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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누구입니까 (마 08: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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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모리츠라고 하는 젊은이가 세계 제2차 대전 때 징집을 당해서 독일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얼마를 지내고 난 후에 유대인이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 독일 정부로부터 유대인들은 학살을 당하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할 때입니다. 얼마나 핍박과 온갖 고난을 다 당했는지 눈뜨고 볼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독일 군의관을 만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이 군의관이 요한 모리츠에 대해서 전부 진찰을 하고 검사를 하더니 독일 게르만족의 순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날로부터 그는 영웅으로 높임을 받았습니다. 밑바닥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가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 할 정도로 높이 올라갔습니다.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심사관이 포로들을 하나 하나 심사해 나가는데 서류를 보니 요한 모리츠는 두 가지로 적혀 있습니다. 어떤 서류에는 유대인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고 어떤 서류에는 독일 사람 즉 게르만족의 순종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심사관이 “도대체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사람이 그 동안 사실상 얼빠진 사람처럼 멍청해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으로 핍박을 받다가 영웅으로 높임을 받으면서 내가 도대체 누구냐 라고 자문자답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심사관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 ‘도대체 나는 누구지’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는 재판을 받고 무죄 석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부모와 처자식이 그렇게 반겨주어도 전혀 기뻐할 줄을 몰랐습니다. 자기를 이미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이야기를 끝이 납니다.
이 이야기는 게올규라고 하는 사람이 25시라고 하는 제목으로 써낸 작품의 내용입니다. 하루는 24시간이 아닙니까 그런데 24시간이 지나고 25시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세계도 종말을 향해서 뛰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종말에는 인간들이 전부 자기를 상실해 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한번 자문자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하고 말입니다. 목사의 경우에는 ‘내가 목사 맞어’ 장로인 경우에는 ‘내가 장로 맞어’ 권사인 경우에는 ‘내가 권사 맞어’라고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나는 누구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훈련을 잘 받은 신자인가 (18-)

나는 훈련을 잘 받은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교인은 아닌가 한번 자문자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 아들이 논산 훈련소에 입대할 때 함께 갔었습니다. 전부 자기 친구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부모 형제들이 따라왔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있던 장병들이 “집합”이라는 호령이 들리자 전부 연병장으로 모여듭니다. 수천명이 모여드는데 훈련이 하나도 되어 있지 않기 까닭에 오합지졸입니다. 통솔이 잘 되지를 않습니다. 훈련소에 들어가면 한달이고 두달이고 철저하게 훈련을 시킵니다. 훈련을 마치고 훈련소를 떠나는 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명령 한마디에 질서정연하게 움직입니다. 담벽을 차고 나가라하면 차고 나아갑니다. 그 막강한 힘을 누가 당하겠습니까 훈련으로 강한 강군이 된 그 군대를 누가 당하겠습니까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훈련을 잘 받은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훈련이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군인이 전부 흩어져서 집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분명히 처자식을 거느린 사랑하는 남편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나이 많은 분들에게는 귀한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 전에는 어리광도 피우고 제멋대로 살고 내 좋을 대로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만 모아 놓으면 오합지졸이라 써먹을 데가 없지만 모아 놓고 훈련시키니 그렇게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정예부대가 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훈련을 잘 받은 신자인가’라는 말은 ‘훈련이 잘 되어 있습니까’라는 말입니다. 