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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일을 기다리라 (수 07: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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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라고 하는 분은 한국 전쟁 때에 종군하면서 참전 취재해서 퓰리처상을 받은 유명한 기자입니다. 그녀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전세가 불리해져서 후퇴작전을 하고 있는, 그리고 포위 당해서 아주 절망 속에 있는 미 해병 중대를 일선에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얼어붙은 콩 통조림을 따먹고 있는 한 병사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이라면 당신은 내게 어떤 소원을 구하겠습니까" 그는 슬픈 낯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Give me tomorrow." 아주 유명한 얘기가 됐습니다. "내게 내일을 주십시오." Give me tomorrow. 미래가 보장되기만 한다면 이까짓 고생은 문제가 안 됩니다. 우리에게 밝은 미래만 있다면 우리가 무슨 고생을 한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미래가 암울하고 이러다가 아주 망하는 게 아닌가, 아주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 때문에 우리는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올시다.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으로 향하는데 광야를 거쳐 요단강을 건너 가야하겠지만 그들의 경건과 거룩함이 하나님의 기대하는 수치에 미치지 못함으로 해서 저들은 다시 해안에서 광야로 들어가서 40년 동안을 훈련을 받게 됩니다. 40년 동안의 긴 긴 훈련 후에, 지도자 모세는 세상을 떠났고 후계자 여호수아의 인도로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그런 가나안 땅을 건너가게 됩니다. 요단강을 건너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성, 큰 성 여리고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사했습니다, 만족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감격으로 충만했습니다. 이제 기세를 몰아서 다음에 있는 조그마한 성, 아이성을 공격하게 되는데 너무 작은 성이라서 이 많은 군사가 갈 필요가 없다 해서 이삼천 명만 보냈더니 전쟁에 패전을 했습니다. 그리고 서른여섯명이 죽고 3000명의 군대가 그대로 벌벌 떨면서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이 난감해졌습니다. 전쟁이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겁니다. 어찌 늘 승전만 있겠습니까마는 이 전쟁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얻게 되는 거룩한 전쟁이란 말입니다. 이 전쟁에는 패전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또 한편 생각하면 이스라엘이 군사력이 강해서 훈련된 군사가 많아서 승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 광야를 거쳐 나오게 하신 하나님, 그 위대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이라는 그 사실 때문에 가나안 칠 족속은 벌벌 떨면서 자기들의 땅을 내 놓을 수밖에 없었어요. 바로 이러한 전쟁인데 이제야 여기에 패전이 있다는 이야기는 있을 수가 없고 일이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인정이 되는 한, 저 가나안 칠 족속들은 모여서 연합군을 만들어 가지고 이 어디선가 찾아온 이스라엘 60만 대군을 아주 진멸해버리고 말 거란 말이죠. 이런 상황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위기 중에 위기입니다. 너무 답답하고 괴로워서 성경에 보는 데로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장로들과 함께 하루종일 하나님의 법궤 앞에 엎드려서 웁니다. 통곡을 합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는 겁니까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하고 목놓아 울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답을 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엎드렸다고 해결이 되냐 운다고 해결이 되냐 통곡한다고 문제가 해결이 될 것이냐구요. 어찌하여 여기서 엎드려 울고 있느냐, 말씀하시고 또 하나는 '패전의 원인은 너의 자신들에게 있느니라. 너희 속에 있느니라.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에게 있는 것이다. 망한 이유가 바로 너희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이렇게 원인 규명을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내일을 기다리라.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위기 관리능력을 상실한 여호수아는 지금 절망합니다. 소망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내일을 줄 것이다." 오늘 너희가 당한 이 큰 사건은 큰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요, 성실을 위하여 하나님의 선민의 성실을 위하여 있어진 사건이라는 거죠. 그런고로 내일을 기다리라. 내일은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 조용히 기다리라. 내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제 본문에 내용을 자세히 음미해 보십시다. 적이 강해서가 아니고 정세가 잘못된 것도 아니고 전략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상황이 잘못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원인은 너희 속에 있다. 내적인 문제다. 성결의 문제요, 도덕성이요, 진실의 문제다. 신앙적 문제라고 하나님은 지적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고 정황이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정말로 그렇습니까 문제의 근본은 도덕성에 있고 신앙에 있는 것이에요. 내적인 것이더라 그 말이에요. 특별히 아간을 지적합니다. '너희 속에 아간이라고 하는 반역자, 저 사람이 있느니라' 하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건 하나님이 이루시는 거룩한 전쟁입니다. 성전(聖戰)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을 강도질하는 전쟁으로 의미를 바꾸어 놓았단 말이에요. 탈취물을 위한 전쟁으로, 도적질하는 전쟁으로 만들었거든요.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심판하시고 심판의 기구로 이스라엘 백성을 사용하시는 것뿐이에요.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을 집행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땅을 지금 우리가 소유하게 되는 것이에요. 이 거룩한 역사에 웬 도둑질입니까 웬 강도질입니까 이러한 불순한 일이 존재할 수가 없다 하는 것이지요.
