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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적의 은사 (고전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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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장 10절 첫 부분에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주셨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능력이란 기적을 의미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기적 행하는 은사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작은 기적이라도 행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우러러봅니까 그렇지만 우리 주위에 이 기적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적의 종류

기적의 은사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을 말합니다 . "초자연적"이라는 말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고 이해하는 자연의 순리를 넘어선 사건들을 가리키는 말 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기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인간에 대 한 기적"이 있는데, 이것은 사 람에게서 초자연적인 사건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과 고칠 수 없는 병이 기 적적으로 낫는 것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성경에 이러한 예가 많이 나타납니다.

또다른 하나는 "자연에 대한 기적"인데, 이것은 자연계에 초자연적인 사건 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한 사건이라든 지 예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곧바로 말라 버린 사건 이라든지 사나 운 풍랑이 일던 바다가 예수님의 명령으로 잔잔해진 사건, 그리고 홍해가 갈라지고 대낮에 해가 멈추어 버린 사건 등이 자연에 나타난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적의 정의(定義)

제가 기적에 대해서 연구를 해 보니까 사람마다 그 정의가 다르더군요. 먼 저 포괄적인 의미의 "주관적인 기적"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캐더린 쿨만이라고 하는 부인은 금요일마다 기적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기적은 놀랍고 희한한 사건을 뜻했습니다. 어린아이 가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고 싶은데, 200원이 필요합니다. 그 래서 이 아이 가 200원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보니까 땅바닥에 백 원짜리 동전이 두 개가 있습니다 . 그래서 그것을 주워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습니다. 쿨 만 여사는 이 작은 일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암 이 치유되는 것, 오늘 하 루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 영적인 거듭남, 아기가 태어나는 것, 생선 가시 를 삼 켰는데 안 걸리고 잘 넘어간 것, 이 모든 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보기에 기적으로 생각된다는 것이지요. 기적 속에 이런 것을 다 포함시키면 삶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알렌이라는 목사님 역시 주관적인 기적의 개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분 은 병이 낫는 것, 영혼이 치유되 는 것, 슬픈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 기쁨을 맛보는 것 등이 맹인이 눈뜨는 것과 똑같은 기적이라고 생각합 니다. 쿨만 여사의 경우와 같이 기적이란 말의 의미가 매우 넓습니다. 기적을 많이 강 조하시는 함바드라 는 목사님은 100만 불짜리 건물을 지으려 할 때 그 공사 를 맡아서 해 주겠다는 건축 회사를 만나게 된 것 을 기적이라고 말했습니 다.
이러한 의미의 기적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기적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 들이 말하는 기적은, 우리가 차 를 타고 가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차와 부딪 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지나갔을 때 "아, 기적이다"라고 말할 경우의 기적 과 비슷한 류인 것 같습니다. 이런 때는 기적이라기보다는 기적적이란 뜻입 니다. 기적과 기적 적이란 것을 구별하지 않고 같은 뜻으로 쓰기 때문에 이 런 분들에게는 기적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예로 든 것과는 달리 "객관적인 기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봐도 기적이고 다른 사람이 봐 도 기적인 초자연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러한 기적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초자연적 인 사건이 외적(外的)인 현상으로 나타났던 예로 금방 떠오르는 사건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라고 해서 살리신 사 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 리새인들과 그 동네 사람 들이 똑같이 목격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증가 했습니 다. 이렇게 누가 보아도 증명할 수 있는 초자연적 사건을 객관적인 기적이라고 합니다. 즉, 확인되는 기적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기적"이란 말이 있지만, 원래는 성경에 기적이라는 단어 는 없고 "징표", "이사"(異事 )라는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성경 역사를 살 펴보면 특별히 기적이 나타났던 시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에 소돔과 고 모라가 없어지는 파괴의 기적이 있었고, 노아 시대에 홍수의 기적이 있었으 며, 모세 시대에 많은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800년 정도 기적이 거의 없다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다시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니 엘 시대와 예수님 시대와 사도 시대에 기적이 나타나고, 그 후로는 거의 기 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가끔 어떤 사람이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 려냈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여러 해 전에 인도네시아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나서 크게 부흥이 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여러 학자들과 신문 기자들이 가서 조사를 하고 발표를 해 서 떠들썩했습니다. 그런데 의견이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혼수 상태에 있던 사람이 회복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누구 말이 옳은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요즈음은 객관적인 기적들이 흔하지는 않습니다 .
하나님의 참된 기적은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틀림없이 기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에게 그런 은사를 주셨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누구든지 택하여 사용하실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기적의 특징들

특별히 신약성경에 나타난 기적들을 보면서 열 가지 특징을 찾아 보았습니 다.

