나님이 탄식한다는 말 을 감히 어떻게 쓰느냐 하나님은 탄식하지 않는 분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성령께서 자기가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우리를 탄식하도록 만드신다.이렇게 해석하는 분도 있습니 다. 그런 반면에 글자 그대로 보는 분들이 있어요.

이것은 성령이 우리를 탄식하게 한다는 말이 아니고, 글자 그대로 성령이 자기 가 직접 탄식하는 말이다. 성령이 왜 탄식 못하느냐 성경에 보면 성령이 우리 안 에 계시면서 우리 때문에 근심도 하시고, 어떤 때는 시기까지 하신다고 하는데(야 4:5)왜 탄식을 못하느냐

어느쪽이 옳은가를 가지고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이 탄식하신다는 말 자체가 신비스러운 영역의 일입니다. 우리로서는 이 신 비스러운 일을 베일을 벗기고 명확하게 들여다 보고,밝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한계성을 가지고 있기 성령이 어떤 형식으로 탄식을 하시는지 꼭 꼬집어 서 이렇다 하고,말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는 [성령이 자기가 직접 탄식하신다는 의미로 받아야 하고] 이차적으로는 [성령이 우리로 탄식하게 하신다]는 의미로 받아도 됩니다. 두개를 다 받아서 검토하는 것이 오히려 더 건전한 방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성령은 탄식을 할 때 말할수 없는 탄식을 한다고 했지요. 말할수 없는 이 말 이 무슨 뜻이에요.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탄식이라]는 표현이니까. 가장 농도 가 짙은 것을 말하지요. 또 다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없 는 탄식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신비스러운 탄식이라는 의미겠지요. 이런 의 미에서 성령은 직접 탄식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는데 우리의 속을 들여다 보시면서 탄식 안하겠어요 날 마다 웃고만 계시겠어요 우리가 기도하는 꼴을 보고 성령이 가슴을 안치겠어요 성령이 가슴을 안치겠습 니까 마음에도 없는 기도를 하고 일어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마다 성령은 무 슨 말을 하겠습니까 [나죽겠네.나죽겠네 안하시겠어요.

형식으로 때우고 끝내는 것을 보시고, 죄를 숨겨 놓고 청산유수로 을퍼내려 가는 그 기도,그 꼴을 보고 성령이 탄식 안하겠어요.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인데, 덜 중요한 일들 때문에 희생해 버리고 하루 해를 넘기는 우리의 꼴을 보고,성령이 탄식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성령이 계십니다. 그런데 설교를 들으면서 꾸벅꾸벅 조는 것을 보고 성령이 탄식하지 않으시겠어요.

주보에다가 낙서만 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탄식을 안하시겠습니까 자꾸 시계만 보고 있는 사람을 보고 성령이 탄식을 안하겠습니까 그 보다 이 자리에 나와야 할 많은 성도들이 나오지 않고, 세상 일에 쫓기고, 세상 사람들을 만나러 허덕거리며 방황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령이 탄식하지 않겠 느냐 말입니다.

저는 성령이 탄식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해서 그 연약함을 스스로 짊어지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탄식하는 성령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계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 분의 탄식이 없다면 우리는 더 비참해 지고, 우리의 기도는 마치 저 공중에 날라 올라 가다가 힘없이 떨어지는 화살처럼 하나님의 존전에 이르지 못하고 중간에서 다 떨 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성령의 이 탄식이 있기 때문에, 못난 기도지만,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기도지만, 어느 때는 형식적인 기도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올라 갑니다.

 동시에 성령은 우리를 탄식하게 만드십니다.

우리는 이미 피조물과 함께 속으로 탄식하며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이미 23절에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을 내다보고 그 영광이 어서 빨 리 오기를 사모하며 기다리면서 탄식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탄식도 성령이 우리를 탄식하게 할 때에 나오는 탄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탄식하게 만듭니다. 자기가 탄식하니까 그 탄식이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요 성령의 탄식을 우리가 아는 이상,우리의 기도가 탄식의 기도가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너무나 탄식하지 않으면 안 될 많은 약함 을 지고 하나님의 존전 앞에 나가기 때문에 탄식으로 부르짖지 않으면 기도할수 없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 성령은 우리를 탄식하게 합니다.

 저의 경험으로 보면 기도의 약 80%는 탄식을 기도가 아닌가 합니다.

어떤 때는 찬송을 부르면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기뻐하면서 기도할 때도 있습니 다. 또 어떤 때는 춤도 추면서 기도 하기도 합니다.

제가 서재에 있으면서 설교 준비를 하다가,또는 성경을 보거나, 신앙서적을 보 다가 은혜가 임하면 혼자서 노래를 부르며 감사 하면서 이리저리 왔다갔다하기도 합니다. 누가 보면 미친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그렇게 흔하지를 않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약함이 있기 때 문에 기도에 많은 어려움을 당하거든요 따라서 이 약함 때문에 탄식이 더 많습니 다. 성령은 이 탄식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것은 본능적인 탄식도 아닙니다. 자연인의 탄식도 아닙니다. 성령이 탄식하는 영을 주실 때만이 탄식하는 기돕니다.

탄식은 위선과 거리가 멉니다. 탄식은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 만이 진지한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기도의 탄식을 가능하 게 합니다.

