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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섬기려 왔노라 (마 20: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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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가 쉘 실버스타인의 작품 중에 유명한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하는 글입니다. 그 일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 소년의 집 근처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소년은 어린 시절 이 나무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그네를 매고 그네를 뛰기도 했습니다. 그 그늘에서 마냥 즐겁게 놀았습니다. 나무는 그에게 이 같은 놀이터를 제공했습니다. 그는 자라서 그네를 다시 타지 않게 되고 이제는 나무 열매를 구하게 됐습니다. 다행히도 나무는 좋은 열매를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가 청년이 되어 집에 땔감이 필요했습니다. 나무는 말했습니다. 내 가지를 베어다가 불을 때서 더웁게 하라고. 장년이 되었습니다. 돈을 벌어와야겠다고 나서면서 그에게 배가 필요했습니다. 나무는 말했습니다. 나의 몸통을 베어다가 배를 만들어서 타고 목적지로 가라고. 그러고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멀리 떠난 소년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소년이 백발이 되어서 노인의 몸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나무는 밑동만 남아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밑동에 걸터앉아 쉬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무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인간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삶의 목적을 모른다는 겁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왜 세상에 내가 존재해야 하는지 존재의 의미를 바로 모르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또 하나는 행복의 길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그처럼 원하는 행복, 그 행복을 지향하는 길이 어디 있는지를 몰라서 그저 구름을 잡듯이 행복을 찾아 몸부림치며 헤매다가 그 많은 세월이 다 흘러갔습니다.
영국 속담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하루동안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라. 일주일동안 행복하려거든 여행을 하라. 한달 동안 행복하려거든 집을 사라. 일년동안 행복하려거든 결혼을 하라. 일평생 행복하려거든 이웃을 섬기라" 했습니다. 이웃을 섬기는 것,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행복의 길이 있건만 우리는 어쩌면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마음뿐입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동안은 여러분은 영영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섬기는 마음으로 마음을 바꿀 때만이 비로소 자유할 수 있고 참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현대인은 그렇게도 불행에 시달리면서도 불행의 원인을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왜 불행한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영영 모르고 죽어갑니다. 빨리 생각을 고쳐야겠는데 현대인은 허무한 생을 삽니다. 목적도 없습니다. 가장 불행할 수밖에 없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극단적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주의의 노예가 된지 오래 됐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길에 행복이 있을 거라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영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자로 유명한 임마누엘 칸트의 "이기주의" 라고 하는 논문이 있습니다. 그는 이기주의를 아주 철학적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이 불행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첫째는 논리적 이기주의입니다. 자기의 판단은 언제나 옳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이론은 항상 옳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일이 이렇게 되고 보면 친구도 없습니다. 아무도 그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를 따라주지 않습니다. 제가 가끔 결혼식 할 때 그런 얘기까지도 합니다. "이제 결혼하지" 신랑보고 말합니다. "잘난 체 하지 마라. 또 한가지 50%는 양보해라. 네 생각만 옳은 거 아니다. 너만 잘난 거 아니다. 50%는 생각을 굽힐 생각을 하고 출발해라. 내 뜻만을 다 주장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런 건방진 생각 가지고는 절대로 이 가정이 행복할 수가 없다" 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왕따되는 사람이 누굽니까 하나같이 자기 생각만 옳다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불행의 씨앗입니다.
