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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나의 신으로 (슥 0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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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6일에 대단원의 막을 내린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은 벌써 우리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일본 대 우리나라의 여자 배구 결승전에서 처음 두 세트를 내주는 바람에 이대로 지고 마는가보다 생각했는데 곧이어 내리 세트를 이겨서 통쾌한 역전승을 거둔 순간입니다. 정말로 큰 기쁨과 감격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승리가 확정되자 흐르는 땀을 닦지도 않고 경기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던 착한 우리의 딸들입니다 전문가들의 객관적 평가로는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한수 아래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이겼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또 기자회견을 할 때에 우리나라의 김철용 감독은 남이야 뭐라고 알아듣든 말든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방법으로 아시안 게임에서 자기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기도 밖에는 없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간증입니까 맹훈련도 했습니다, 작전조 세웠습니다, 절제도 했습니다. 그리고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정신력으로 우리가 이겼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김 감독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눈물로 간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승리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실 때에만 그 일이 가능합니다.

며칠 전에 대학능력시험이 있었습니다. 고3학생을 둔 부모들은 전부 비상에 걸리고, 온 시민이 긴장을 했었습니다. 대학능력시험, 그 말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그 어려운 코스를 4년 동안 무사히 해낼 것이냐, 그것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느냐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보았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좋아라고 친구들과 술마시고 돌아다니며 자기 멋대로인 학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졸업장은 얻지만 정말 대학 4년을 똑바로 공부해내는 학생이 몇이나 됩니까 마음의 수학능력이 없는데 졸업장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듯 이 한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다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수학능력은 무엇으로 테스트해야 됩니까 또 무엇으로 그 능력을 키워가야 하는 것입니까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한계의 범주에서 산다고 말했습니다. 거기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사간입니다. 모든 문제에서 우리는 시간을 뺄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이 시간 안에서 되어지기 때문입니나. 또 하나는 공간입니다. 아무리 날고 뛰어봐도 우리는 제한된 공간 안에 있습니다. 꼼짝하지 못합니다. 또 하나는 causality--인과율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제공되는 모든 원인 속에서 그 결과에 시달리며. 그 결과에 쫒기며 살아갑니다. 또 하나는 substance--실체입니다. 만물은 다 소멸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내가 나를 찾아야 합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죽지 않을 수 없고, 늙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이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생존하며 승리할 수 있습니까 경제적으로 돈이 많으면 될 것 같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고, 돈걱정 안하고 편안하게 살라고 자식에게 돈을 물려주려고 합니다만 그 자식은 무능하게 되고, 오렌지족이 되고 맙니다. 또 지식과 재능이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극단적인 이기주의 자가 되고 맙니다. 아무 짝에도 못쓰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치원 때부터 아이들에게 피아노, 수영, 태권도, 컴퓨터, 미술, 속셈, 무용 등 건강과 두뇌개발에 유익하다고 하는 것은 몽땅 가르치고, 먹이고, 별짓을 다합니다. 결국 어느 국민학생은 지치다 못해 유서를 써놓고 자살을 했습니다. 왜요 난감하거든요. 이대로 한 세상 산다는 것이 안되겠기에 미리 그만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정말 이래야 되는 것입니까 알 만한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사는 것입니까 그 많은 재산을 억지로 모아둔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요새 높은 지위에 올랐다가 떨어진 사람들과 만나 악수해보면 안쓰러워 못견디겠습니다. 얼굴이 다 썩었어요. 차라리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한번 잘못했다는 것 때문에 참 초라합니다. 처음부터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리차드 포스터의 [Money, Sex and Power]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영적으로 도전을 받고 있는데 오늘날 현대인은 일곱 가지의 악마적 폭력에 도전을 받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재물입니다. 이 돈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무서운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돈이라는 우상이 생겼습니다. 모두가 이 우상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알게 모르게 우상의 노예가 되고, 또 자기 스스로 우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끔 이런 경우를 봅니다. 돈 없으면 참 좋은 사람인데 돈 때문에 사람 버렸습니다. 또 제가 결혼 주례를 많이 서지 않습니까 그런데 평범한 사람들 결혼 주례할 때에는 참 좋은데, 제일 어려운 때가 부잣집 자녀의 경우입니다. 우리교회에서는 다들 똑같이 한다고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네는 특별하게 하고 싶어서 좀 안되느냐며 꽃도, 예식도 굉장하게 하려 하고, 그것 때문에 좌우간 교회 사무원까지 괴롭힙니다. 