첫째로, 기적은 도움을 줄 수 있고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기적이라는 말을 불치병이 낫는 것과 쉽게 연결시키는데, 죽 는 것도 기적일 수가 있고 병 드 는 것도 기적일 수 있습니다. 엘루마라는 박수는 사도 바울의 말 한마디에 소경이 되지 않았습니까 또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스가랴는 천사의 말 한마디로 벙어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는 유익할 수도 있고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기적은 즉각적입니다.
앉은뱅이에게 기도를 했는데, 그 사람의 발이 조금 뜨뜻해지더니 이틀 후 에 더 간질간질하다가 일주일 후 에 한두 발작 걷고 한 달 지나서 제대로 걷게 되었다는 기사가 성경에 나옵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의한 기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다리가 아프지 않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나는 것입니다.

셋째로, 기적은 완전합니다.
반쯤 혹은 사분의 일쯤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치료됩니다. 앉은뱅 이가 일어나면 걷기도 하고 뛰 기도 하면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기적은 공개적입니다.
누구나 보고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 서서 걷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어느 구석에서 몰래 나타 나서 한두 사람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볼 수 있고 인 정합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만은 논란이 없습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기적은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기적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의 병은 나았 는데 저 사람의 병은 안 낫는다 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틀림없이 낫습니 다.

여섯째로, 기적은 믿음의 유무(有無)에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어떤 기적은 당사자가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 러나 믿음이 없는 채 기대도 안 했는데 바울이 명하니까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려고 하시면, 믿음이 있든 없 든 기적이 일 어납니다.

일곱째로, 기적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여기서 제한이 없다는 말은 어떤 류의 기적이든지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나운 파도도 멈추고, 무화과 나무도 말라 버리고, 죽은 사람도 살아나고 …. 하나님이 역사하시고자 하면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병이 낫 는 정도만이 아닙니다.

여덟째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주로 선지자들이 기적을 행했고, 신약 시대에는 주로 사도 들이 기적을 행했습니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 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아홉째로, 기적의 대상은 그 자리에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습니다.
백부장이 자기 집 하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했을 때 그 하인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 나 백부장의 믿음대로 그 하인은 나았습니 다. 꼭 예수께서 직접 안수해 주셔야 기적이 나타나는 것은 아 닙니다. 하 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거리는 상관없습니다.

열째로, 기적은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는 언제든지 나타납니다.
고함 지르며 기도하든 소곤소곤 기도하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나 아라, 일어나라 하시면 그대로 되는 것입 니다. 반드시 신앙적으로, 심리적으로 뜨거운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 닙니다. 엎드려서 기도해도 되고 막 흔들면서 기도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즉각적으 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 그분의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보이시고 자신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믿는다 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버지 하나님, 모든 자연계의 질서를 초월하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당신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묵묵히 하나님을 바라보 며 날마다 낙심하지 않고 힘 있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때때로 하나님의 능 력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당신은 확실히 봉사하고 있습니까

 귀신 쫓는 은사/김상복 목사

이제 귀신 쫓는 은사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성경에는 이 능력을 은사라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예(例)는 많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친히 귀신을 쫓으셨고, 열두 제자도 그런 능력을 받았고, 칠십 인을 둘씩 보낼 때도 그러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도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면 복음서에 나타난 사례(事例) 중에서 예수께서 귀신을 쫓은 아홉 번 의 사건을 추적해 보기로 하겠 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귀신 쫓은 사건들

첫째/마가복음 1장 21-28절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실 때, 어느 귀신들린 사람이 회당에 나타나서 "어떻게 당신이 와서 우리를 괴롭히려고 합니까 우리를 멸하러 여기까지 찾아왔습니까" 하면서 고함을 질렀습니다.
마치 예배 시간에 귀신들린 사람이 일어나서 떠들고 소란을 피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조용하고, 당장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그랬더 니 귀신이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키게 하고는 나갔습니다 .

