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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욥, 하나님이 요구하신 수준에로의 시련 (욥 2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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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욥은 당대에 가장 뛰어난 신앙의 사람이었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을 얻어 욥을 흔들어 원망하도록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한다. 소유의 전재산을 빼앗아 가고, 열 자녀가 하루 아침에 죽게 한다. 그래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22)”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자 이번에는 그의 몸에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도록 한다. 재와 티끌 사이에서 기왓장으로 자기 몸을 긁으면서도 욥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하고 오더니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욥 2:11-13)”
우리는 종종 욥을 신앙의 위인, 인내의 화신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욥기 전체 내용을 읽어보면 별로 잘한 대목이 없다. 욥이 잘한 것은 1장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머지 41장에 걸쳐서는 잘한 것이 없다. 욥은 인내한 적도 없고 승리한 적도 없다. 성경구절들을 추적해 보면 욥이 하는 이야기는 전부 이것이다.
“하나님, 억울합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이것이 욥의 전 항변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세 친구들의 이야기는 ‘욥이 잘못한 연고없이 이런 일을 만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욥은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하나님을 만나 따져 보아야겠다’ 말한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너는 스스로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하는 그것만로도 너는 틀렸다.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주로 이런 내용들로 친구들은 욥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우리는 신앙생활을하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가 뭘 잘못했기에 하나님이 이런 어려움을 주실까’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유일한 자신을 돌아보는 신앙패턴이다. 우리들에게는 옳은 길을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시련과 환난이 따를 때가 있다. 우리에게 시련과 환난이 있으면 무조건 ‘잘못왔다’라고 생각하는 신앙 패턴 밖에 없기 때문에 극복하고 뛰어 넘어야할 환난과 시련에 대해서도 ‘내가 잘못했나보다. 용서해 주세요’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뛰어 넘어야 하는 싸움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정당했고 친구들이 정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42장 7절에 선언한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욥 42:7)”
이것이 하나님의 판단이다. 욥이 정당하다. 그러나 욥은 칭찬을 받았는가 아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 38:1-3)”
하나님께서는 욥의 항변에 대해서 대답을 하러 나타나셨는데 욥이 질문한 것에 대하여는 일언반구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욥 38:5-6)”
이런 류로 말씀만 하시지 욥의 질문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는 대답이 없다. 이것이 욥기의 재미있는 대목이며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욥의 질문은 세 친구에 비해서는 정당하지만 지금 그가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 욥에게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넌 정당하다. 넌 내아들이다.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수준이 아닌 그 이상의 자녀로서 너에게 요구하노라”
이것이 욥기에서 하나님이 사탄으로 하여금 욥을 시련과 재난 속에 집어놓도록 허용하시는 깊은 의미이다. 그리고 오늘날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도 불평과 억울함 속을 살아가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깊은 이유이다.
욥은 분명히 항변할만한 근거가 있는 사람이다. “내가 언제 남의 것을 빼앗은 적이 있습니까 남을 억울하게 한 적이 있습니까 불평하게 나눈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욥의 전 항변의 근거들이다. 욥은 한번도 그런 부분에서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했거나 실패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그의 자녀들을 그 수준으로 요구하고 계시지 않다는데 성경의 요구가 있다. 신약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진술한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 오른편 뺨을 치거든 원편도 돌려대라”
뺨은 아프라고 때리는 자리가 아니다. 모욕을 느끼라고 때리는 자리이다. 이 모욕에 대해서 이쪽 뺨도 다시 대라고 한다. 이것은 굉장한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당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정당함의 수준이 아니라 아량의 수준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내 인생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이 훈련시키시는 손에 있는 것을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의 싸움이다. 우리는 언제나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싸우느냐 하면 내 고통을 기준으로 해서 싸운다. 하나님의 기준은 원통함과 고통이 기준이 아니라 옳고 그른 기준도 아니다. ‘성장’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계시고, 쌓으시고 계시고, 필요없는 부분을 잘라내고 계신다. 우리는 이 훈련이 왜 필요한지를 알 수 없다. 쓸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쓸 수 있기 위하여 오늘 우리를 잡고 이 시련의 터널을 통과시키신다. 그것이 욥의 고백이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이것이 무슨 훈련이며 무엇을 위해 하는지도 욥은 사실 모른다. 그리고 끌려간다. 거기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아량을 기준으로 해서 대접하시는 하나님이 그의 자녀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이요, 훈련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에게 감사할 수 밖에 없고 감격할 수 밖에 없는 자리라는 것을 기억하는데 우리의 축복이 있는 것이다.
욥을 보라. “하나님 원통합니다. 왜 이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만나서 따져 봅시다. ”이러자 하나님은 “넌 알 것없다. 내가 하나님이다. 넌 내 자식이다. 부모가 그의 자식의 앞날을 보다 걱정하는 법이고 보다 좋은 것을 위해서 있는 법이다. 넌 그것에 항복해라” 이것이 38장에서 41장에 이르는 하나님의 설명의 골자이다. “악어가 어디에 힘이 있는줄 아느냐. 산양이 어디가서 새끼를 치는지 아느냐 네가 알리가 없지. 내가 다 준비하고 있느니라. 내가 창조주니라. 내가 더 많이 고심하고 열심을 품고 사랑과 긍휼 속에 보호하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선언이다.
욥의 전재산을 박탈하고 그의 가족을 박탈하고 그의 몸을 쳐서까지 하니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 인도하려고 하시는 부모된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이것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마음에 감동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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