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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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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교회설립의 근거가 되는 신앙고백을 남긴 예수님의 수제자이다. 그는 예수님을 좇다가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했고, 성령을 받고는 오천명을 회개케한 명설교가가 되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에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의 잔을 마셨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베드로가 그 지점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하는 점이다. 그것을 알아야 우리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원하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너희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예수님은 베드로가 세번 자신을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런데 왜 그를 말리지 않으시는 것일까 요한복음 21장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요한복음 21장은 예수님의 부활이후이다. 부활하셔서 이제 제자들을 만나는 상황이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 21:1-17)”
예수님은 세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이 질문을 우리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이 질문을 하는 상황이다. 그 전날부터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는데 밤새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 새벽에 누군가 나타나 ‘배 오른쪽에 그물을 내리라’해서 내렸더니 많은 고기가 올라왔다.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주시라!’ 베드로는 바다에 그냥 뛰어 내려서 헤엄쳐 왔다. 와서 보았더니 해변에 숯불이 있고 떡이 구워지고 있었다. “생선을 가져오라” 가져 온 생선을 구워 조반을 먹이신다. 아무도 말하는자가 없다. 식사 후에 묻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장면에서 몇가지 기억해야할 배경이 있다. 숯불이라는 소도구가 나온다. 그것이 왜 필요한 것인가 베드로는 세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지 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 18:15-18)”
다른 복음서에는 그냥 불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런데 유독 요한복음서에만 숯불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베드로는 부인사건 이후 숯불에 대한 공포증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상상일 수 있겠으나 지나쳐 버려서는 안될 문제이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사건은 굉장히 크다. 그리고 이 소도구들이 알맞게 지금 나와 있다는 것을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 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것은 제일 첫번째 질문이다. 동시에 둘째, 세째 질문이다. 그러나 첫번째 질문이 이후의 질문과 다른 점이 있다. ‘이 사람들보다’가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물으셨을까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1-33)”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장담을 하였다. 지금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는 몇가지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왜 말을 이렇게 해야 되고 왜 꼭 숯불을 놓으셔야 했는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초대교회를 시작시키시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시키시고 하는 모든 일의 가장 중요한 책임을 이제 맡기실 것이다. 사도들이 사역을 시작하면서 그가 첫 설교를 하고 그가 앉은뱅이를 고치고 그리고 그가 최초로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 베드로야말로 예수님 승천 이후에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역을 떠맡은 최고의 제자였다. 그 일을 맡기기 위해 주께서 베드로에게 꼭 가르치셔야 했고 꼭 준비시켜야 했던 것이 있었다.
우리는 그냥 베드로는 하루에 오천명의 회심자를 불러 들였다라는 사건 밖에 모른다. ‘아니니아와 삽비라를 죽일 수 있었다,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이 사실들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베드로는 그만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맡겨도 좋을 사람으로 하나님이 준비시키신 것이다. 베드로에게 ‘무엇을 준비시키셔야 했던가’ 이것을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전혀 다른 시각이 열려지게 된다. ‘베드로와 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가져야 하는가, 어떤 능력을 가져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그 능력을 주실 것인가’라고 우리는 추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이 일을 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훈련시키셔야 했던가’를 말씀하신다. 능력을 주셔야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을 그에게 부여하기 위해서는 ‘기초를 닦으셔야만 했다’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제 초대교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이 복음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기실 것이다. 맡기기 위해서 그에게 틀림없이 확보시켜야 했던 것이 있다. 그것이 싸움이기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세번 부인하는 자리를 방관하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베드로를 훈련을 시키시는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셨다.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없이 앉으셔서 숯불 위의 떡을 자꾸 뒤집어 놓으신다. 사실은 뒤집는 떡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 밑의 숯불을 보라는 것이다. 시간은 새벽이어서 또 닭은 목청을 높여 울어 제킨다. 베드로는 숯불을 쬐다가 새벽닭 울기전 세번이나 모른다고 주를 부인했다. 베드로는 죽고 싶은 심정으로 “주께서 아시나이다” 대답했다.