둘째/누가복음 8장 2절
이 구절에는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가 소개됩니다.
귀신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한 육체 속에 일곱 명 정도가 아니라 수백 명도 들어가서 그 사람을 결박할 수 있습니다. 이 마리아가 귀신에게서 해 방된 후,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셋째/마태복음 12장 22-29절
여기에는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악 령이 들렸을 때 나타나는 여러 증세 중에 하나가 그러한 장애입니다.

넷째/마태복음 8장 28-34절
귀신들린 사람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난폭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예수 께 "하나님의 아들이여"라고 통 찰력 있게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통찰력은 귀신들린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다섯째/마태복음 9장 32-34절
귀신들린 결과로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서 고치심으로 그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섯째/마가복음 7장 25-35절
이 본문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귀신들렸는데, 그 아이를 고쳐 준 기사 입니다.

일곱째/마태복음 17장 14-20절
제자들이 어떤 사람의 아들을 사로잡고 있는 악령을 쫓아내려고 아무리 애 를 써도 안 되는데,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셔서 귀신을 꾸짖어 쫓아 내시고 이러한 일은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 씀하십니다.

여덟째/누가복음 11장 14절
앞에서 나온 경우와 비슷하게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십니다.

아홉째/누가복음 13장 10-21절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을 예수 께서 고치십니다. 이때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고 분을 냅 니다. 예수님은 18년 동안이나 고생한 여자가 치료를 받았으면 기뻐해야지 안식일이고 아니고가 뭐가 중요하냐며 야단을 치십니다.

귀신들린 사람의 특징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에는 귀신들려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이후 사도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귀신들린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조 심해야 할 것은, 조금이라도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면 모두 귀신이 들려서 그렇다는 식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 다. 다시 말해서, 정신이 이상한 사람과 귀신들린 사람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귀신들 린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여덟 가지 특징을 마가복음 5장의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악령이 그 사람 속에 거주합니다.
5장 2절에 보면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과는 달리 귀신들린 사람에게는 악한 영이 들어가 있습니다.

둘째로,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3절에 보면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라고 말 합니다. 그 다음 절에 그 사람이 여러 번 고 랑과 쇠사슬을 끊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귀신들린 사람은 보통 사람 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악령은 타락한 천사입니 다. 천사는 창조 될 때부터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창조되었기 때문에, 사람 이 그 영의 힘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발작을 합니다.
4절 후반부에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고 말하고 5절에는 "밤 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더라" 고 합니다. 악령이 한번 발작을 하면 인간을 해칠 수 있습니다 . 저의 형수 님이 권사님이신데, 한 구역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맡은 구역에 속 한 한 가정에 귀신 들린 여자가 있다고 합니다. 형수님이 그 집에 가서 기 도하려고 하면 그 여자가 막 덤벼들기 때문에, 조금은 무섭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기도를 하게 되면 삭 사그러들고 꼼짝을 못하고 앉아 있 는다 고 합니다. 이렇게 악령은 발작을 해서 다른 사람을 해치려 합니다.

넷째로, 이중 성품이 있습니다.
6,7절에 보면 귀신들린 사람이 멀리서 달려와 예수를 보고 절하며 큰소리 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 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 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부르짖었다고 말합니다. 쫓아와서 절할 때는 언제고 나한테 왜 왔느냐고 야단 칠 때는 언 제입니까 이렇 게 두 개의 실체가 한 사람 안에 들어 있어서 이런 모순된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영적인 것을 싫어합니다.
여기서 영적인 것이란 거룩한 것이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기도하는 것을 싫어하고, 목사님이 찾아오는 것 을 싫어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싫어하 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는 겁을 내고 그것을 멀리 하려고 합 니다.

여섯째로, 통찰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데 곧바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점치는 사람들이 척 보고 알아맞추는 것도 이 악령의 힘에 의해서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점장이한테 푹 빠져 버리면 곤란합니다.
악령은 완전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통찰력이 있을 뿐입니다.

