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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참 제자입니까? (눅 06:4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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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행치 아니하느냐
오늘의 본문은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생각해 왔던 평지 수훈의 마지막 결론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집과 주초의 비유로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태와 누가는 동일하게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의 결론을 집과 주초의 비유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제 다같이 4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46절)
오늘 본문은 책망으로 시작됩니다.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않느냐 ” 예수님은 지금 누구에게 이런 책망과 경고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47절에 보면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기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자기에게 나아온 자들을 향해 이 책망과 경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향하여 주여! 주여! 라고 부르는 자들에게 이 책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 곧 선생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예수님에게로 나아온 자들은 예수님을 주여! 라고 불렀습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연속해서 주여, 주여 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나아온 것을 보면 그리고 주여! 주여! 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보통 신자가 아닙니다. ‘주여’라는 말은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여‘라는 말 속에는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비오는 날에는 예배를 드리러 오지 않고 화창하고 좋은 날에만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설교시간에 설교를 듣지 않고 주보만 읽고 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주님을 닮고 싶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더욱 알기를 원하는 갈망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주여! 라고 고백은 하면서도 왜 내가 말하는 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느냐 종은 주인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여! 주여! 주님을 간절히 부르면서도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고백은 있는데 순종이 없었습니다. 고백은 있는데 행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예수님의 이 책망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있을까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까 우리는 지금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메스미디어가 발달되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지난주부터 C3tv인터넷 설교 방송에 이어서 기독tv인터넷에도 저의 설교가 나가는데 토요일에 클릭해 보니까 지난 주일 설교를 무려 900명에 이른 사람들이 와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와서 설교를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들은 말씀대로 행하며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받은 복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모습도, 우리의 가정도 다른 사람들이 몰라볼 정도로 변화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보다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 버릴 때가 더욱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망과 경고의 말씀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그렇게 행하지 못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집을 짓는 비유
예수님은 47절-49절에서 집을 짓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의 결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집을 짓습니까 48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48절)
집을 짓는데 그냥 짓는 것이 아니라 기초를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서 땅을 깊이 팠습니다. 그리고 주초를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집을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도 교회를 건축 중에 있습니다. 지금 토목공사가 한참 진행 중에 있습니다. 원래 지하 3층 지상 10층으로 설계가 되어 있었는데 주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하 4층으로 짓기 위하여 지금 흑막이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하 13미터쯤에 풍화암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렇게 한 사람은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해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은 땅을 파지도 않고 아무런 주초도 없이 그냥 흙 위에 집을 짓습니다. 49절을 보겠습니다.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49절)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에서는 한 사람은 반석 위에 또 한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주초의 차이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기초를 놓았다고 하여 기초를 놓는 과정까지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행치 않는 자
그러면 여기서 집을 지을 때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누구이며 집을 지을 때 땅을 파지도 않고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49절의 앞 부분을 다시 보겠습니다.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으니”(49절 상)
그러니까 말씀을 듣기만 하고 그 말씀대로 행치 않는 자는 주초(기초)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입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깊이 파고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두 집이 별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눈으로 볼 때에는 깊이 파고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땅을 파지 않고 흙 위에 세운 집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두 집 다 언덕 위에 하얀 집과 같습니다. 똑같이 햇볕이 잘 드는 남향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똑같은 평수의 집입니다. 똑 같은 구조입니다. 똑같이 방이 셋이고 각 방마다 화장실이 있습니다. 산과 들이 바라보이는 넓은 거실이 있습니다. 똑같은 건축자재가 사용되었습니다. 똑같이 8학군입니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어떤 차이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 두 집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기초가 다릅니다. 한 집은 기초를 다지지 않고 집을 지었습니다. 또 한 집은 깊이 파고 기초를 단단하게 다진 후 반석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대로 행하며 사는 성도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못하며 사는 성도 별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적어도 말씀을 듣는 데까지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정말 우리의 눈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똑같아 보입니다. 똑같이 교회에 나오고 똑같이 예배를 드립니다. 똑같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똑같아 보여도 말씀을 듣고 행하며 사는 사람과 말씀을 듣기만 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행치 않는 자의 결과