또 하나는 미학적 이기주의가 있다는 겁니다. 자신의 심미적 취향에 만족하고 자기 느낌을 항상 옳다고 생각해요. 자기 기분이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느끼는 감성을 절대화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거기에 또 다른 불행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도덕적 이기주의입니다. 자기자신이 모든 행동의 목적과 중심이 되고 자기에게 유익하지 않은 일은 다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옳고 그르다고 하는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준이 되어서 내게 이익이 되면 이로운 것이요 내게 해가 되면 다 악한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이런 사람은 영영 구제불능입니다. 불행에서 살다가 불행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오셨고 사셨고 죽으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올 때부터 섬기러 왔노라. 오로지 섬김을 위해 살 것이고 "대속물로 주려한다"는 말은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섬기려 왔고 섬기며 살고 섬김으로 죽었습니다. 확실하고 본래적인, 근본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대로 살았습니다. '섬긴다'는 말, 디아코니아, 그 봉사한다는 것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느새 섬김을 받는 일에 익숙하고, 유교적 문화가 늘 그렇습니다, 섬김 받는 자가 행복한 줄로 착각을 합니다. 그것이 성공이요, 그것이 높은 자리에 있는 줄로 생각하는데 아니올시다. 섬기는 곳에 행복이 있고 섬기는 자에게 확실한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올시다. 섬긴다는 것, 이것은 본래적이고 자발적이고 자원적이래야 합니다. 자발적이 아닌 것은 섬김이 아닙니다. 그리고 의도적이어야 합니다. 확실한 목적적 행위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꼭 같은 행동인데 빼앗기는 일이 있고 주는 일이 있습니다. 내 마음으로부터 주면 주는 것이고 마음이 없이 주면 빼앗기는 것입니다. 물리적 행동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요. 내 마음의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빼앗기는 것이 아니고 부득이한 것이 아니고 숙명적인 것도 아니고 또 무지함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다 알고 하는 일입니다. 그것만이 섬김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런 얘기를 합니다. 팔자라고. 그저 체념을 하고 뭐 이렇게 운명이 되었으니까 운명적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운명적으로 사는 생은 섬김이 아닙니다. 한 평생 좋은 일을 했다고 하고 수절하고 한평생 가정을 봉사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섬김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그 섬김에는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고 축복이 없는 것이올시다. 어떻게 살았느냐구요. 그게 아닙니다. 어떤 마음으로 살았느냐가 문제입니다. 진정으로 섬길 때 그 사람에게 기쁨이 있는 것이올시다.
폴 투르니에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심리학자요 그리고 의사입니다. 그 분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저도 이 분의 책을 대부분 다 가지고 있고 또 즐겨 읽는 중에 있습니다만은 그는 인간의 삶을 3단계로 간단하게 설명을 하는데 그 속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가 아동기라고 하는 어린아이 시절이 있다. 어린아이 시절에 열망하는 바는 소유올시다. 먹는 것, 가지는 것, 소유만이 행복의 기준입니다. 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그렇게 소유했을 때 좋고 자기 손에서 떠나갈 때 웁니다. 이게 아동기적인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는 청년기가 있습니다. 이때는 경험의 열망이 있습니다. 많은 지식을 경험하고 많은 세계를 경험하고 많은 것을 체험하려고 듭니다. 그래서 경험의 열망이 있어서 경험할 수 있을 때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경험하지 못할 때에 불행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보다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체험하려고 하는 그런 세계를 넓게 확장하는 그런 시대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인격의 열망이올시다. 이 장년기가 되면 이제는 행복이 소유에 있는 것도 아니고 체험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거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 가져봐야 아무 것도 아니고 가질 수도 없고 또 가진다는 말이 도대체 뭐냐. 뭐 체험한다고 해서 뭐 그게 체험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제일 우습게 생각하는 것이 뭐냐하면 에베레스트같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깃발 하나 들고서 "산을 정복했다" 하고 소리지르는 사람 말입니다. 