일곱째로, 다른 목소리가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향해 네 이름이 뭐냐고 했을 때 "내 이름은 군 대니"라고 대답하는 것은 바로 그 악령입니다. 그 소리는 귀신들린 사람이 아닌 귀신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여덟째로, 귀신은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 의 이천 마리나 되는 떼가 바다 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살 하거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귀신은 사람에게 있다가 짐승에게로 들어갈 수도 있고, 이 사람에게 있다가 저 사람에게로 옮겨갈 수도 있습니 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특징이 나타나면 이 사람에게 악령이 있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쫓아낼 수 있습니 다. 또 성령으로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악령을 이기신 분이기 때 문에, 하나님의 종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악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은사는 아닙니다. 우리가 악령을 쫓 아내는 은사는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언제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 리려 하는 악령의 세력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공중에 권세를 잡은 자들과의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 그 리스도의 힘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 하게 살 때 악령의 세력이 우리를 감히 넘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을 용 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면 악령의 유혹을 받을 가능 성이 커집니다.

제가 며칠 전에 어느 분과 대화를 하면서 요즈음 교회 잘 다니냐고 물었더 니 교회에 안 간 지 2년 되었다 고 대답을 합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교회 에 갔을 때 예수 믿는 사람에게 너무너무 실망을 해서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가 없더랍니다. 용서를 못하겠는데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려니 되겠습니 까 그러니까 자연 히 교회에 가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괴롭힌 사람을 2년 동안 용서하지 못하고, 그 사람만 생 각하면 괴롭고, 그래서 교 회에 나오기 싫고…. 이런 상황은 아주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분 에게 당장 회개하고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마귀가 좋아하는 것입니 다. 그런 사람에게는 악의 영이 들어와서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누구든지 어느 분야에든 악령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는 것은 무 척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늘 마음을 깨끗하게 하 고, 주님을 늘 의식하며,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강렬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성령의 충만함으 로, 날마다 삶으로 써 악령이 손댈 수 없는 그런 강한 자로 서기를 바랍니 다.

"아버지 하나님, 너무도 많은 악령의 세력이 이 세계를 어지럽히고 수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아 버지 하나님, 우리로 늘 악령의 세력에 대처 해서 과감하게 살게 하시고, 우리가 싸우는 것은 혈과 육이 아니고 이 세 상의 주관자인 악령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원컨대 우리의 가슴이 날마다 성 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과 순간순 간마다 동행하게 하시고, 악령이 우리의 삶에 틈 타지 못하도록 또 악령이 우리를 유혹할 때 그 세력을 이기고 남을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베풀어 주 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당신은 확실히 봉사하고 있습니까

 방언과 통역의 은사/ 김상복 목사

성령의 은사 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강조되는 것이 방언의 은사일 것 입니다. 이번 장에서는 방언과 통역의 은사에 대해 크게 두 본문을 중심으 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두 본문이란 사도행전 2장과 고린도전 서 12-14장입 니다.

방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살피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 다. 앞에서도 강조한 바 있는데 , 방언이 모든 은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은 사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방언은 스물일곱 가 지 은사들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방언의 은사가 다른 은사보다 더 중요한 은사라는 근거는 성경 그 어디 에도 없습니다. 한국 교회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 부분에 대한 오해가 있기 때문에 이 점을 지적하 고 싶었습니다.

