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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안을 꿈꾸는 신앙 (창 03:6)

첨부 1


인류가 타락하던 때의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시는 선악과, 영어 성경에는 선악과라 되어있지 않고 'tree of knowledge' 즉 ‘지식의 나무’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고 타락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범죄한 인간이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이 무엇이냐 하면 무화과 나무로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죄 지은 인간의 첫 번째 동작이 치마를 해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상에 나타난 첫 번째 패션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로 만들어 입은 치마를 벗기시고 하나님이 직접 옷을 해 입히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는 옷 두벌이 나오게 됩니다. 21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왜 하나님이 무화과나무 치마를 벗기시고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을까요 무화과나무 치마와 가죽옷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인간이 범죄 하자마자 첫 번째 동작으로서 지어 입은 무화과 나뭇잎 치마는 인간이 만든 종교, 인간이 만든 도덕, 인간이 만든 이데오르기, 인간이 만든 체제를 말합니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 입은 것입니다. 그것은 낡아지고 부스러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어떤 주의, 체제도 완전한 것은 없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①공산주의
노동자, 농민에게 희망을 준다며 공산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무화과 나뭇잎 치마를 해 입었는데 100년이 못되어 낡아서 벗어버리게 되었습니다.
②자본주의
자본주의라는 치마 역시 약육강식 원리에 의하여 많은 모순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낡아서 못 입게 되어 갑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 도덕, 문화를 하나님이 인간이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 속에서 나온 것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벗기시고 하나님이 스스로 만드신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그러면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와 가죽옷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만든 옷과 하나님이 만든 옷 사이에 무슨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9:22이 그 해답을 가르쳐 줍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 받을 수 있는 것은 다시 말해서 개인이나 인류 공동체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은 피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피 흘리는 사건, 누군가가 피 흘리지 않으면 죄사함이 없다는 이 본문으로서 창세기 3장의 두벌의 옷을 해석하면 범죄한 인간이 스스로 지어 입은 무화과 나무 치마에는 피흘림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지어 입히신 가죽옷에는 짐승이 희생제물로 피흘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짐승인가가 아담과 하와를 옷 입히기 위하여 피 흘려 죽은 그 희생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해 주는 그림자입니다. 그런 해석을 전제로 두고 창세기 4장에 들어가겠습니다. 창세기 4장은 아담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뒤의 사건입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창 4:1-2)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뒤의 첫 번째 기록은 자식을 낳는 일부터 시작됩니다. 가인 맏아들을 낳고 아벨 둘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직업, 아벨은 목축업에 종사했습니다. 두 형제가 다 평소에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는 ‘피 흘리는 제사가 있어야 되느니라’ 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 하셨으나”(창 4:3-4)
맏아들 가인은 농사하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수확한 농산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동생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치는 양 중에 한 마리를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형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형이 이 문제로 화가 나서 동생을 죽이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경 상에 첫 번째 살인사건이 하나님을 누가 더 잘 섬기느냐 이 문제를 가지고 형이 동생을 죽인 사건입니다. 종교적인 시기, 갈등, 투쟁에서 살인사건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과 싸움 중에 가장 잔인한 것이 종교전쟁입니다. 누가 신 앞에 더 잘 섬기느냐 어느 쪽 신이 진짜 신이냐 이런 종교문제로 싸움이 일어나면 가장 잔인해지고 그칠 줄을 모릅니다. 자, 여기서 형이 동생을 죽입니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 4:8)