누가 뭘 정복했습니까 올라갔다 내려왔는데. 뭘 정복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어느 자리에 한 번 올라가 보고 권좌에 한 번 올라가 보고 "나는 성공했다" 그러는데 뭘 성공했다는 얘기입니까 다 부질없는 것이지요. 그런고로 이제 장년기에 들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푸는 것만이 남는 것이다' 그래요. 베푸는 것만이 남는 것이다. 행복이 역시 베푸는 것에 있는 것이다. 소유하는 행복이 아니라 주는 행복이 행복이다. 소유하는 기쁨은 유치한 것이고 주는 기쁨이 영원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리고 인생을 마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영영 깨닫지 못하고 죽어 가는 불쌍한 사람이 많습니다. 거기에 슬픈 이야기가 있는 것이올시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섬기려하고 대속물로 주려고 했다, 그랬습니다. 주려고 하는 게 목적이다. Giving이올시다. 준다. 생명을 주고 사랑을 주고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뭐냐하면 의를 주는 겁니다. 여러분 이 물질을 받는 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명예를 받고 의를 받는 겁니다. 의롭다 하심, 그래서 우리가 죽을 대신 그가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가 죽습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그가 죄인이 됩니다. 바로 의를 주었다. 주기 위해 오셨다. 대신 죽으셨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주는 것도 좋고 베푸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죽기 전에 좀 어떻게 알아주기라도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누군가가 알아주기라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그것도 실패입니다. 그 마음도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교육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녀들이 여러분 말썽을 부립니까 이제 한 번 간단하게 생각해 보세요. 아낌없이 주세요. 그러면 자녀들은 무럭무럭 자기 힘대로 자랍니다. 어딘가 모르게 요거 받으려는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문제입니다. 네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야 내 체면이 살지 않느냐. 그건 체면을 받겠다는 것이에요. 그 뭔가 받으려는 마음이 딱 걸려있기 때문에 당신도 불행하고 얘는 얘대로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해요. "나는 그저 주노라. 아무 조건 없이 주노라. 그리고 죽노라" 해 보세요. No problem 이요. 여기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남편과 아내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당신을 위해 살고 당신을 위해 죽노라, 해버리세요. 아무 문제도 없어요. 되돌려 받으려고. 얼마를 주고 얼마를 받았나, 이거 계산하느라고 바빠요. 나는 손해 봤다는 거죠. 그렇게 계산하는 동안 당신은 영영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우스운 얘기요 좀 극단적인 얘기입니다만은 강간하고 사랑하고 무슨 차이가 있는 줄 아십니까 같은 행동이에요. 그런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면 그것이 사랑이고 사랑 없이 대하면 그게 강간이에요. 요새 문제되는 얘기가 있지요. 그것이 뭐냐하면은 추행이라든가 무슨 뭐 성희롱, 요새 성희롱 잘못하면 큰일납니다. 자 성희롱 죄가 어디에 속하느냐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성희롱을 받으면 이것을 애무라고 하는 거에요. 이건 애교에요. 사랑이 없이 문제가 될 때 이게 바로 추행죄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떤 마음이냐가 문제지요. 그래서 사랑 없이 한 평생을 수절하고 살아도 마지막엔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난 일생동안 강간당하고 살았다" 그래요. 보세요. 마음을 바꾸면 이거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생활인 것인데 마음을 닫고 보니까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걸 아셔야 됩니다. 섬김, 그 속에 행복이 있는 거예요. 빼앗기는 거 하고 주는 거 사이는 종이 하나 사이입니다. 마음가짐이에요. 비록 내 자식에게 주는 것도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자녀를 주었고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었고 이렇게 줄 수 있는 자가 있고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그래, 그래 가져라' 하고 주면 이게 사랑이 되는데 어쩌다가 자식은 많이 나 가지고 또 빼앗긴다. 강도 만나는 마음으로 죽어 있으면 진짜로 강도 만나는 거예요. 별수 없이 강도 만나는 거예요. 당신의 일생은 구제불능이에요. 이걸 알아야됩니다. 마음을 확 돌려서 베푸는 마음, 주는 마음, 섬기는 마음으로 바꾸면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워질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합니다.