과거에 한참 방언 운동이 벌어질 때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방언을 강조했 습니다. 우선 방언은 구원받은 증거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방언 의 체험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했다는 식의 극단적 논리였습니 다. 70년대에 미국에서는 그런 내용의 전단을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이러 한 생각이 잘못되 었다는 것을 성경 공부를 통해 깨닫게 되어 다행입니다.
방언 받지 못하신 분들은 괜한 부담감을 갖거나 하나님이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방언이 구원의 증거라는 생각은 잘못 된 것입니다.
또 두번째 주장은 방언을 하지 않으면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 다. 한때 미국의 한인 교회에서 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자기네 목 사님이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일 경우에 저런 목사의 설교는 들을 필요가 없다면서 교회를 떠나는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성령 을 받지 못했으니 까 방언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잘못되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방언은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은사 가운데 하나입니 다. 남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나 방언 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 사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방언의 은사 하나로 남의 신앙을 판단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 니다. 모든 사람이 방언을 해야 된다는 것도 잘못된 일입 니다. 모든 사람이 귀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사 람이 눈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스리는 은사를 받아야 됩니까 모든 사람이 가르치는 은사를 받 아야 됩니까 모든 사람이 전도하는 은사를 받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 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하 나님 원하시는 대로 각양의 은사를 주셨 으므로, 방언의 은사 하나만 너무 부각시킴으로써 교회 내에 분열 을 일으 키거나 교인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누구든 자신의 은사만을 최고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은사는 교 회를 세우기 위함이므로 자신을 세우는 데 소용되도록 하면 안 될 것입니 다. 감사하게도 요즈음은 은사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정착되어서 건전한 방 향으로 은사가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방언

먼저 사도행전 2장 1-4절을 보겠습니다. 방언은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 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 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 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 하기를 시작하니라 ."
여기에서 중요한 표현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라는 것입니다. 방언 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성령 께서 하게 하신 것입니다. 미국에서 보니까 방언을 하도록 가르쳐 주기도 하던데, 그런 내용은 성경에 전 혀 없습니다.
방언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하고 안 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의하십시오.

그 다음 6절부터 보십시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이 오순절날에 전세계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몇 나라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9,10절에 나온 나라들을 모두 합하면 열다섯 나라가 됩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사도들이 방언 을 시작하 니까 모두를 자기네 나라 말로 그 방언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태리에서 온 사람은 이태리 말로 듣고 불 란서에서 온 사람은 불란서 말로 듣고 독일에서 온 사람은 독일 말로 듣고 그저 각 나라마다 자기네 말로 사 도들의 방언을 알아들었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이것은 과거에도 없었 고 그 이후에도 없었던 일입 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전 세계에 세우시기 위하여 열다섯 나라 사람들이 모였을 때 그 와 같은 놀라 운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때 모인 사람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교회를 시작했습니 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려고 했을 때 이미 로마에 교 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누가 어떻게 세운 것 입니까 본문에 보면 로 마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사도들의 말을 자기네 나라 말로 듣고는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럼 사도들이 방언으로 말한 내용, 15개국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 말로 알 아들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11 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 나님께서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들을 사도들이 말했고, 15개국 사람들이 그 내용을 다 알아들은 것입니 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본문에 "방언"이 라는 말이 4,6,11절에 나오는데 , 우리 나라 말로는 똑같이 "방언"이라는 단어가 쓰였지만 원문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4절 의 방언은 우리가 보통 이해하고 있는 개념으로서 성령께서 주시는 하나의 말이고, 6,11절의 방언은 영어 로 dialect라고 하는데 어떤 지역의 특수한 말을 가 리키는 단어입니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말고 이해 할 수 있어야겠습니 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타난 방언