또 나아가서는 이 성격은 아간적인 죄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간이 지금 지은 죄가 뭡니까 이 전쟁을 하는 통에 보니까 좋은 외투가 있단 말이에요. 옛날에는 옷을 3대를 입었답니다. 옷이 귀한 때거든요. 아 이 좋은 옷을 이걸 왜 불태워버리노. 또 거기에 은 200세겔이 있더라. 돈이, 은 200이 여기 있다. 이걸, 이걸 왜 내 버리노. 금 덩어리 하나가 또 있더라구요. 이걸 보았지요. 보는 순간 '이 아까운 걸 불태워 버리다니 그럴 것 없다. 요걸 다 감춰놨다가 전쟁 다 끝난 다음에 요걸 꺼내 가지고 이제부터 요걸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요새말로 말하면, 경제 논리적으로 보면 말이에요 이거 불태울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아까운 걸 왜 태웁니까 그러나 이건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선민의 논리로 볼 때는 이건 안돼는 거예요. 금 덩어리가 나를 살려 주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그 역사가 나를 살리게 하는 것이지. 여기서 빗나가는 것이지요. 성경을 자세히 보면은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탐내어" 라고 말합니다 7장 21절에 보면. 금 덩어리를 보는 순간 탐심이 작용을 했어요. 그 외투 한 벌을 보는 순간 욕심이 생겼어요. 거기서 정신이 확 돌아간 것이에요. 자기가 지금 뭘 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어요. 언제나 탐심이 문제입니다. 지나친 욕심이 문제입니다. 탐심과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은 아무 볼 것도 없습니다. 초라해지고 추해지고 더러워지고 악해지고 여기는 이웃도 없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오로지 돈, 오로지 욕심. 욕심에 미쳐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이기심입니다. 나만 생각 한 거죠. 나라가 어떻게 되고 민족이 어떻게 되고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되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나 하나만 생각했단 말입니다. 곧 나 하나만 생각한 이기주의, 이게 문제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삶에 의미와 의욕을 가장 아주 고갈시키는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벌써 내 양심이 나를 정죄하기 시작해요. "이 놈아 너는 너 밖에 모르는구나." 이렇게 되기 시작하면 사람이 초라해집니다. 아주 비겁해지고 맙니다. 이기주의자는 또 생각하는 게 있어요. 내가 나만을 생각했으니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할 리가 없지. 그거 안 그렇습니까 내가 남을 위할 때야 남이 나를 위하지요. 그걸 자기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기주의자는 고독해요. 이기주의자는 사람 만나는 것도 반갑지 않아요. 이래서 이상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이 정신병자가 되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되요. 내 돈이라고 내 마음대로 쓰는 거 아니에요. 성현군자가 되라는 것도 아니에요. 최소한도의 이기심의 노예가 되면 사람은 아주 못 쓰게 되는 것이에요.
