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령세례, 어떻게 받을 것인가? (엡 03:17-19)

첨부 1


기독교는 성경이 약속한 것을 설명하는 종교이다. 우리가 체험한 것들은 성경이 약속하고 설명하는 것들 중에서 극히 일부분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문제를 경험하거나 체험하게 되면 성경으로 다시 와서 내가 체험한 부분이 성경에서 약속한 것 중에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또한 그 체험으로 나머지 체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도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못박힌 손을 만져본 적이 없지만 도마가 만져본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져본 셈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에 조심해야 되는 것은 성경의 약속들에 대하여 나의 수준, 내가 아는 것, 내 상상력을 기준으로 하여 성경 말씀을 제한하려는 무지와 오류가 있다. 또 다른 하나의 오류로서 자기 체험만을 중심으로 놓고서 그 나머지 것들을 제거해 버리는 극단적인 미련한 방법이 있다. 성령세례에 대해서 하나님의 약속들과 권고하심을 근거로 해서 어떻게 그 은혜와 약속들을 소유할 것인가를 살펴보려 한다. 또 이런 과정 속에서 근본적으로 정리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자.
성령세례가 하나님의 약속이고 신비스러운 체험이기에 신자들의 갈급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큰 축복이기 때문에 가장 큰 시험에 빠질 오류가 있다.
첫번째 오류는 성령세례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제나 믿고 구하면 당장 내가 구한대로 내 손에 결과가 쥐어진다는 식의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러나 바로 믿으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으로 자신이 받지 못했음에도 받은 것으로 간주하여, 감격을 주체할 수 없어 하는 사람 중에 오히려 자기보다 믿음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그것을 받았다고 외적으로 흥분하는 것에 대해 오히려 잘못된 것으로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분명히 성경이 약속한 특별한 하나님의 간섭이며, 특별한 체험이며, 놀랄만한 것이며, 외적으로 나타날만큼 강렬한 것이다. 내가 원인을 만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결과가 나에게 있기에 그 결과가 “나로 말미암지 않았다”라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단어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 선물이라는 것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회개하면 그것이 공식이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세이고, 우리는 회개할 것 투성이인 자들이다. 그렇지만 그 자세를 선하게 보시사 허락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축복을 명령하거나 요구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 그분만이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허락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위험은 ‘안수’라는 방법을 통해서 성령세례(부어주심)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안수하는 자가 준다는 표현이 아니라 이 일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하늘로부터 허락된 것이라는 표현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설교만 하고 안수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 성령의 임함을 보고 물 세례를 베풀었을 따름이다. 성령은 자기 힘으로, 자기 뜻대로 내려오시는 분이지 누구에 의하여서나, 요구에 의하여 오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주신 것이요, 보냈다는 것이며 우리는 받아야 할 것이지 내가 가서 달라고 하고 빼앗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
첫째, 우리는 항상 약속과 목표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능력과 체험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분에 대하여 인격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 성령의 부어주심을 원하는 그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늘 확인해 보아야 한다.
둘째, 이것과 양립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성령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죄와 죄들로부터 거룩케 되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양립될 수 없는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자신’ ‘자아’이다. 내가 주인이 되는것, 그것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셋째, 기도하여야 한다.
기도한다는 것은 인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큰 상징이다. 기도는 인과율의 방법으로써 동원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우리 자신도 모르게 결과시키고 있다. 우리는 기도로써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소원을 아뢸 뿐이지, 우리의 것을 요구하고 강요할 권리가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과 성품과 뜻에 우리 자신을 점점 맞추어 나가기 위해 애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확인되는 것은 내가 구할만한 자격이 없고 또한 그것을 얻을 만한 자격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할 것이다. 기도하면서 생각할 것 중의 하나는 이 당연한 약속을 내가 받지 못하는 이유가 혹시 아직도 내가 양립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포기하고 버려야 될 옛사람을 아직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전심전력하여야 한다.
전심전력이라는 말 속에는 정열을 다하라는 것 뿐만 아니라 인내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이것을 얻기까지 포기해서는 안된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구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이는 얻기까지 강청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것이 얼마나 강렬한 묘사인가를 알아야 한다. “구하는 것”은 처음에 자기가 필요한 것을 아는 때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모습이다. “찾으라”이것은 비슷한 위치를 잡은 것으로 이 근처 어디겠다 하며 대강 위치를 잡은 것이며 “두드리라”는 것은 바로 그 자리까지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성령의 부어주심이 우리의 가장 소중한, 절실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찾기까지 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완전한 복종과 하나님과 그의 사랑을 알려는 열망과 그의 사랑으로 채워지고 그의 종이 되고 그의 영광을 따라서 살려는 소원으로 이 일을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이며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욕구로 자리잡아야 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긴장시키며 하나님의 약속과 그 오묘하신 영광 앞에서 자신을 조명하며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며 진지한 기도로 무릎꿇는 아름다운 기초가 확인되어야 한다.

-25-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