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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 (롬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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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26절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성경 말씀이 지적하고 있는 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사건자체의 축복이 아니라 그 사건이 갖는 의미의 축복이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알고 사는 사람들과 예수를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경험과 생활은 다르지 않다. 동일한 사건이 생긴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일어난 사건과 믿는 자들에게 일어난 사건은 그 자체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사건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는 너무나 다르다. 그것이 여기에서 말씀하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뜻이다. 좀더 길게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한사람의 죽음이 절망일 수도 있고 저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한대로 주 안에서 잠자는 것에 불과하고 마지막 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 재림의 나팔소리와 함께 다같이 부활하여 천국에서 우리가 다 만난다는 것을 알기에 死別한다는 것은 슬픔일 수 없다. 그래서 무엇이 불신자들과 다른가 하면 벌어지는 사건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갖는 의미가 다르다. 세상 사람들이 겪는 동일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그들은 세상으로 갔고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 오늘 내가 하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이 말은 성령님이 하나님께 구해서 우리가 자기 욕심을 따라 뛰어가는데 ‘브레이크’를 걸게 한 후 그 시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으로 시선을 돌리고 인생을 바로 잡는 일들을 늘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는데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건에서, 생겨나는 경험 속에서 시선이 하나님 앞으로 자꾸 교정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자’라고 한다. 바로 이 점이 신자가 불신자와 다른 점이다. 오늘 그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롬 6:12-20)”
여기에 두 가지 지적된 말씀이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지체다. 그와 한몸이다. 성령이 거하는 전이다.”와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말씀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않고 세상을 향하여 사는 우리의 목표와 자세들을 자꾸만 하나님 안으로 돌아오게 하신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는 우리들을 하나님 앞에 다 완성시킬 수 없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은 우리를 우리가 가고 싶어하는 길에서 막으시며 억지로 그 길로 가지 못하게 하고 채찍을 가하고 우리를 끌어 올 수 있다. 자꾸 나가 놀고 공부를 안하니까 붙잡아다가 비틀어 매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적극적인 차원에서의 진짜 공부는 본인이 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이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이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25-32)”
여기에 제시한 모든 행동 강령들이 어느 말씀과 뿌리를 대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되게 말라”와 뿌리를 대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말기 위해 제시된 행동강령들이 우리가 성경에 쓰여있지 않아도 납득이 갈만한 이야기들이다. 신앙생활이란 종교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며 기도를 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위한 에너지를 공급받고 지식을 공급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기도와 성경을 읽는 것이 순전히 일과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루 세끼 먹고 밤잠을 자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듯이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하고 계획을 세워놓고 성경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일과라는 뜻은 아니다. 종교행위를 누리려고 하면 할 게 없다. 성경을 보고 기도만 해가지고는 할 일이 없다. 물론 그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얻어진 에너지를 생활화해야 한다. 어떤 생활인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생활은 ‘종교행위’가 아니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인생이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천사도 아니고 복음을 들고 마주쳐야 하는 일들이 결코 아니다. 주어진 환경 속에 내가 쌓고 하나님이 채워주신 에너지들을 가지고 부딪쳐야 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16-23)”
이 말씀은 결단코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에서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를 제시한 것은 성령의 열매가 목적이 되고, 목표가 되라고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자세가 되고 분위기가 되고 기준이 되라는 말이다. 지금 이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는 이런 말씀으로 시작한다. 갈 5:16을 보면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그리하면 “육체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17절을 보면 “육체는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려서” 서로 동시적이 아니라고 말씀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성령이 너희 안에 있으며 너희가 성령을 근심치 않게 하기로 결심했느냐 그렇다면 이렇게 살아라. 성령을 좇아 살아라”이다. 그런데 성령을 좇아 사는지 안 사는지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랑을 내가 목표로 하고 내가 사는 일의 자세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내가 예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여러가지 있다. 그러나 ‘성냄과 분냄’은 비록 주님을 위한 일일지라도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육체의 소욕을 좇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사랑’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랑은 꺼내놓고 쓸 형체를 가진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실증하는 형태가 아니다. 사랑은 다른 일에 좇아다녀야 할 그 일과 행동의 ‘분위기’여야 하며 ‘자세’여야 한다. 성경에 오늘 여기 성령의 열매를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에 내가 시선을 못박고 목적을 두기에 가장 좋은 가시거리에 있는 목표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대로 살기를 원하는가 우리에게 준 오늘이라는 생활의 현장 속에서 나에게 부딪치는 일과 사건을 이 자세대로 하고 있는가를 보면된다. 오고 가는 말, 내 이웃과 벌어진 사건에 대처하는 내 자세가 이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보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서 생활의 현장 속에서 이 열매를 맺게 할 자신이 있어야 한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 속에 계셔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 그러면 성령을 ‘근심케’ 말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성령을 좇아 살기로’ 결심하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전 생애를 통해 자기의 모습을 “우리가 만물의 찌끼와 같이 되었도다”고 고백하였다.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얼마나 우리 자세와 우리 열심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기 어려운가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자들이 복된 자들이다. 그렇게 안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매맞는자녀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순종할 때 ‘두둘겨 패서’라도 고치고야 마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종교화되기를 바라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떤 상황과 현실과 싸움터에 데려다 놓아도 그렇게 살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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