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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수아 (수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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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과 자녀다운 것은 의미상으로 큰 차이가 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서 추방되는 일은 없고, 천국이 취소되는 일은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마땅한 수준에 이르기 위하여 맨 처음 알아야 할 것과 맨 처음 가져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오늘 본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할 구절은 6절이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여호수아가 담대하라는 위로를 필요로 했던 겁장이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 수 도 있다. 그래서 이 시간 신앙생활에 관한 말씀을 전하면서 여호수아를 예로 드는 것이다. 그가 분명히 담대하고 강한 사람으로부터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가 그를 담대하고 강한 자로 알고 있는 것은 그의 말년의 결과 때문이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수행한 전투를 모두 지휘한다. 모든 일을 끝내고 죽음이 임박해서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한다.
“나와 내 백성은 여호와를 섬기겠다. 너희들은 어찌하겠는가”
이 질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도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는 결심을 하게끔 만든 장렬하고도 강하기 그지없는 사람으로 우리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우리가 여호수아를 생각할 때마다 이런 부분의 결론들로 말미암아 이 사람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습성이 있다.
성경에서 위인이 생기면 우리는 그가 무엇인가 우리와는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스스로 분발할 요소와 일을 수행할 능력을 천성적으로 가졌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여호수아라고 하면 그가 천성적으로 장군이고 담대하고 강한 신앙이 있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믿어 버린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성장을 방해하는 최고의 약점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여호수아를 평가절하 하려고 한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 편 모압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느니라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 34:5-7)”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 1:1-2)”
결국 신명기 34:12 이하와 여호수아 1:1 사이에는 여호수아 당황하고 떨며 어쩔 수 없었다는 말씀이 빠져있는 것이다. 그 증거가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하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씀이다.
여호수아는 장군이 아니라 부관이다. 모세라는 위인 밑에서 잔 심부름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모세는 종종 산에 올라가곤 했다. 하나님을 만나고 명령을 받고 내려온다. 올라가는 사실만 알지 언제 내려오는지는 그가 내려와야만 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40일간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종종 올라갔다 내려오곤 했다. 이번에 올라갈 때도 그렇게 오르내리는 하나의 사건으로 밖에는 기억되지 않았고 죽을 것이라고는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모세가 120세였지만 기력도 쇠하지 않았고 눈도 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단강 앞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가실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도 안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명령을 내리신다. “모세는 죽었다. 이제는 네가 대장이다”
이땅에 사는 사람중 모세 다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잘 아는 사람은 여호수아이다. 그는 모세의 시종으로 이 백성이 얼마나 모세를 괴롭혔는지 잘 알았던 사람이다. 이 임무를 알자 여호수아는 자기가 누군인지를 아는 것과 동시에 주어진 임무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아는 까닭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에 하시는 말씀이 “강하라. 담대하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에서부터 출발시키는가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여호수아가 담대한 능력과 소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는 이 지극히 당연한 예를 바라봄으로써 오늘 우리가 가지고있는 좌절감을 버려야 된다.
세상에 약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강하라!” 누가 그렇게 명령한다고 해서 우리가 강해질 수 있는가 하나님이 강하게 해주심으로만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이란 내가 소원한 것이 이루어질 근거에 대하여 가져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질 것을 내가 믿는 것은 이것을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은 그는 전능하시며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이유요, 믿음의 근거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향하여 “너는 지극히 담대하라. 강하라” 말했을 때는 그 ‘강하고 담대함’이 여호수아의 것이 되기 위한 조건이 이미 전제된 약속이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것을 다 주겠다. 그러므로 너는 담대하라(수 1:3)”
분명히 하나님은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주시겠다고 하였다. 왜일까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 5:13-15)”
발바닥으로 밟는 것을 주겠다고 하시고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다. 여리고 성 싸움을 앞두고 떨어지는 명령이다. 그래서 5장의 여리고성 사건도 발바닥 사건의 결과이다. 그리고 지금 1장 사건은 그 다음에 일어나는 요단강 사건의 전초전이다.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수 3:15-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곳으로 도로 넘쳐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더라(수 4:18)”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맨발바닥으로 다니는 사람은 종 밖에 없다. 모든 자유인은 신발을 신는다. 그러나 여호수아 1,3,4,5장은 모두 발바닥 사건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날 때 하나님은 “모세야 네 선 땅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였다. 네가 선 곳이 ‘거룩한 곳’이라는 것은 땅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지휘권을 쥔 ‘통치권자’ 앞에서의 졸병이라는 뜻이다. 여호수아 사건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죄인의 자리에서 그분으로 인하여 축복된 자리로 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고백이며 하나님의 요구조건이다. 모든 신자의 최고의 약점은 그가 축복을 얻고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로 만족하고 있을 뿐 하나님의 종으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신자란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군사들이다. 그가 계급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이다. 명령 하나에 그들의 인생과 삶을 맡겨버린 자라는 표현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을 무엇으로 쓰고 싶으신가, 그것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져본 일이 있는가 우리의 최고의 관심사는 내가 가진 계획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힘을 빌려 쓸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어떤 임무를 맡기시려고 나를 이 민족, 이 시대, 이 지점에 태어나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일이 있는가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을 영광 속에서 할지, 고통 속에서 할지 몰라도 나는 이일 때문에 내 인생이 보람있다는 사실 하나를 간증하기 위하여 우리는 존재하는 자일 뿐이다. 나는 설교자로서 부족함 때문에 늘 몸부림치지만 “저는하나님 편입니다.”라고 아우성을 칠 수있는 이 맛이 그 부족과 좌절로부터 구출한다. 발바닥, 그것이 신앙성숙의 필수적인 도약지점이다. 그 도약지점을 가지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명령이다. 신자의 거대한 착각은 ‘내가 만들어 놓은 인생에 하나님을 동반자로 부른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생애를 위하여 나를 출생케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을 하리이까”하는 것을 물어보자. 그것을 질문하는 그 의식, 그 각성이 요청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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