고린도전서 12-14장은 은사, 특히 방언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 있는 혼란을 해결하려고 쓴 것입니 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대략적인 구조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12장 10절에 보면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방언의 은사를 주셨다 고 하면서 여러 은사에 대해서 12장에 죽 설명을 한 다음 맨 마지막에 와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 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31절)고 말씀합니다.
제일 큰 은사,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고 린도전서 13장에서 무엇에 대해 설명하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사랑의 은사"입니다. 그러니까 방언의 은사든 기적 행하는 은사든 어떤 특별한 은사라도 사랑의 은 사와 접목되어 계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은사 중에 제일 큰 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여기에 우 리의 위로가 있고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의 은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그것에 대해 얼마만큼의 지면을 할애했 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 2장에는 여러 은사를 조금씩 설명했는데, 사랑의 은사를 설명하는 데는 13장 전체를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은사 전체에 대한 관점이 명확해지지 않습니까 13장에서 사랑의 은사에 대해 충분히 설명한 다음 14장에서 다시 방언 이야기를 합니다. 14 장 전체가 거의 방언과 예언에 대한 언급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를 쓴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문제에 대해 바른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함입 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외국인들이 수없 이 드나드는 무역항이고 우상 숭배의 도시이며 향략의 도시입니 다. 지금의 홍콩이나 뉴욕 정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항구 도 시에 기독교가 전 파되니까 별의별 사람들이 다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그러 자 교회 내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 중에서 은사 문제, 특별히 방언의 은사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로 지적되기도 하는 방 언 의 은사에 대한 강조가 이 고린도 교회를 큰 혼란에 빠지게 한 것입니 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듣고서 은사에 대해 전체적으로 설명해 야 할 필요를 느껴서 고린도전 서 12장부터 그것에 대해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므로 어느 특정 은사로 교회 전체를 휘젓고 다 니면 안 된다. 몸은 하나이지만 지체는 여럿 인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종류의 은사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성령께 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쓰시므로 서로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은사 중 에 최고의 은사가 있다.'
이렇게 말하고는 13장에서 최고의 은사인 사랑에 대해 설명하고, 14장에 와서 고린도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였던 방언의 은사에 대해 자세히 다룹 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가 문제시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방언 자체는 성령께서 주신 은사이 므로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방언의 은사에 대해 오해를 하고서 그것이 최고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 에 다른 사람 들이 열등의식을 가지게 되고 무시당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는지 14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여기서 "구하라"는 말은 추적하라는 뜻입니다. 축구 선수가 공을 따라가는 것처럼 어디를 가든지 사랑을 좇아서 잡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합니다.

왜 예언을 하라고 권합니까 그 다음 절에 이유가 제시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 을 말함이니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 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 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 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2-5절).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교회의 공예배중에 하게 되면 교회 에 덕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 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마음이 청 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는 마태 복음 5장 8절 말씀을 선포했을 때 온 교회가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혼 자 방언을 해대면, 다른 사람은 알아듣지도 못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예언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덕을 세운다고 했습 니다. 여기서 덕을 "은혜"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즉, 교회에서 하나 님 의 말씀을 서로 나누면 온 교회가 알아들으니까 은혜를 받는다는 말입니 다. 방언은 되도록이면 혼자 있을 때 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는 모두 알아듣는 예언, 즉 말씀의 선포를 하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만약의 경우 회중 앞에서 방언을 하게 될 때는 어떻게 하라고 합니 까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도 록 통역을 하라고 말합니다. 5절에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통역하지 아니 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 되어 있는데, 원문에 입각해서 보면 "못 알아듣는 방언 하는 것보다는 알아듣는 말씀을 서로 전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라는 의미 로 되어 있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 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제가 만일 한국 교회에 와서 영어로 저 혼자 신나게 설교를 했다고 합시 다. 교인들 중에 몇 명이나 그 내 용을 알아듣겠습니까 영어 잘한다는 소 리는 나올지 모르지만 은혜 받았다는 말은 안 나올 것입니다. 이 렇게 못 알아듣는 방언만 말하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7절에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이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라고 합니다. 악기도 그 음이 도인지 미인지 솔인지 구분이 있어야 무슨 악기인 지 구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방언도 알아들을 수 있게 풀어 주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9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사람들이 많이 모인 데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게 되면 허공에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0,11절을 보십시오.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악기도 그 나름의 소리가 있고 짐승도 자기 노래가 있는데, 사람이 공중 앞에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하게 되면 마치 야만 인들이 떠드는 것과 같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방언에 대 해 아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12절을 보면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 라"고 합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려면 무엇을 해야 된다고 앞에서 말했습 니 까 예언입니다. 그리고 방언을 할 경우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합니다 (13절). 통역을 해 줘야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이제 몇 절 건너뛰어서 23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무식한 자들이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온 교회 가 모였을 때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 면,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나 안 믿는 사람들이 들어 와서 이 예수 믿는 사람들 미쳤구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덕이 되지 않고 은혜가 되지 않으며 불신자들에게는 구원받을 기회를 차단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됩니다.