깊이 파고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집과 그냥 기초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집이 겉으로는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듯이 말씀을 듣고 끝나 버린 사람과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비가 오고 물 나며 바람 부딪치면 금방 구별됩니다. 4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48절)
이렇게 기초를 튼튼히 하여 지은 집은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혀도 능히 요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비가 오고 물 나며 큰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초 없이 바쁘다는 이유로,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기초를 다지지 않고 쉽게 지은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49절을 보겠습니다.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49절)
큰비가 내리고 많은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게 될 때에 그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였다고 말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여름에 집중적으로 폭우가 쏟아집니다. 그리고 나무가 별로 없는 지역이기 때문에 그물은 곧 바로 탁류, 곧 흙탕물이 되어 급하게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기초가 든든하지 않은 집은 곧 바로 무너지고 탁류에 쓸려 내려가고 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일지라도 그 결과는 이렇게 엄청납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기초를 든든히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일에는 기초가 제일 중요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집을 잘 지어 놓았을지라도 그 기초가 든든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무너지고 맙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왜 무너졌습니까 기초를 든든히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실공사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는 신앙은 언젠가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런데 언제 무너집니까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힐 때입니다. 그러나 기초를 깊이 파고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아무리 비가 오고 물 나며 바람 부딪혀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모양은 비슷했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한 집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또 한 집은 파괴됨이 심하였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똑같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의 인생의 결과는 너무나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합니다.
기초를 다지지 않고 지은 집에만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깊이 파고 반석 위에 세운 집에도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고 끝나버린 사람에게만 고난과 시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 사람에게도 고난과 시련과 시험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고난과 시련과 역경은 항상 있습니다. 문제없는 날이 없습니다. 정말 목회자로서 한 가정, 한 가정을 살펴보면 문제없는 가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초가 잘 다져진 성도는,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려고 몸부림 쳤던 성도는 그 역경을 이겨냅니다. 그 고난이 힘들지만 이겨냅니다. 풍랑의 한 복판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시험과 역경을 이겨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기만 하고 끝나버린 성도는 너무나 쉽게 무너집니다. 조그만한 풍랑이 닥쳐와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두려워떱니다. 너무나 쉽게 그 신앙의 인격이 무너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잘 다져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곧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살려는 몸부림이 있어야합니다.

 왜 사람들은 듣기만 하고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가
이런 엄청난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데 왜 사람들은 기초를 다지지 않고 건축을 하려고 할까요 기초를 다지는 일은 많은 시간과 노력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집을 짓는 일에 있어서 전문가이십니다. 건축을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지하공사는 지상의 건축보다 더 많은 건축비가 들어갑니다. 예를 들면 지하 2층이면 지상건축의 2배, 지하 3층이면 지상 건축의 세배, 지하 5층이면 지상 건축의5배 정도 건축비가 더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암반을 만나면 더 많은 돈이 들어갑니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냥 쉽게 흙 위에다 집을 지으려고 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기는 원하면서도 주의 말씀대로 살기를 주저하는지 아십니까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물질과 시간과 노력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려면 때로는 술자리도 피해야 합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려면 물질적인 손해도 보아야 합니다. 자존심도 버려야 합니다. 운동하는 횟수도 줄여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쉽게 편하게 예수를 믿고 싶어서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삶은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녹9:23)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넓은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손해 볼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소원하면서도 너무나 쉽게 편하게 예수를 믿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난 후 예수님 때문에 얼마나 손해를 보셨습니까 누가 참 제자입니까 말씀을 많이 아는 자가 아닙니다. 참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입니다. 말씀대로 살아 자신의 삶과 자신의 영혼과 그 인격의 기초를 다지는 사람이 바로 주님의 참된 제자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집을 짓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호흡을 하며 산다는 것은 곧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집을 짓는 인생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는 지금 집을 짓고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들음으로 끝나 버립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는 그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칩니다. 자기의 힘으로 안되기에 기도의 무릎을 꿇습니다. 참된 제자와 거짓된 제자는 바로 여기서 차이가 납니다.