문제는 뭡니까 왜 하나님께서 동생 제물은 받아주시고 형 제물은 받아주지 않았느냐 왜 그걸 인해서 살인사건이 나게 되었느냐 형이 동생을 죽이는 사건이 나게 되었느냐 그 이유가 뭐냐 거기에 대하여 신약에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성경을 해석할 때 신약과 구약, 전체 속에서 해석을 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 11:4)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예물, 즉 제물 탓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제물이냐 동생은 피를 흘리는 제물이었는데 형은 농산물로 드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합니다. 형은 농사짓는 사람이니까 정성껏 농산물로 드렸고 동생은 양치는 사람이니까 양으로 드렸는데 거기에 하자가 있을 턱이 없는데 동생 제물은 받으시고 형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제물 탓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9:22의 지적처럼 피흘림이 없는 제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 전체를 두고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형은 자기 의로서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자기가 농사 짓는 사람이라는 것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제물과 구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오는 것이지 사람의 방법으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의 그러한 태도는 이스라엘 전체가 그러한 태도로 심판 받은 배경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롬 10:1)
사도 바울이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뜨거운 심정을 토로합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어떻습니까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좇는 열심은 대단합니다. 십일조, 금식, 구제 등 하나님 앞에 굉장한 열심이 있는데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구원의 조건을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열심, 인간적인 동기와 열심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창세기 3장으로 말하면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입고 나왔습니다. 가죽옷을 입고 나왔어야 하는데, 제사로 말하면 아벨의 제사로 나왔어야 하는데 가인의 제사로 나왔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하나님의 방법이 통하는 것이지 자기 방법을 가지고 하나님의 방법과 대치시키려는 것은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 4장 그 다음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9-10)
이 본문을 대단히 중요하게 세계 역사에다 확대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에 대하여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그렇게 물으셨을 때에 가인이 “내가 내 동생 지키는 자입니까 내가 알게 뭡니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네가 죽여서 흘린 동생의 피가 땅에 스며들어서 땅이 오염되어 그 핏소리가 나에게 호소한다. 피값을 갚아달라고 그런다.”
그래서 긴 안목으로 역사라는 것은 뭐냐 가해자 가인과 피해자 아벨의 핏소리와의 싸움이다. 제국주의와 피압박민족, 가진 사람의 횡포와 가지지 못한 사람의 한과 눈물, 이 모든 세계사의 갈등을 가인과 아벨로 말을 합니다. 그것을 가장 사회과학적 인식으로서 극단적으로 이해한 것이 칼 막스의 계급투쟁이론입니다.
브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갈등, 이것은 곧 가인과 아벨의 싸움이다.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우리 자본주의는 도덕성을 잃어버리면 가인의 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아벨의 핏소리라고 생겨났는데 거기에 하나님 없는 공산주의가 되었기 때문에 잔인한 복수의 핏소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인류의 구원은 어디서 옵니까 가인의 후손에서 인류의 구원이 일어나느냐 아벨의 복수해달라고 부르짖는 아벨의 핏소리에서 인류의 구원이 일어나느냐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 3의 방법을 통해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 3의 아들입니다. 첫 번째 아들 가인, 두 번째 아들 아벨이 아닌 제 3의 아들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신앙을 이해하는 중요한 하나의 발상이 됩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 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5-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후손은 가인의 후손도 아니고 아벨의 후손도 아니고 셋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누구를 통해서 태어나셨습니까 성경에 예수님의 족보가 두 군데 나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는 아브라함 때부터 요셉까지 내려오는 족보입니다. 두 번째 족보는 누가복음 3장에 있는데 예수님, 요셉에서부터 올라가는 족보입니다.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눅 3:37-38)
누가 빠졌습니까 가인이 있어야 하는데 가인은 빠져 버렸습니다. 가인이 그 뒤 아들을 안 낳은 것 아닙니다. 아주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족보에는 가인이 빠져 버립니다. 물론 아벨도 빠졌습니다. 제 3의 아들의 핏줄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본문에 들어가겠습니다. 출애굽기 2장입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 2:23)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이 고통 중에서 하늘에 부르짖었습니다. 고난 중에서의 부르짖음, 이것이 구원의 전제조건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의 구조가 백성들의 고난의 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펴십니다.