또한 여기 보니까 숨겼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도 양심이 있었거든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사람들의 눈 생각을 하고 땅 속에다 요걸 딱 숨겨놨다 말이에요. 행구 속에 숨겨놓았다가 뒤에, 어느 시간에 가서 이걸 꺼낼 거다 생각했다는, 숨겼다는 거죠. 그 말이 중요합니다. 숨겼다는 것, 은폐했다는 거 말이죠. 하나님이 이것을 용납치 않아요. 하나님이 이것을 정죄하지 않으면 이 숨겨진 일은 영원히 숨겨질 수 있어요. 그야말로 완전범죄가 될 수 있거든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니까. 이건 둘이서 한 것도 아니잖아요. 혼자서 숨겨 놓은 것이니까요.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내려치는 거예요.
신약 성경에 보면 참 도대체 상식적으로는 잘 이해가 안가는 사건이 있습니다. 은혜가 충만한 초대 교회에 있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는 두 사람이 내외간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서 땅을 팔아서, 여유 있는 땅을 팔아서 돈을 가지고 베드로 앞에 갖다 놓았는데 땅을 팔고 보니까 그 돈이 너무 많고 아까워요. 반을 딱 감춰놓고 나머지를 반만 가지고 갔는데 요게 문제가 되요. "땅 판 게 전부냐" 하고 물을 때 "예, 아닙니다. 반은 놔두고 반만 가져왔습니다" 했더면 문제가 없는데 "답니다" 그랬어요. "너 어찌하여 성령을 속이느냐" 딱 한마디 떨어졌는데 죽어버렸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이거예요. 이 사람은요 괜한 일 하다가 죽었어요. 안 바치고 사는 사람도 많은데. 왜 바치려다가……. 이 거짓말 한마디 때문에. 이건 뭔고 하니 교회의 거룩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교회가 세워지는 아주 벽두에 이같은 거짓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대표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습니다. 이 비슷한 맥락이에요. 오늘 아간이라는 사람이 이걸 숨겨놓았거든요. 숨긴 것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죠.
매년 독일에서는 재미있는 발표를 하고 있습니다. 대학과 국제 투명성 위원회가 공동으로 조사해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곤 합니다. "세계국가 청렴도 조사" 이런 내용입니다. 1996년 가을에 발표된 내용에 보면 청렴도 제 1위가 뉴질랜드, 둘째가 덴마크, 셋째가 스웨덴, 넷째가 핀란드, 다섯째가 캐나다, 일곱째가 싱가포르, 여덟번째가 스위스, 일본이 열일곱번째예요. 전체 대상국 53개국 중에 한국이 스물일곱번째입니다. 꼭 중간에 걸렸었어요. 그러나 IMF가 터진 다음에는 우리는 40번째로 밀려났습니다. 이것이 한국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뭐 잘 살고 못 살고, 능력이 있고 없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그게 먼저가 아니지요. 혹은 선행이라고 하는 것은 높은 차원에 있는 것이요. 그러나 의라고 하는 것은 기준치를 말하는 것이에요. 의는 선행이 아닙니다. 좀더 나아가서 정직함이라고 하는 것은 잘했나 못했나를 묻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진실을 묻는 거예요. 투명성이라는 것은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게 아니에요.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느냐 이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투명성, 이것이 윤리 도덕의 기본입니다. 심지어는 경제의 기본입니다. 정치의 근본입니다. 이것 빠져나가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에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일본의 NHK라고 하는 방송국이 있습니다. 그 방송국에서 20대 일본 청년들을 상대로 해서 의식 조사 설문연구를 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조사를 해 보았더니 많은 젊은이들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거, 그게 뭘까 생각해서 이렇게 문제를 냈다는 거 아닙니까 "당신이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까,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이거죠. 여기에 대한 대답이 첫째가 정직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어요. 일호요. 둘째가 신념이 강한 사람, 셋째가 상냥한 사람, 넷째가 평범한 사람이란 말을 듣고 싶다 그랬어요. 다섯째가 개성이 있는 사람, 여섯째가 믿음이 있는 사람, 마지막이 유능한 사람 그랬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며 생각해봅니다. 우리 나라 청년들에게 물으면 무엇이 첫째일까 유능한 사람이 첫째일 것 같아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자녀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까 첫째가 무엇입니까 유능한 사람, 유능한 사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유능한 사람. 이게 망조라구요. 정직한 사람, 투명한 사람, 이게 기본이에요. 다른 말은 못 들어도 좋아요. 잘나고 못나고가 문제가 아니에요. 저 사람은 정직한 사람, 이것이 첫째예요. 그리고야 경제도 되고 나라도 되는 거죠.