거짓된 제자는 기초를 놓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지만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행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상식과 경험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때로는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말씀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엉뚱한 곳에 자신의 정력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참된 제자는 “주님! 내게 말씀하시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고백하며 말씀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집을 짓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의 신앙은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를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고 말합니다. 양은 우둔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양은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목자가 가라고 하면 가고, 서라면 서고, 목자가 먹으라면 먹습니다. 양이 하는 일은 그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 뿐입니다.
신앙의 성장이 빠른 사람일수록 특징이 있습니다. 생각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사람들입니다. 그날 그날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깊은 사색이 없어 보이지만 이런 사람들이 성장이 빠릅니다.

지금 우리는 비전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우리들이 알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고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도했으면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기도하고 난 다음에는 믿음을 가지고 부딪쳐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느혜미야를 보십시오. 느헤미야는 어느날 예루살렘성이 훼파되고 성문이 다 불에 타버렸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느혜미야는 왕의 마음을 변화시켜 달라고 4개월 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이것은 목숨을 건 도박과 같습니다. 왕의 명령 없이 왕 앞에 나아간다든지 왕 앞에서 얼굴에 근심하는 빛을 띠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에스더를 보세요 어떻게 왕 앞에 나아갔습니까“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을 가지고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느헤미야는 마침내 기도를 통해서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나니까 천사들이 내려와 성벽과 성문을 중건해 놓았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가 기도할 때에 그에게 성벽을 재건할 수 있는 길과 기회를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느혜미야는 결단력 있는 행동을 통하여 기도의 내용을 성취하였습니다.

 왜 능력이 없는가
왜 주님이 세우신 교회에 능력이 없을까요 슬로건만 있고 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행동하려고 하지 않고 구호만 외칩니다. “난폭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라는 스티커를 붙이고도 쏜살같이 달리는 총알 택시가 있습니다. “이 차량은 무자료 주류를 운반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뒷거래를 합니다. “내 탓이요” 라는 스티커를 붙혀 놓고도 접촉사고만 나면 당신 때문이라며 큰 소리를 치고 삿대질을 합니다. 교회도 보면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 해 놓고 모이면 수다를 떱니다. 모이면 비방하고 딴짓만 합니다. 일년내 한 사람에게도 전도하지 않습니다. 말로는 기도 기도해놓고 실제로 기도의 입술을 열어 부르짖지 않습니다. 실제로 선교의 현장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깨달은 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듣고 깨달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난 사람을 치료해 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난 다음에 율법사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때 주님은 알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그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겨주신 다음에도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요13:14-15)
기독교는 말의 성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있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라합을 보세요 만일 그가 행동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호수아를 보세요 그가 행동하지 않았다면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를 보세요. 그가 행동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기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겠습니까
베드로를 보세요. 그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었겠습니까 물 떠온 하인들이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가나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야고보 기자는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고 했습니다. 그리고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라고 말했습니다.
옛말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며 산다는 것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손해보고 조금 더 기도하면 됩니다. 조금더 자비를 베풀면 됩니다. 시편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라고 했습니다. 내 발에 등은 저 멀리까지 비추이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당장 걸어갈 수 있는 곳까지만 비추어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실천하면 됩니다.
루마니아의 범브란트 목사님은 공산치하에 있을 때 목사라는 이유 때문에 15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매일 빵이 하나씩 공급되었을 때 더 배고파하는 형제를 위하여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다른 형제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 번은 각설탕 두 개를 먹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각 설탕 두 개가 다시 자기의 손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그것은 바로 감옥에서의 오병이어의 기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실천하십시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실천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성도의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믿음은 힘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능력이 없는 것은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참 제자입니까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라 듣고 순종하는 자입니다. 듣고 순종함으로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자입니다.

주의 말씀 듣고서 준행하는 자는 .....찬 37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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