못견디겠어요. 마지막에는 제가 “정 이러면 결혼 주례 안하겠습니다.”라고 좀 심한 말까지 합니다. 그러면 본인들은 얘기합니다. “아들 하나 밖에 없는데요.” 뭘 그리 대답합니까 별것도 아닌 일에 왜 이래야 합니까 그 돈 몇 푼이 말썽입니다. 사람이 교만해졌어요. 결국은 자기도 고민이고, 남도 괴롭습니다. 이 돈 몇 푼이, 이 재물이라고 하는 우상이 그를 사로잡았어요.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아무리 돈 있고 재벌이라 해도 교역자인 제 눈에는 그런 것은 특별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별것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이 돈이라고 하는 도깨비에 홀려서 정신 못차립니다. 참 무서운 힘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또한 sex라고 하는 power가 있습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이 이 유혹에 빠지고, 알게 모르게 성폭력의 노예가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죽는지 사는지 모르고, 방탕하고 타락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종교적 율법주의 입니다. 이것이 만연되어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율법적으로 사람을 어처구니 없이 괴롭힙니다. 그래서 교만해지기도 하고 또 하나의 노예가 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네 번째는 과학주의입니다. 과학기술이라는 것이 이제는 신(神)이 되어갑니다.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려 하고. 이미 신의 존재에까지 그 위치가 올라가 있습니다. 컴퓨터는 사람이 만들었지만 이제는 컴퓨터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봅니다. 참으로 불쌍합니다. 과학주의에 시달리는 우리의 영을 누가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섯 번째는 자기중심주의, 자기 도취입니다. 이기적인 생각, 자기 중심이라고 하는 것의 노예가 되어서 아주 불쌍한 생활을 합니다. 조금만 더 마음을 열면 평안할 수 있는데, 조금만 더 생각을 넓히면 자유로울 수 있는데 모두가 문을 닫고, 이기적인 생각과 자기 도취에 빠져서 저도 고생하고, 남도 괴롭힙니다. 한 집안에 산다고 하나 서로 동숙자일 뿐, 결코 가정은 아닙니다. 왜입니까 마음문을 꼭 닫고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극단적 이기주의 이 얼마나 무서운 폭력입니까 또 하나는 군국주의입니다. 힘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힘을 숭상하는 군사력을 숭상하는 이 무서운 사상은 오늘도 여전히 세계를 엄습하고 있습니다. 일곱번 째는 절대 회의주의입니다. 안된다, 다 망한다, 모든 것은 의심스럽다, 믿을 것이 못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 또한 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끌게 합니다. 자, 이 많은 무서운 영적 도전을 어떻게 우리가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으로 대항하겠습니까 이것을 이기지 못하면 쓰러집니다. 오늘날의 세대는 이 무서운 도전 속에서 지금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스가랴서를 가리켜 ‘예언서들의 장수’ 혹은 ‘예언서의 결론’이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예언자들이 거반 여기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이나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통해서 이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다시 유대땅으로 돌아가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수축할 것을 허락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열심히 성전 기초를 다지며 눈물과 감격 속에서 성전을 다시 지으려고 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움을 거절한 것 때문에 그들이 전면적으로 핍박과 박해를 가합니다. 마침내 여러 가지 내적.외적 이유로 해서 성전 공사가 중단 되었고 그런 채로 14년이 흘러 갑니다. 이 때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재촉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먼저 지으라고 하십니다. 저들은 생각합니다. ‘돈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정치가 안정되야 하지 않느냐, 달리 무엇을 가진 게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의 집을 저렇게 놓아두고 너희들의 집을 짓고, 너희들의 성을 쌓는다면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신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것을 먼저 끝내라고 선지자를 통하여 명령하십니다. 현실은 난감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전혀 가망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맨손으로 성전을 짓습니까 뭔가 있어야 하고, 안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개의치 않으십니다. 오직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스가랴에게 여덟 가지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 중에 다섯 번째 환상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등대가 보이고, 감람나무가 보입니다. 등대는 빛이 있기 위해서는 감람기름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무엇을 보느냐92절)” 땅을 볼 것도 아니고, 정치를 볼 것도 아니고, 현실을 볼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보느냐 이제 회상을 보아야 합니다. 결정적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보아야 합니다. 또 묻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보아야 되고, 알아야 합니다. 보아야 되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무엇을 보느냐, 보는 시각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spiritual insight,영적 통찰력을 가져 야 합니다. 