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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일 (막 0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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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브르의 곤충기에 보면 장수 하늘소는 지푸라기같은 어린시절, 떡갈나무 숲으로 파고 듭니다. 3년동안 그 안에서 자란 그는 마침내 수피 속으로 기어 들어 갑니다. 하늘 아래서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장수 하늘소의 사활은 그뒤에 판가름이 납니다.방향을 옳게 잡아 나무껍질을 벗어나면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잘못 잡아 나무 한복판으로 기어 들어가면 생명을얻지 못합니다. 그 장수 하늘소의 삶과 죽음은 우리에게 방향과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 줍니다.
비명과 절규뿐인 이 시대의 벼랑에서 존재와 부재사이를 넘나들면서 인간답게 사는것이 무엇인가를탐구하는것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그것은 밥을 먹는 일보다도 집을짓고 의복을 입는 일보다도 더 절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무감각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인생의 참으로 중요한 그 무엇인가를 자꾸만 잃어가며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우리 삶의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의 난맥상은 우리 생의 공통 분모를 구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직시할 수 있는 현실의 정황이라면 우리는 과연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발딛고 사는 세상에 희망을 주기 위한 몸부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서로 믿고 살아 갈만한 골격을 세워주는 새로운 질서가 요구 됩니다.
바로 그 요구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오늘의 우리를 참으로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인간의 더럽고 추한 죄악의 쓰레기를 처리해 주는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 수 있는 성령의 역사의 현장을 만드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반면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우리의 삶의 모든 방편은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믿음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믿음은 나태가 아닙니다. 믿음은 부속품도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생활이고 전부여야 합니다.그러기에 적극적인 믿음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본문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시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인 마가복음 2장 1절에서 12절까지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우리 주님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초기의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님이 거기 계시다는 소식을 들은 각처의 사람들은 구름떼같이 몰려와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로부터 하늘나라의 복된 소식을 듣기 위하여, 어떤이들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어떤 이들은 주님의 기적 행하시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 위하여 몰려왔습니다. 그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심지어는 문앞까지 용신할 수 없도록 빼곡히 들어 찼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중에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이미 뇌는 감각기관을 잃었습니다. 수족은 명령을 수행할 힘을 상실했습니다. 몸의 반쪽은 움직일 수 없는 통나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살아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식물성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마저 비감에 젖게하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딱한 정경을 보다 못한 네사람의 친구들이 그 중풍병자를 주님앞으로 운반할것을 작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물인간이라도 주님께 가기만 하면 곧 정상을 되찾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께 데리고 가기만 하면 분명히 낳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의 친구를 메고 주님이 계시는 집에 당도하였을 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침상채 메고 온 중풍병자를 도저히 주님 앞으로 데리고 갈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요구로 하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만이 특권을 누릴 이유도 방법도 없었습니다.
이럴때 우리들의 믿음은 쉽게 낙심해 버리고 맙니다. 믿음은 있는데 현실이 용납지 않으니 어쩔 수없다는 핑계입니다. 이런 마음은 믿음의 마음이 아닙니다.
이제 중풍병자된 친구를 메고 온 네사람의 믿음을 보십시다.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 했습니다. 믿음이 보이는 것이겠습니까. 믿음은 보일 수 있게 해야 합니까. 믿음은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나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주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눈에만 보일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에도 보여야 합니다. 말로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생각으로만 가지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약속하거나 맹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눈에 보이는 믿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의 눈에도 보이게 하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 이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불가능을 불가능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출발은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이나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면 그것은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겨자씨만한 믿음도 태산을 옮깁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계산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매우 얄팍한 것이어서 마음속에 계산이 들어오면 곧 믿음은떠나버리고 맙니다. 이 네사람의 친구들을 보십시요. 그들은 중풍병자를 메고 지붕으로 올라 갔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방향이 달랐습니다. 병자를 고치려면 방으로 대리고 가야합니다. 지붕으로 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은 이 중풍병자를 주님앞으로 데리고 가기 위하여서는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떤 것이든지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외딴 마을에 술집이 하나 생겼다. 조용하던 마을에 술꾼들이 모이고 밤늦도록 어찌나 떠들어 대는지 인근 교회에서는 특히 주일 저녁 예배에 큰 지장이 되었다.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그 술집을 불태워 버리시든지 어떻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느 수요일 저녁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데 교인들이 한참 기도하는 중 마침 그 술집에 벼락이 떨어져 순식간에 온 집이 다 타 버리고 만 것이었다. 술집 주인은동네 교회에서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여 재산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법원에 재판을 걸었다. 반면에 교인들은 그럴리가 없다고 변호사를 대고 맞소송을 걸었다. 얼마 동안의 심의 끝에 재판관은 아주 도전적인 결론을 내렸다. 즉 술집 주인은 기도의 능력을 확실히 믿고 있었고 반면에 소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이 이야기에 미소를 지을 것이지만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께 대한 기도에 믿음이 없을 때가 많다. 초기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불신이 있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베드로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 나올 때 교회는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가 자유로운 몸으로 그들이 모임 곳에 찾아왔을 때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그의 음성을 듣고모인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왔어요"라고 했지만 그들은 "네가 미쳤다. 그는 천사라"고 하며 믿지를 못했다. 베드로가 들어오고 나서야 보고 놀라지 않았던가! 주님은 그들의 간구에 응답하셨는데도 기도한 그들자신을 그것을 기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며 간구할 뿐 아니라 그의 응답을 깨어 기다리는 믿음을 갖자 기도가 열쇠임에도 틀림없으나 믿음이 있어야 천국의 자물쇠 구멍에 넣고 돌린다.