군대가 얼마나 훈련이 잘 되어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이 군대의 생명이 아닙니까 훈련을 잘 받은 군대라면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생명같이 여기고 공동체를 위해서 내가 희생할 줄도 압니다. 명령 하나에 죽고 살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입니다. 그 군대가 가는 앞길은 누구도 막을 재간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정신으로, 예수님의 생활로 완전 무장하고 훈련이 잘 된 그리스도인을 누가 당하겠습니까 일당백, 일당천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이면 모일수록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전혀 훈련이 안된 교인들은 아무리 많이 모인들 써먹을 데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훈련을 잘 받은 그리스도인인가’에 대해서 자문자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8절을 보면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을 지키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신 후에 베드로의 집에 심방을 가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얼마나 열병이 심한지 헛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고쳐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중보기도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꾸짖듯이 열병을 꾸짖으시니 열병이 나갔습니다. 열이 완전히 내렸습니다. 열병에 걸렸다가 열이 내리면 병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곧 일어나 언제 아팠었느냐는 듯이 수종을 들었습니다. 소문이 나니까 각색 병든 자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이 고쳐 주시고 또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계속 몰려드는 병자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고 밀리는데 감당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 에워쌌습니다. 전혀 훈련이 안 된 군중이었습니다. 즉 말씀으로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고, 주님 앞에 나아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병고침만 받으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합지졸들이 아닙니까 많이 모여 봐야 어디에 쓰겠습니까
주님께서 모두 바다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하시고 다 건너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뒤 따라 가셔서 일대 일 양육에 힘쓰셨습니다. 바다 건너편에 가서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 일대 일 양육을 하고 훈련을 시켰습니다. 중풍병자 하나를 네 사람에게 메어 가지고 왔는데 그 사람을 고쳐 놓고 일대 일로 양육을 합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불러서 그 집에 가서 유하면서 일대 일로 훈련을 시키고 제자로 양육을 합니다. 잘 훈련을 시켰다는 말입니다. 그네들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요, 일꾼이 되었습니까 훈련이라는 것이 이렇게 귀하다는 것입니다.

1960년도 이태리 로마에서 열렸던 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 3개를 한꺼번에 취득 한 삼관왕 아가씨가 있습니다. 윌마리를이라고 합니다. 이 아가씨는 가난한 집에 열일곱번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데 왜 그렇게 아이는 많이 낳았습니까 아이 엄마는 돈을 벌어야 되고 먹을 것이 부족하여 제대로 돌봐 주지도 못하고 먹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4살이 될 때까지 걷지를 못했습니다. 5살이 되었을 때는 의사도 치료하기를 거부할 정도의 열병에 걸렸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70Km 떨어진 곳에 유명한 의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습니다. 의사가 “앞으로 내가 시키는 대로 일주일에 한번씩만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매일 매일 어머니가 아이의 관절이 굳어지지 않도록 운동을 시키십시오. 운동을 안 하고 가만히 있었기 까닭에 근육이 뭉쳐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속적으로 맛사지를 해서 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돈을 벌러 나가겠으니 너는 죽으라고 내 버려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루 밥 세끼를 겨우 먹으며 말며 할 수밖에 없었으나 계속해서 운동을 시키고 맛사지를 해서 굳어진 근육을 풀어주었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일과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에 걸음마를 시작했습니다. 벌써 중학교에 가니까 오빠와 함께 농구를 합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달리기 선수로 발탁되었습니다. 그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 학생들만 참가하는 대회에서 메달을 땄습니다.