왜 흔히 그 동안 모아 놓았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 하는 그런 기사가 신문에 날 때가 있어요. 많은 돈을 세상에 환원했다. 크게 대서특필 합니다만 나는 그걸 볼 때마다 마음이 참 좋지 않아요. 왜냐하면 어차피 못 가지고 가는 거 내놨는데 뭘 그게 선행이 되겠어요. 안 그래요 좀 진작에 일찍이 내 놔야지. 가지고 붙들고 붙들고 있다가 죽게 되니까. 안 내놔도 사회로 돌아가요. 그게 당신이 그 마지막 숨지기 전에 그 내놓으면 뭘하고 안 내놓으면 뭐해요 어차피 자기 것 안 될 건데. 안 그렇습니까 좀 더 일찍이 내가 쓸 것 내가 꼭 필요한 것을 나를 희생시키면서 내놓고 쓰고 섬기고 해야 이게 아름다운 일인데 왜 우리는 이렇게 됩니까 참 우리는 이 방면에 너무 잘못 배웠어요. 기독교인은 많은데 이걸 못 배웠어요 아직도. 외국에 가서 저도 뭐 참, 여러 해 동안 외국 가서 장학금 받아서 공짜로 공부했습니다. 그거 빚을 많이 졌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이 빚을 갚나 해서 학교에서 강의하러 오라고 할 때마다 제가 꼼짝 못하고 시간을 내서 일주일씩 갑니다만은 그래요. 왜요 그 학생 전부예요. 98%가 장학금을 받아요. 제가 가서 공부할 때도 보니까 아니 안경도 사주고 텔레비전도 사주더라구요. 이런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 그러고 공부하라 이거예요. 이렇게 하고서 거기서 나올 때 "안녕" 그러고 말더라구요. 뭘 갚아야 하는 게 없어요. 우리는 왜 이렇게 조건이 많아요 학교마다 그 유명한 학교들을 돈이 남아 돌아가서요 장학금은 남아돌아서 이걸 어떻게 쓰나. 또 어떤 사람이 주는 돈은 또 받지도 않아요. 이게 바로 아름다운 세상이에요. 돈을 쓸 줄을 알더라구요. 그런데 우리는 벌 줄만 알지 쓸 줄은 몰라요. 줄 줄을 모르고 섬길 줄을 모르더니 결국은 망하더라구요. 이 불행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 보면 그래서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왕, Cyrus 라고 하는 왕이 어떤 날 전쟁을 하면서 자기 적수, 그 원수의 나라의 왕자와 그 부인과 아이들을 생포했어요. 포로 했어요. 이제 재판을 해서 죽이려는 그 시간에 그는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만일에 내가 당신들을 죽이지 않고 당신을 놓아주면" 왕자에게 말하기를 당신을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냐고. "내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주겠습니다." "이 아이들을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했더니 "재산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마누라를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했더니 "내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랬어요. 왕은 깜짝 놀라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이 어디 있단 말인가 감동이 되가지고 "다 놓아줘라" 그랬습니다. 이제 그날 밤 집에 돌아가서 왕자는 축하파티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오늘 그 Cyrus 왕은 참 훌륭하지. 내가 보니 참 미남이더니만. 의젓하고 지혜롭고 훌륭한 왕이더라" 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 아내는 하는 말이 "저는 왕의 얼굴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럼 무얼 봤는가" "나를 위해서 대신해서 죽겠다는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다른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거기다가 초점을 맞추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뿐 아니라 그를 따르고 그를 본받고 그를 배웁니다. 특별히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것을 배워야합니다. 그것을 따라야합니다. 예수님 말씀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여러분, 주님이 삶의 길입니다. "섬기러 왔노라." 그 길을 따라서만이 그가 누리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섬기러 왔노라. 예수님 친히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썩지 아니하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다구요.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요, 주님이 사신 길이요, 주님의 행복이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의 길을 가지 못했습니다. 축복을 원하면서도 복받을만한 마음가짐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 주시고 주님의 가슴에 있었던 "나는 섬기려고 왔노라, 대속물로 주려고 왔노라" 하시던 그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도 그 길을 가게 하시고 그 마음으로 살게 하사 날마다 새로운 생명력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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