보다 먼 미래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현실도 밝히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그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는지, 그것이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깊은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만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 점을 가르쳐줍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그 미래를 알고, 그 깊이를 알 때에 오늘을 극복하고 오늘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주의 말씀이 다시 분명하게 들려집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6절)”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신으로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심입니다. 여기에 길이 있고, 여기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힘’이라고 라는 말은 군사력을 말합니다. 또 한 인간의 힘, 집단의 힘, 조직의 힘을 말합니다. 무릇 군사력이 있어야 하고,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힘으로 안된다고 말씀합니다. 힘을 말하자면, 힘을 숭상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공산주의자 아닙니까 제가 평양에 갔을 때에 그들이 이런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공산주의로 똘똘 뭉쳤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하나가 된 힘을 믿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한사람 한사람 만나보니까 안 그렇습니다. 생각이 다 달라요. 여러분, 군사력, 집단력, 집단화 그것이 만들어 낸 게 무었입니까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어요. 인간성은 파괴되고, 나라도, 경제도, 사회도 다 망하고 말았어요. 힘, 이 군사력의 힘이 해결의 길이 아니요, 사회문제, 정치문제, 개인문제에서도 해결의 열쇠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성경은 능으로도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능’은 ‘코아하’라고 하는데 이 말은 육체의 힘, 완력, 건강의 힘을 말합니다. 아마도 이 힘의 대표자가 삼손일 것입니다. 삼손이 얼마나 힘을 가졌습니까 그는 아무도 당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가졌습니다. samsonite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힘의 대명사로 쓰여집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마음에 나약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여자 들릴라에게 넘어갑니다. 자, 힘이 어떻다는 애기입니까 건강의 힘이 힘이 아닙니다. 영적이고, 내적인 힘이 없는 육체적 힘이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삼손은 큰 완력을 가지고도 마지막에는 머리가 깍이고 장님이 되어서 맷돌질을 하는 비참한 육체의 모습, 고깃덩어리의 모습을 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힘이 없는 육체의 힘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힘이 그대로 서 있을 수 있는 힘이 됩니까 그런고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힘으로 못한다, 능으로도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그 하나님의 힘은 곧 성령입니다. 성령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주의 약속을 믿고, 주의 구속하심을 믿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증해줍니다. 로마서 8장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명하게 계속 말씀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택한 자녀라고 성령이 획정해줍니다. 또 나아가서는 나로 하여금 정결하게 합니다. 죄를 이기고, 게으름을 이기고. 잘못됨을 이기고, 타락을 이기고, 마음 속의 비그리스도적인 것, 비신앙적인 것 들을 다 버릴 수 있도록, 이것을 가능하게 아여 성결케 하시는 영입니다. 내 생각을, 내 습관을, 내 언어를, 내 행동을 성결케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북이가 있습니다. 별로 크지 않은 거북이라 하더라도 그 거북이의 목이 안으로 들어가면 몇 사람이 들러붙어도 그 목을 잡아뺄 수가 없습니다. 그 목은 엄청난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강제로는 도저희 불가능합니다. 거북이의 두꺼운 등을 깨도 목을 빼낼 수가 없답니다. 그러나 온화한 분위기, 따뜻한 분위기, 평화스러운 부위기가 되면 거북이의 목이 절로 쑥 나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 오직 진리의 영만이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고, 사람의 성품을 바꿔놓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능력이다, 재능이다, 기술이다, 돈이다, 권력이다, 다 해봐도 안됩니다. 성경이 안된다고 말씀합니다. 역사가 안되다고 말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가능하다 하심입니다. 재력, 능력, 체력, 의지력...다 기울여도 소용없습니다. 속사람이 바로 되고, 속사람이 중생해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비로소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겸손하게 되고, 온유하게 됩니다. 특별히 모든 제도로부터, 모든 악으로부터, 모든 시험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성령은 자유하게 하는 영입니다. 또한 기쁨에 충만하게 됩니다. 기쁨과 사랑과 은혜에 충만하게 될 때에 거기에 창조적 능력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베드로를 보세요,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하면서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경험하고, 많이 배웠습니다마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만나뵙고도 그는 갈릴리로 물고기 잡으러 갑니다. 그는 자기자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제자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자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제자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성령이 임할 때에 그는 권능을 받고, 능력의 사람이 되고, 담대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큰 역사를 이루지 않습니까 그의 담력이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지식, 재력, 혹은 권력으로부터 온 것 아닙니까 힘이 능으로부터 온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오직 주의 영으로 마침내 위대한 사도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문제의 해결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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