1960년이 되어 올림픽에 나갈 미국 대표 선수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올림픽에 출전하여 100m, 200m 4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삼관왕이 되었습니다. 걸음마도 제대로 못하고 완전히 폐인이다 싶이 했던 어린아이가 삼관왕이 되는 위대한 업적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물론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어머니가 자기의 딸을 생명같이 여기고 사력을 다해 훈련 시켜 일대 일로 양육을 하고 키워주셨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일대 일 양육, 일대 일 훈련이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과 더불어 일대 일로 만나시고 말씀으로 훈련을 받아 어디에 내 놓아도 자랑거리요, 정말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을 잘 받은 일꾼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는 훈련을 잘 받은 그리스도인인가 그렇지 않으면 천방지축으로 노는 그런 쓸모 없는 인간인가 자문자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세를 바로한 신자인가 (19-20)

여기에 칼이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칼 자체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습니다. 강도의 손에 그 칼이 잡혀지는 날에는 살 사람도 죽이고 남의 것을 빼앗습니다. 그러나 의사의 손에 그 칼이 잡혀지는 날에는 죽을 사람도 수술하여 살려내는 것입니다. 똑같은 칼인데 왜 그렇습니까 정신적인 자세가 즉 사람을 죽이려는 정신자세를 가진 사람과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정신자세를 가진 사람에게는 똑같은 칼이지만 결과는 천양지차라는 말입니다. 정신적인 자세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생활의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에 나와서 예배 드리는 자세를 보면 여러분들의 믿음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자세를 정중히 하고 이목을 집중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찬송을 불러도 뜨겁게 부른다면 알아 볼 만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팔짱을 끼고 절반쯤 돌아서서 다리를 꼬고 앉아 째려보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하나님은 외모를 안 보시고 중심을 보시지요”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배할 때 우리의 중심이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그 사람의 자세에 다 나타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시아버지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째려 볼 수 있습니까 시아버지 앞에서 못하는 일을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의 신앙의 자세가 삐딱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세가 삐딱한 사람은 남을 보아도 바로 보지 않고 삐딱하게 봅니다. 말을 해도 삐딱하게 합니다. 일을 해도 삐딱하게 합니다. 생각을 해도 삐딱하게 합니다. 자세를 바로 해야 합니다. 자세를 바로 가진 사람은 남을 보아도 바로 봅니다. 말을 해도 바로 합니다. 생각을 해도 바로 합니다. 일을 해도 바로 합니다. 자세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세를 바로 가진 그리스도인인가 자문자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9절에서 20절을 보면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한번은 서기관 한 사람이 나타나서 “주님!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에는 흠을 잡을 데가 없지 않습니까 “주님 내가 영광 받는 자리만 가겠고 주님을 위해서 밟히고 낮아져야 하는 자리는 못 가겠습니다”라고 하면 흠잡히지 않습니까 “주님 내가 성공하고 복 받는 자리에는 가지만 내가 주님을 위해서 실패해야하고, 내가 주님을 위해서 손해를 보아야 하는 그 자리에는 못 가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그런 사람을 용납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서기관은 어디든지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 말에 흠을 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래 나는 너 같은 사람을 찾고 있었노라”고 하셨어야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루 종일 들판과 산을 뛰어 다니는 여우를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그러면 밤에 들어갈 굴이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하루 종일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를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밤이면 들어가서 잠잘 거처가 있느냐” “예 있습니다” 그 때 “나는 베개 하나도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은 베개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깔고 자는 요는 말해 볼 것도 없고 덮고 잘 이불도 없고 베고 잘 베개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나는 알거지라는 말입니다. 대화가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서기관은 속으로는 아주 엉큼한 생각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감추고 말만 멋지게 한 것입니다. 주님이 그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너 같은 인간의 말에 대한 대답은 할 필요가 없다. 네 속에 대한 대답을 하리라’ 하여 그 마음에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 마음속과 말이 다른 만큼 대화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속에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품고 나오셨습니까 이 서기관은 저 예수라는 분이 이스라엘을 독립을 시키고 왕으로 등극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정치적인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내가 좀 고생이 되더라도 끝까지 또 어디든지 따라다니면서 시중을 든다면 저 분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 나는 한자리를 톡톡히 할 수 있다라는 계산을 하고 나온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 욕심을 채우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주님이 그 심보를 모르시겠습니까