이 말은 땅에서 사람의 부르짖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구원도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역사의 전제조건이 땅에서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리에서 부르짖느냐 종살이에서, 고난에서 부르짖습니다. 고난이 없는 백성은 부르짖음이 없습니다. 영적으로는 위기입니다.
일본과 한국의 영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은 국민소득이 2만 불이 되어 버렸으니까 부르짖을 게 없습니다. 웬만한 건 동장한테 가서 부르짖으면 다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복지체제도 정치도 통일도 이루지 못하고 더욱이 요즘 경제가 어려우니까 그 어려움 중에 부르짖으니까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올라갑니다.
부르짖음에 응답하셔서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그러니까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민족적으로 안정이 안되고 어려운 것이 영적으로는 구원의 마당이 됩니다. 그러니까 섣불리 경제적으로 발전해 버리면 영적으로는 곤란해집니다. 어떤 영적인 구원역사가 궤도에 오르기 전에 경제가 먼저 발전해 버리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 국가적으로 일어나는 경제적 어려움을 영적으로는 바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오천 년을 다지셨는데 이 한 단계 더 다지셔서 영적인 준비가 되면 그 다음에는 정치도 경제도 뻗어가게 하시겠구나’ 이렇게 이해를 하면 느긋해집니다. 어려우면 하나님이 부르짖으라는 거구나. 내가 부르짖어서 그 응답으로 우리 가정이 탄탄해지면 하나님이 붙들어 주신 가정이구나. 믿음에 확고하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없이 사업만 성장해 버리면 하나님 앞에 안 부르짖어도 잘 돌아가니까 영적으로는 심각해집니다.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었습니다.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그 부르짖음의 응답으로 누구를 보냈습니까 모세입니다. 모세는 고난 중에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서 자기 동족에게로 갔습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영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이걸 생각해야 합니다. 모세가 동족에게로 갔습니다. 바로 왕에게 종살이하는 백성들에게 가서 모세가 할 수 있는 것은 상식적으로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첫째는 바로 왕을 타도하자! 우리로 말하면 민주화운동, 독재타도운동입니다. 군정종식도 되고 민주화운동도 됩니다. 반체제운동입니다. 모세가 그걸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그 방법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바로 왕의 탄압 밑에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찾아가서 ‘참고 삽시다. 아무리 압박을 받고 사람 대접을 못 받아도 예수 믿고 살다가 죽어 천당 갑시다. 바로 왕은 저러지만 죽으면 지옥 갑니다. 우리는 아무리 고생해도 죽으면 천당 갑니다.’ 그 영혼을 위로하고 영혼문제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종살이하는 상황은 그냥 놔두고 영혼구원 받아 천국 갑시다. 그렇게 영혼을 길들이는 신앙입니다.
그것을 칼막스 같은 사람은 민중을 길들이는 아편이라고 했습니다. 보수주의라는 이름으로 아편역할을 합니다. 군사지배가 와도, 무슨 독재가 와도 영적으로만 살면 된다. 기도하고 방언하고 신령한 축복 누리다가 천국가면 되는 것이지 신경쓸 것 없다.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아니면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바로 왕을 타도해야 한다. 그쪽으로 나가기 쉽습니다. 모세는 두 방법 중에 어느 방법을 선택했느냐 어느 방법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제 3의 방법입니다. 애굽 왕궁의 어떤 종교도, 어떤 철학도, 어떤 도덕가도 생각해 내지 못한 방법입니다.
왜 그러냐 위로부터 임한 방법입니다. 케리그마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게 뭡니까 제 3의 길, 대안입니다. 그래서 오늘 오늘 제목을 정하자면 대안을 주는 신앙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입니다.