둘째 . 지붕을 뜯었습니다. 이것은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이 집은 남의 집입니다. 막대한 손해보상을 각오해야 합니다. 지붕을 뜯으므로 해서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게될 것입니다. 믿음의 덕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이러한 무리를 하여 주님앞으로 갔을찌라도 주님이 흔쾌히 병을 고쳐 주시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첩첩산중입니다.
믿음은 계산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려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네사람의 친구들은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의 상을 천정으로부터 주님앞으로달아 내렸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행위를 꾸중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리치시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병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영혼의 구원까지 축복해 주셨습니다.주님은 그들을 오히려 시청각 교육의 좋은 교재로 활용하셨습니다.
네 사람의 친구들은 병 고치기만을 소원하였으나 주님은 죄를 용서하고 영혼까지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습니다. 바로 이러한 일을 신뢰하고 그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일입니다.
한 마리의 사슴이 호숫가에서 물을 마시면서 물 속에 비친 자기의 그림자를 보았읍니다. 문득 나뭇가지 모양의 여러 갈래로 뻗친 자기의 뿔을 보고는 퍽 아름답게 생각했읍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기의 가느다란 다리를 보고는 자기의 뿔에 비해 너무나 아름답지 못해서 "이런 다리는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이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저기서 사자 한 마리가 자기를 잡아먹으러 달려오고 있었읍니다.
그러자 사슴은 지금까지 아름답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뿔이 나무가지쮹ㆈ걸려 가엾게도 사자의 밥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그때 불쌍한 사슴은 이렇게 한탄을 했읍니다. "나는 지금까지 욕만 하던 다리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했던 뿔 때문에 이렇게 죽게 되었구나" 어솝 이야기의 한 토막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을 앞에 놓고 판단하는 그 가치 기준이 너무나 잘못임을 일깨워 주는 교훈이 아닐 수 없읍니다.

셋째로 . 우리들은 항변하기를 믿음으로 하는 일에 처음부터 순조롭게 하실 일이지 무엇때문에 시련을 주고 고통을 받게 하느냐고 불평불만을 거침없이 털어 놓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과정이 없는 결과란 없는 것입니다. 과정은 훈련이요 연단입니다. 특히 믿음의 일에는 이것이 더욱 요구됩니다.
어떤 사람이 부산에서 활어를 차에 실어 서울로 수송합니다. 횟감으로 사용할 생선은 살아야 제값을 받습니다. 죽어버리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개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먼 거리를 수송하다보면 많이 죽어버리고 맙니다. 살아있는 생선의 수송을 위해서 별별 수단을 다 강구해 보았습니다. 바다와 똑같은 조건의 수족관을 만들기도하고 좋은 약품을 사용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허사였습니다. 그때 손벽을 칠만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생선사이에 몇마리의 생선을 잡아먹는 천적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 보니 신기하게도 생선들이 싱싱하더라는 것입니다. 물고기들이 천적에게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하여 기를 쓰고 피하다 보니 모두 살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사람 하는 말이 몇마리의 생선을 잃으므로서 더 많은 생선을 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왜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이 지붕을 뚫도록 그냥 두셨을까요. 주님은 왜 오늘날 우리의 시련을 그대로 방치해 두실까요. 주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할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얻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이러한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주님도 겟세마네에서 피땀흘려 기도하셨지만 고난의잔을 피할 아버지의 동의를 받아내지 못 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의 그 처절한 외침은 지금도 우리의 고막을 울립니다. 주님은 고난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몸이 갈갈이 찢겨졌습니다. 선지피를 몽땅 쏟으셨습니다.
속썩이는 자녀-제게 기도를 시키네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할려는 신앙
주님은 이렇게 십자가를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오직 그분만의 유일한 이름을 얻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 주님을 향한 올바른 믿음의 방향을 가지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과감하게 주님만을 향하여 전진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주님은 이 시련 뒤에서 손짓하는 무궁한 당신의 유업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기를 기다리십니다.
외식하는 신앙인과 참신앙인은 천국을 보는 눈이 매우 다르다 외식하는 자는 단지 하늘나라가 지옥보다 나은 것으로만생각한다. 그는 만일 그가 그 두곳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면, 차라리 천국을 택하겠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마치 금광이라 일컬어지는 어떤 땅을 사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그가 지닌 모든 것을 걸고 모험하기를 몹시 싫어하는 한 농부와도 같다. 그러나 만일 그가 추방당하여 쫓겨나서 광야에서 살거나, 탄갱을 파는 편을 택하든지 아니면 그 금광을 택해야만 한다면 '그때에는' 주저하지 않는다. 외식하는 신앙인은 천국을 지옥보다 좋아하나 그는 이 세상을 가장 좋아한다. 사망이 그의 얼굴을 노려볼 때, 그는 천국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죽은 후에는 천국을 누리기 원하나 그들은 살아있는 동안 천국의 마음을 지니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참된 신자는 무엇보다도 하늘나라를 소중히 여기며 항상 세상을 기꺼이 포기한다.
중풍병자와 그의 네 사람의 친구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요. 눈에 보이는 믿음 가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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