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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 인간이란 무엇인가 (시 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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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1편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지은 시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구약의 전 신앙의 체제는 제사라는것으로 압축되어 있다. 다윗은 제사장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자기는 제사를 드리지 않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은 제사를 즐겨하지 않는 분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사이다. 그들은 매일 일과처럼 제사로 모든 일을 시작하고 제사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다윗이 이런 폭탄적인 선언을 하는 것이다. 무슨 의도로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전일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는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라(삼하 5:1-3)”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사울에 의해 상당기간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쫓겨 다녔다. 사무엘하 1장에서 사울이 죽고 5장에서 드디어 다윗이 왕이 된다.
“다윗이 삼십세에 위에 나아가서 사십년을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년 육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삼하 5:4-5)”
사울이 죽기까지, 사울이 죽어서 지금 다윗이 드디어 이스라엘 모든 민족 앞에 공식적인 왕으로 취임하기까지 가장 큰 사건이 있다면 무엇이겠는가 물맷돌 다섯 개로 골리앗을 죽인 사건이 있었다.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사울을 두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죽이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사무엘하 5장부터 시작해서 이제 다윗이 이스라엘 영토를 어떻게 넓히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 가는가 하는 과정이 나온다. 인근에 있는 모든 나라를 쳐 엎고 항복을 받고 항복을 받고 조공을 받고 이스라엘은 점점 확장된다. 6장에 보면 여호와의 궤를 옮겨오는 사건이 있다. 운반 도중 낙원의 타작마당에서 소가 뛰는 바람에 궤가 떨어지려고 하자 웃사가 법궤를 잡았다가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래서 베레스 웃사라는 이름을 붙이고 오벧에돔의 집에 놓아두고 다윗이 궤를 가져오는것을 두려워 했다. 그러나 궤로 말미암아 오벳에돔의 집에 복을 내리시는 것을 보고 나중에 다시 가져오는 길에 그는 너무 기뻐 춤을 추었다. 이 일을 좋지 않게 여긴 미갈이 힐난하자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삼하 6:22-23)”
이 일로 인하여 미갈은 평생 아이를 갖지 못했다. 미갈의 판단보다는 다윗이 옳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증명해 주신 것이다. 7장에 가면 성전을 짓겠노라 하나님게 말한다. 그러나 그는 피를 많이 흘린 사람인지라 짓지 못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는 자손 중에 누가 성전을 짓더라도 부족함이 없도록 금은보화를 모아 두었다. 솔로몬이 후일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그렇게 해서 지어진 것이다. 9장에 가면 요나단과의 우정을 잊지않고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불러 함께 식탁에 앉았다. 다윗은 신앙도 뛰어났고 인간미나 용맹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다윗을 모든 면에서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다음을 보자.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삼하 11:1-3)”
우리가 잘아는 밧세바 사건이 터진다. 그가 밧세바 사건에서 얼마만큼 실수를 하느냐 하면 밧세바를 데려옴으로 남의 유부녀를 꼬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정당한 남편 우리야까지 죽인다. ‘간음’과 ‘살인’을 하는 두 사건이 동시에 터진다. 간음 사건을 다른 경우들을 살펴보자. 유다는 며느리인 다말을 창녀인줄 알고 들어갔다가 애를 낳는다. 성경은 그 선상에서 이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빼놓지 않고 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빠져 나와 살면서 술을 마시고 두 딸들과 더불어 동침하여 암몬과 모압 족속을 낳는다. 성경은 유다와 롯의 문제에 대하여는 시비가 없다. 유독 다윗과 밧세바 사건에 대해서만 그토록 강경하다. 이 사건을 읽으면서 우리가 ‘나단’이나 된 것처럼 분을 참지 못한다. 성경은 왜 다윗의 밧세바 사건만을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일까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멧세지를 갖다 넣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샘플이 되기 때문이다. 다윗이 그동안 쌓아왔던 것이 여기서 하나도 남김없이 부서져 버린다. 그의 전 생애가 무너지고 그의 위업과 명예와 자랑과 쌓아온 모든 경력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진토가 되는 순간이다. 사실 밧세바 정도의 일은 다른 王政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윗에게만 하나님이 집요하게 문제삼고 나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다윗만을 이런 궁지에 몰아 넣으신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다윗은 골리앗을 때려잡는 순간에 있어서도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완벽한 신자이고 완벽한 신앙의 거인이다. 그러나 골리앗을 이긴 것은 다윗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것이다. 그는 너무 높아졌었기에 추락은 상대적으로 깊어 보인다. 그리고 이 추락이 무엇인가가 오늘 메세지의 요점이다. 그를 높여 놓은 것은 진정한 높힘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무엘하 10장까지 하나님이 하신 일들은 다윗이 진정 그 축복들과 능력들과 결과를 다 얻어도 좋을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준 것이기보다는 이 일을 위해 주고, 또 주었던 것이다. 이 일에 부딪치므로써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지적하고 싶었던 일들인지도 모른다. 이 일로 인하여 다윗은 어떻게 변하는가를 살펴보자.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시 40:1-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해서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6)’