이사야 38:14절의 히스기야의 탄식은 성령의 탄식이었습니다.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라고 부르짖은 기도, 이런 것은 성령이 함께 할 때만이 할수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기도는 탄식입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보신 분있습니까 어떤 표정이예요. 잔뜩 찌푸려서 주름살 투성이입니다.

5-6년전에 지방 M.Y.F 수련회에서 어런 학생들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사진 으로 찍어서 크게 확대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수백명의 학생들의 표정 이 몇명만 빼놓고는 오만상을 찌프린 모습이에요. 이것이 기도하는 오리지날 폼입 니다. 그 애들보고 [너희들 얼굴을 이렇게 찡그리고 인상을 써서 기도하라]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하면 오만상이 찌그러들게 되어 있어요.

 제가 들으니까 웃으면 안면 근육이 17개가 움직이고, 찡그리면 43개가 움직인다 고 그래요. 그러면 기도할 때 찡그리니까 안면 근육은 모두 움지이는 것이에요.

그러니 하루에 한시간 기도하는 분, 두시간 기도하는 분, 그것을 합하면 일주일 에 10여시간 이상을 기도하는 분들을 보면, 얼굴에 주름살이 좀 많고, 그리고 약 간 우는 상이고요, 그럴수 밖에 없지요. 탄식하는 기도를 하다보니까 그래요.

이것이 정상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진실되게 하시는 성령의, 탄식하는 기도를 들으면서 함께 탄식하 는 기도를 드리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유창하게 말을 할려고 하지를 말고 탄식에다가 마음의 진실을 담아야 합니다.

탄식할 수 없는 우리를 탄식하게 하시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내 마음에 계시고, 기도할 때 마다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둘째로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 시면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27절을 봅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누구의 마음을 감찰한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감찰한다는 말입니다. 하나 님은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마음을 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보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를 잘 못합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우왕좌왕 하며,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합니다. 이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신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시는 거예요.

 이 본문에서 성령이 직접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해석해도 좋 고,또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시 고, 그 뜻에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도우신다]고 해석해도 좋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가끔 세베대의 두 아들의 기도를 합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임하면 내 아들중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하시고,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주세요]라고 그 어머니가 기도할 때에 예수님은 참 의미있는 말을 하셨어 요.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구하는구나] 뜻도 모르고 지금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도 전혀 모르고 자기의 욕심대로 구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내 오른편에 앉는 것과 왼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정해 놓았다]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어요. 그런데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그 어머니는 자기들 이 원하면 오른편에도 앉을수 있고, 왼편에도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무작정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자주하지요.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그럴수 밖에 없지 않 습니까

또 우리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소위 손해 보는 기 도를 자주합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고 40년 을 살았습니다.처음에 만나를 먹을 때는 좋았습니다마는 한 몇달을 먹다보니까 물 려서 고기 생각이 간절했어요. 그래서 [고기 달라고 소리쳤어요] 아우성을 치면서 아이도 울고,어른도 울면서 소리쳤어요. 하나님이 또 그런데는 마음이 약해서 다 라는대로 고기를 주어서 먹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106편 15절 보면 참 중요한 것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 찌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무슨 뜻입니까 고기 달라는 백성들의 아우성을 듣고 불쌍히 여기셔서 달라는 대로 메추라기를 보내서 고기를 먹게 해 주었습니다. 입만 열면 고기 냄새가 나도록 먹게 해 주었 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자기들의 영혼이 형편없이 손해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파리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자주하지요.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내 뜻대로 기 도하다가 보면,하도 새벽이고 낮이고 밤이고 와서 기도하니까 하나님 주시기는 하지만 그것 받았기 때문에 내 영혼이 병들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우리가 아주 어려운 재난을 만난다든지,불행한 사건을 당한다든지, 이것 인가 저것인가 몰라가지고 숨가쁘게 어떤 결단해야 되는 어려움에 봉착하면 하나 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초조해 지고, 어떻게 기도해햐 할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달라고 해야 할지도 모 르고,우리의 내다볼수 있는 영적인 수평선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참 하나님의 뜻 을 그런 경우에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수 없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 문에 성령은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시고, 뿐만 아니라 자주 자주 우리의 마음 을 열어서 탄식하게 하십니다.

모르니까 탄식하는 거예요.모르니까 부르짖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가 탄식의 기도가 될 때에 그것은 성령이 여러분을 도우 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복된 기도입니다.

얼굴에 주름살이 많이 생긴다고 걱정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얼굴에 기도의 주 름살이 많이 생기도록만 기도를 하세요.

 우리가 골방으로 들어가면, 함께 들어 가시고 우리가 무릎 꿇으면, 함께 무릎 꿇으시고, 우리가 입을 열면, 함께 여시고, 우리가 탄식하면, 함께 탄식하시며, 우리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면 함께 일서서시는 성령이 우리 곁에 계심을 감사 해야 합니다.

그 분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연약 한 것 많아도 낙망하지 않습니다.우리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습니다. 이 연약함 때문에 성령이 나에게 계시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의 연약을 놓고 긍정적으로 볼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성령의 도움으로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 님이 기도에까지 항상 도달하는 능력있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등뒤에서 주찬양해 02장을 부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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