1997년에 체코에 '프라하'라고 하는 역사적이고 아름다운 도시가 있습니다. 저도 한 번 가봤는데요, '프라하'라고 하는 도시를 방문한 사람이 신문에 기고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구 프라하 도시를 여행하면서 지하철을 탔는데, 지하철을 타는데 표를 사는데는 있는데 검표소가 없어요. 검표하는 사람이 없어요. 표 사 가지고 그냥 나가서 타는 거예요. 그 이상하다 해서 이거 검표 안하냐 그러니까 "어쩌다가 한 달에 한 번 불쑥 하는 수가 좀 있습니다." 그러면 무임승차하는 사람이 없느냐, "없습니다." 여러분, 어찌 생각하십니까 우리 나라 이런 식으로 검표소가 없다면 어떻게 될 거 같습니까 기가 막힌 얘기지만 무임승차하는 사람 때문에 전철회사 망할 겁니다. 이러고 경제가 되길 바라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어찌 될 수가 있어요 모두가 다 거짓말인데. 세계가 비웃고 있습니다. 재주 좀 있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기술 좀 있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진실을 잃어버리면 Nothing. 그건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어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등산을 하는 사람들은 높이 올라갑니다. 하다가 조난을 당해서 혹 길을 잃어버리든가 하면 이렇게 충고합니다. 내려갈라고 애쓰지 말고 위로 올라가라. 높은데 올라가서 다시 내려다보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지' 확인하고 그 다음에 내려가라고요. 우리는 현실에 매여 가지고 현실 문제에만 급급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높은 데로 올라가서 다시 이 세상을, 나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에 가스펠 송 가수인 피터 빌혼이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어떤 때에 아이오와 주에 있는 포트메디슨 형무소에 가서 가스펠 송으로 전도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때에 부른 노래 가운데 "날개가 상한 새는 날 수 없습니다" 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듣고 죄수 하나가 찾아와서 울면서 "날개가 상한 새는 영영 날수 없는 겁니까" 하고 슬픈 얼굴로 묻습니다. 아무 대답도 못 했습니다. 그래 집에 돌아왔는데 이게 기억에서 지워지질 않습니다. '날개가 상한 새는 날수 없습니다.' 그 슬퍼하는 사람을 보고 그는 깊은 은혜 가운데 노래를 다시 지었습니다. 그 작곡한 노래가 이렇습니다. "예수께로 가면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 맡기기만 하면 실패한 과거도 새롭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에 그대를 맡기십시오. 그대의 날개는 다시 새로워지고 높이높이 푸른 하늘을 날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20년 후에 뉴욕 YMCA에 무슨 일이 있어서 가서 행사에 참여할 때 자기 눈앞에 미군 대령 한 사람, 버젓한 대령이 나타나서 인사를 합니다. "제가 20년 전에 상한 날개를 치유하면 다시 날 수 있다고 한 그 노래를 듣고, 당신의 노래를 듣고 새 사람이 된, 바로 제가 그 사람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 상한 날개로써는 날 수 없습니다. 이 날개를 치유해야 합니다. 내일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성결케 하고 내일을 기다리라' 했지만은 메시지의 내용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결케 될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을 주실 것입니다. 스스로 성결케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내일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잘되기만 바랬고 잘 살기만 바랬습니다. 서둘러 번영만을 기다렸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에게는 투명성도 없고 진실도 없고 정직함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잘되기만 바래왔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고 스스로 성결케 하고 주님이 주시고자 기다리시는 그 내일을 우리가 받을 수 있고 소유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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