애굽 땅 밖에 있는 제 3의 땅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미래의 땅입니다. 제 3의 땅입니다. 기업을 하든, 학문을 하든, 목회를 하든 크리스챤은 어느 시대나 대안을 꿈꾸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대안이 뭐냐 한국경제가 어렵다고만 하지 말고 대안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남한의 자본주의가 심각하다. 북한의 공산주의가 망하게 되었다. 21세기 우리 민족의 대안은 무엇입니까
자본주의의 약점도 보완하고 공산주의의 어리석음도 넘어서는 대안이 뭡니까 그것은 가인이 아니고 아벨이 아니고 셋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입히신 가죽옷. 그것이 우리 시대에 뭐냐 그걸 일컬어 복음입니다.
우리 신앙이 내가 병 낫고 내가 복 받고 내 기업 잘되자 그 한계를 극복해야 합니다. 내 기업도 내 학문도 내 가정도 이 시대에 대안을 꿈꿀 수 있는 영적인 상상력과 스케일과 폭 넓은 시야를 가질 때 내 기업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이 백성들에게 빛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문제에 빠져 밤낮 내 사업 지켜 주옵소서. 나는 절대로 건강해야 합니다. 병 고쳐 주시옵소서. 맨날 그렇게 하고 살면 맨날 초신자입니다.
결론으로 제가 책 한 권을 소개하겠습니다. 꼭 여러분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근래에 나온 일본 소설 중에 ‘제국의 아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소설 명치유신’이라는 책으로 나왔었습니다만 이번에 다른 제목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일본의 작가 시바노따로가 명치유신을 소설화했습니다. 이 책은 7권까지 나와 있습니다.
주인공이 사까모도 로마입니다. 명치유신을 성공시키고 33세에 암살 당했습니다. 사까모도 로마가 없었으면 명치유신이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혁명세력과 수구세력간에 피비린내 나는 혁명전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틈을 서구열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양쪽에다 무기를 대주면서 양쪽이 다 망하면 인도의 경우처럼 식민지화하려고 하던 때입니다.
그때에 혁명전쟁이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까모도 로마는 하급 사무라이 가정에서 태어나서 미천한 신분에서 일으켜서 혁명세력의 중심멤버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혁명세력과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혁명세력도 수구세력도 새로운 일본을 건설하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 다 같은 점이 있다. 뭐냐 다 일본국민이다. 모두는 적이 아니다. 적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일본을 건설하는 동지라고 생각해봐라. 그러면 싸울 필요 없지 않느냐
그래서 먼저 혁명세력, 자기 편을 설득을 하고 그 다음에 자기의 적인 보수세력, 막후세력의 적진에 들어가서 하루 아침에 총 한방 쏘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수많은 불나비 같은 혁명가들이 있었지만 무혈혁명인 명치유신을 성공시켰습니다.
이게 제 3의 길, 대안을 찾는 발상입니다. 우리 시대의 크리스챤들은 그런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너 죽고 나 살자. 이게 아닙니다. 같이 살자. 어떻게 하면 같이 사느냐 길이 있다. 가인이다, 아벨이다 이걸 넘어서서 구원의 길, 제 3의 길을 찾으면 됩니다. 모든 사람은 다 구원이 필요합니다. 보수주의자도 혁명세력도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혁명정부의 조각을 하는데 자기 동료들 다 대신들 주고 자기는 동장 하나 맡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발표를 하니까 너는 자리가 없지 않냐 하니까 나는 새로운 일본을 위해서 무역 상선대를 만들어서 세계 무역을 일으키겠다. 벌써 그 시대에 세계 무역을 꿈꾸었습니다. 그 말한지 며칠 뒤에 자객의 손에 의해 죽었습니다.
사까모도 로마,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생각해낸 제 3의 길을 뜻을 이루고 죽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지혜, 위로부터 오는 지혜, 케리그마에 붙들린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이편 저편 매이는 소인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제 3의 길을 말씀 속에서 내 삶 속에서 이 시대에 우리 민족이 함께 번영할 수 있도록 찾아야 합니다. 그게 뭡니까 가나안의 땅의 메세지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 땅, 그 대안의 땅을 백성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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