세번의 질문은 각각 다 다르다. 둘째 질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사랑하느냐” 세번째 질문의 문구는 두번째와 동일하다. 그러나 의미는 다르다.
첫번째는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로 두번째는 ‘나를 사랑하느냐’로 세번째는 다른 단어로 ‘나를 사랑하느냐’로 질문하셨다. 헬라인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세가지 의미가 있다. 아가페(신의 사랑), 필레오(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 우정), 에로스(남녀간의 사랑)이 있다. 예수님의 질문에서 첫째, 둘째 사랑은 아가페이다. 세번째는 필레오로 물으신다. 수준을 낮추어 물으신다는 것은 베드로가 하는 이야기를 안믿으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말씀하신다.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7)”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한다. 베드로는 무엇 때문에 근심했을까 이것이 베드로가 하나님 앞에서 꼭 훈련되어야 되는 지점이다. ‘여기 있는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주를 좇겠습니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너는 돌이킨 후에 너희 형제를 굳게 하라’ 이걸 배우기 위해 베드로는 돌이켜져야 한다. 베드로가 이제 배우는 것은 그가 가진 자신감과 그가 가진 열심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베드로는 이 일로 두가지 고민을 이제 해결한다. 첫째 그가 안 것은 ‘내가 확신한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결심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 결과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운다. 둘째로 베드로는 자신이 할 일은 최선을 다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배운다. ‘내가 최선을 다해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할 일은 무엇인가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믿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내가 최선을 다하며 한다는 것은 ‘일의 결과’가 내손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것이 내손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차원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삶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이다. 결과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다. 결과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우리가 취할 태도는 결과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숯불 앞에서, 새벽닭 울음 소리 앞에서 많은 동료 앞에서 베드로는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동일한 묘사를 구약성경에서 읽어보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욘 2:1-9)”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하였나이다(4)’
사랑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옳으냐 틀리냐’는 것 이상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녀로 서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토록 재미가 없는것이다. 사랑하기 시작하면 옳고 그른 것은 둘째, 세째 문제가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 사람만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이 내가 옳게 살았느냐 틀리게 살았느냐 이전에 사랑을 하고 계시는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루하루의 삶이 재미있을 것이다. 그것이 요나의 이야기이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자리이다.’ 주님께서 주신 명령은 둘밖에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스스로의 신앙의 열심이 하나님에게 이익이 되고 이웃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물어보라.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이름으로 행세했어도 사기’이다. 베드로의 대답 ‘제가 주를 사랑합니다’ 겸손해진 대답이다.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저는 다시 주의 전을 바라보겠나이다’는 거기 밖에 매달릴 곳이 없는 것을 아는 겸손이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강한 사람이 되었다. 성령이 오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사역을 증거하기 위해서이다. 베드로의 담대함은 성령강림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예수님의 세가지 질문과 자신의 답변을 통해 그는 담대한 대사도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베드로와 모든 사도들의 능력이 성령강림 때문이라고 단정해 버린다.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 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행 1:15-26)”
성령강림 이전에 베드로는 열 두 제자의 수에 한사람을 추가 시키는 일을 한다. 이제,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요구하신 것은 ‘네 최선을 다하라. 그것으로 결정이 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네가 내 부름에 순종하여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때 내가 너를 통하여 나의 일을 하리라’는 이 결론을 그 마음에 얻어내는 기초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 대신 설교를 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 유대인들이 먹을 수 없는 것들이 보자기에 싸여 내려올 때에 자기의 뜻을 접어두고 그 명령에 순종한다. 그가 힘있고, 그가 담대하고, 그가 위인이고, 그가 잘나서 한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제 베드로를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다. 베드로를 통하여 고넬료 가정을 택했기 때문에 드디어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고, 그리고 바울이 이방에 가서 복음을 전해도 시비가 없게 되었다.
우리의 사랑은 참으로 보잘 것없는 것이다. 그 보잘 것 없는 것을 알고 그 진심을 꺼내 놓는 마음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그때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은 마음껏 일하실 수 있으시다. 때로는 부족하고 때로는 틀릴지 모르나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라. 하나님이 당신을 들어 사용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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