이러한 일이 정말로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제가 한 미국인에게 복음 을 전하러 갔는데, 이 친구가 여 러 가지 질문을 메모지에 적어 놓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첫번째 질문이 "왜 예수쟁이들은 미쳤느 냐"는 것이 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하니까, 자기가 친구 따라서 교회 에 처음 가 보았는 데 아마 그 교회가 방언을 하는 교회였나 봅니다. 공개 석상에서 온 교회가 모두 방언을 막 하니까 이 친 구가 정신을 못차린 것입 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교회에 안 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 사 람들은 왜 그렇게 뛰고 소리 지르고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느냐고 묻는 것입 니다.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신앙의 형제들에게 미쳤다고 하니까 제 기분이 착잡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네 안 믿는 사람들도 미친 것은 마찬가지 아니오" 그랬더니 자기네 가 무엇에 미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미식 축구 시합 하는 것을 보니까 조그마한 가죽에 바람 집어넣은 공 하나를 골대에 넣었다고 모 두들 막 웃통을 벗고 야단 법석하던데, TV 소리를 꺼 놓고 화면만 보면 미 친 사람들 같더군요"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미치나 축구장에서 미 치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했더니 그 친구가 그건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는 접어두고 넘어갔 습니다.

결국 그 친구가 나중에 예수님을 믿게 되긴 했지만, 처음에 교회에 가서 사람들이 방언하는 모습을 보았 을 때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 사람들 이 미쳤구나 하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방언은 자신에게는 은 혜가 되지 만 다른 사람에게는 덕이 안 되므로 사람들이 모였을 때는 하지 말라는 이 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2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 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 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언제든지 이웃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 므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할 때도 나 혼자 무아지경에 빠지지 말고 온 교회에 은혜 를 끼치도록 처 신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27절에 보면 "만일 누가 방언 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多不過) 세 사람이 차서(次序)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방언을 할 경우가 있 으 면 두 명 내지 많으면 세 명 정도 하되, 반드시 통역하는 사람이 통역을 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28 절에서는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없으 면 방언을 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교 회 전체에 덕이 될 것입니다.

이제 3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 라." 이것은 방언을 하다가도 혹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계시(알아들 을 수 있는 말씀)를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방언을 멈추고 그 사람에게 하 나님의 말씀을 말하도록 하라는 의미입니다. 즉, 많은 사람이 모였 을 때는 가능하면 회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을 우선으로 전하라는 뜻입니다. 31 절에 보면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 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고 합니다. 교회에서 무엇을 하든지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질서 있게 순차적으로 함으로써 온 교 회에 은 혜가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33절에 보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평화의 하나 님이시 므로, 우리가 받은 모든 은사들, 특별히 방언의 은사도 적절하게 사용해서 서로서로에게 덕이 되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교회에 모여서 통성 기도를 한다고 합시다. 교인들 중에는 아마 방 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분들에게 주신 은 사니까 방언의 은사 자체는 좋습니다. 그런데 통성 기도를 할 때 계속 방언 을 하면 이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이상한 소리가 계속 들리니까 전혀 은 혜가 안 됩니다.
못 알아듣는 방언이 옆에서 막 쏟아져나오니까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러 니까 방언의 은사를 사용할 때 는 통역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두 사람에서 세 사람이 차례대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온 방언에 대한 사도 바울의 지침은, 방언은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인데 방언을 말하면 그 사람 개인에게만 은혜가 되니까 혼자 기도할 때 사용하고, 통역이 없을 때는 사람들 앞에서 방언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 다. 그리고 통역이 있을 경우에는 두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서 하라고 말합 니다. 아주 적절 한 지침입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12-14장의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2장에서는 은사의 내용을 설명하다가 끝 부분에서 제일 큰 은사가 제시됩니다. 바로 사랑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13장에서 그 은사에 대해 설명하고, 고린도 교회에 큰 문제로 지적된 방언의 은사 문제에 대한 지침을 14장에서 설명합니다. 그 지침은 무엇입니까 모든 은사는 남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 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는 나에게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 람을 세우는 데 소용될 수 있는 것은 통역하는 자가 있을 때입니다. 그러므 로 사람들이 다 모인 데서는 가능하면 방언을 하지 말고 서로 은혜가 되는, 알아듣는 말씀을 선포하라고 합니다. 이 지침이 당신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 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에게 무엇보다도 사랑의 은사를 구하라고 하는 주 의 음성을 듣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은혜가 되게 행하게 하시고, 우리가 가진 은사가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목적대로 쓰이도록 우리 모두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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