이는 시편 40편, 51편, 말하자면 사무엘하 11장 사건을 통하여 이제 다윗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던 절망이었고 그 절망의 벽을 깨치고 나타나신 구원의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다윗에게 나타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 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7-8)”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1-4)”
이 앞의 말씀은 제사가 인간의 죄를 다 씻을 수 없는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리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7)”
앞에 있는 제물이 아닌 이제 온전한 제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5)”
이 사실을 다윗이 밧세바 사건 때문에 아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이 대부분 오해한 것 같이 제사를 드리는 것이 구원의 한조건이라고 생각을 한다. 예배가, 헌금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 내게 있는 것으로 말미암지 않고 내가 거듭나고 내 생활이 된다는 고백이다. 내 구원은 하나님 손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구원이시고 내 인생의 주권자이시고 그분이 나에게 살 힘을 주신다.’ 사무엘하 11장 이전에 진술된 다윗의 전 생애는 하나의 신앙이 아닌 종교요, 인격에 불과하다는 것을 성경이 지적한다. 그래서 자기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해고 있다가 밧세바 사건에서 ‘그게 아니구나’ 깨닫게 된다.
어느날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어떤 부자가 옆집 어린양 한마리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양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다윗이 그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열을 낼때 ‘그게 바로 당신이요’ 말하는 것이다. 다윗은 아름다운 여인을 범하고 그의 남편을 죽이고 했던 그것이 자기 스스로의 마음보다는 내재하고 있는 죄악 때문임을 알지 못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5-7)”
다윗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저질러진 죄악의 깊은 뿌리를 보고 통화하며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1-5)”
다윗은 밧세바의 사건을 통해 자신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 110:1)”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상으로는 다윗의 후손이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에 대하여‘주’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인간의 구원이 스스로의 힘과 조건과 노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준비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방법으로 될 것이라고 그가 알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시 110:2-7)”
여호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가 심판하실 것도 아시며 동시에 그가 멜기세덱을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 될 것이라고 한다. 멜기세덱이 누구인가 성경은 그를 이렇게 묘사한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도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1-7)”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의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히 7:1-6)”
열두 지파를 이스라엘에게 갈라놓은 이유는 제사 직분 때문이다. 예수님을 상징하기 위하여 레위 지파를 구별하고 제사라는 제도를 주었다. 제사장도 예수님을 상징하고 제사법도 제물도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다 지파를 통해서 오신다. 레위지파로 제사장을 삼으면서 실제로 예수님은 유다에서 뽑음으로 이 지파가 육신적인 후손이 아니라 이것은 상징에 불과하고 본체이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위해서 이 지파를 구별했다는 것이 뚜렷해진다. 만일 레위지파에서 나왔더라면 뛰어난 한 사람으로 그치고 말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다 지파를 통해서 오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멜기세덱에게 무릎꿇게 하심으로 오실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과 그의 지위가 얼마나 높고 독특한가를 보여주신다.
“다윗이 나이 많아 늙으매 아들 솔로몬으로 이스라엘 왕을 삼고 이스라엘 모든 방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모았더라 레위 사람은 삼십세 이상으로 계수하였으니 모든 남자의 명수가 삼만 팔천인데 그 중에 이만 사천은 여호와의 전 사무를 보살피는 자요 육천은 유사와 재판관이요 사천은 문지기요 사천은 다윗의 찬송하기 위하여 지은 악기로 여호와를 찬송하는 자라 다윗이 레위의 아들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의 각 족속을 따라 그 반열을 나누었더라(대상 23:1-6)”
반열을 다윗이 나누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왕이라도 제사장 직분에 관하여는 아무 간섭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는 자기 마음대로 반열을 만들고 지휘를 한다. 다윗이 이 모든 것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마 12:1-4)”
다윗은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을 했을까 다윗은 어떤 의미에서는 제사장이며, 선지자이다. 다윗만큼 예수님에 관한 상징이 내용적 차원에서 묶여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행 13:20-22)”
하나님이 다윗에게 이룬 일이 무엇인가 밧세바 사건 밖에 없다. 하나님은 다윗을 들어 밧세바 사건을 일으키기 위하여 그의 성공과 신앙을 스타트 시켰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야 말로 막다른 골목에 부딪친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말미암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과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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