주님의 대답은 너 같은 인간에게 나는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 사람은 삐딱한 믿음의 자세, 삐딱한 정신적인 자세, 삐딱한 생활의 자세를 가지고 나와 예수님을 이용해 먹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예수님께 이용을 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욕심을 채우다니요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삐딱한 자세를 갖고 아무리 믿어봐야 받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바로 믿어야 합니다. 잘 믿는 것과 바로 믿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돈을 많이 벌어 흥청거리면서 산다면 그 사람을 잘 산다고 할런지는 모르나 인생을 바로 사는 것만은 아닙니다. 큰부자가 되어 잘 살면서도 인생을 바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가난해도 바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잘 살기에 앞서 바로 살아야 되는 것처럼 우리는 잘 믿기에 앞서 바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신앙의 자세를 바로 가진 신자인지 자문자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자세를 바로 가진 사람에게 주님이 왜 줄 것이 없겠습니까 천상천하가 다 주님의 것인데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자세를 항상 바로 가지어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오늘에 충실한 신자인가 (21-22)

우리의 과거가 아무리 찬란하게 빛난다 할지라도 오늘이라고 하는 현재가 엉망인 사람은 과거의 빛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이 엉망인 사람에게는 내일 즉 미래가 절대로 약속되지 않습니다. 과거가 빛났습니까 오늘에 충실하십시오. 미래를 약속 받고 싶으십니까 오늘에 충실하십시오. 오늘이 있는 자에게 과거가 빛나고 오늘이 있는 자에게 미래가 약속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그러면 우리가 항상 오늘 오늘 하면서 오늘만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까 백년 앞을 바라보면서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렇게 ”오늘“이라는 소리만 하십니까”라고 하실 분들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백년 앞을 바라보기에 오늘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에 충실함이 없는 사람은 내일이 절대로 보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에 충실하고 있습니까

본문으로 돌아가서 21절과 22절을 보면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제자 중에 하나가 이야기합니다. 이 제자는 열두 제자가 아닌 제자입니다. 즉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좀 오래 따른 사람입니다. “주님, 저 서기관과 같은 심보를 가지면 안되지요” “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내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세상을 떠나기까지 내가 잘 모시다가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치르고 와서 그 다음에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래 저희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대화는 간단하게 끝납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두 번째 사람 즉 제자는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일을 하기는 하는데 내 가정 일이 더 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일을 먼저 다 해 놓고 그 다음에 시간이 있으면 그 때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대답하시기를 “그렇게 하라” 하셨으면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되는데 주님께서는 가정 일 보다 더 하나님의 일이 더 먼저라고 하셨습니다. 가정 일을 핑계 대고 하나님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의 식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보다 가정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가정에서 부모 형제와 함께 사는 대학교 학생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대학교 학생이 가정에 얽매여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공부가 안되고 대학교에 다닌다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가정 일은 학교 갔다 온 다음에 하고 학생이기에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제의 핵심은 우선 순위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순위를 하나님 먼저, 하나님 나라 일 먼저라고 분명히 정하고 우리가 가정 일 때문에 하나님을 등한히 하고 소홀히 하고 내일로 미루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에 충실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의 일을 위해서 오늘에 충실하십니까 주의 일을 내일로 미루면 주께 합당치 않습니다.

한번은 톨스토이에게 “선생님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제자가 물었습니다. “네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면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또 나에게 있어서 어느 때가 가장 중요한 때입니까” “네가 나와 함께 말하고 있는 이 때가, 즉 오늘이라고 하는 이 시간이 너에게는 가장 중요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제가 중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내일도 중요합니다만은 오늘이 더 중요합니다. 내일로 미루지 마시고 핑계대지 마시고 오늘에 충실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현재라고 하는 오늘에 충실하게 살고 또 믿고 있는가를 스스로 자문자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첫째로 훈련을 잘 받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전혀 훈련이 안되어 천방지축으로 노는 쓸모 없는 오합지졸은 아닌가를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나는 믿음의 자세를 바로 가진 그리스도인인가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삐딱한 자세로 30년 믿었다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 하루를 믿어도 믿음의 자세를 바로 해야 합니다. 셋째로 오늘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인가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제는 충실했으나 오늘에는 엉망이라고 한다면 어제는 의미가 없습니다. 내일을 바라본다고 하면서도 오늘을 엉망으로 살아간다면 미래가 약속되지 않습니다. 항상 현재, 오늘이라고 하는 시간에 충실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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