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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도 여전히 일하시는 예수 (롬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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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자 되었다는 사실과 구원받은 자의 생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나를 구원하셨다’는 감격에만 머물러 있다. 그 다음의 신자의 삶에 대하여는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구원과 감격 이후 맥이 풀려 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구원얻기 전과 구원얻은 후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영생이 있는 줄 알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규범적인 생활로 구원 전후가 달라진 것이 없다.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구원 얻은 자는 어떤 다른 생명과 다른 에너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 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 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 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9-10)” 우리는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은 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은 것같이 구원을 얻은 후의 삶에 있어서도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10절 말씀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구원이라는 말이 두번 나온다. 구원을 얻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임하셨듯이 구원을 얻은 후의 신앙의 삶에서도 그리스도의 도우심과 그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태는 어떠한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잘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을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우리의 힘으로 그 은혜를 갚자’라고 생각하는 점이다.

우리는 죄사함받은 것을 구원의 전부라고 생각하기에 갈등을 겪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의 상태에서 구원하심으로 할 일을 다 하신 것이고 그 다음은 우리의 반응과 책임만 남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규범적일 수밖에 없고 더 어렵고 더 힘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으로 구원하신 후에도 여전히 일을 하고 계신다. 다음의 말씀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 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 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 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그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이 말은 세상으로 제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데 그 일이 제자들만의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일인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우리에게 하실 일의 전반전에 불과하며, 후반전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일이 있다는 말이다. 죽음에서 새 생명을 주어 우리를 구원시키는 것만이 하나님의 하실 일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그 후의 신앙의 삶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 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 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 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9-10)” 우리를 구원시킬 때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일하셨듯이 성화의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화의 과정에서 ‘확실히’ ‘그것보다 더’ 간섭하시고 일하심으로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이라는 것을 놓치면 성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패와 실수로 인하여 마치 구원을 못 받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가질 수 있는 풍성함은 놓치고 늘 구원을 받았나 못 받았나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얽매여 더 나아가지 못하고 갈등하게 한다.

우리가 신분적으로 죄에서 벗어나 의인의 신분으로 되었다 할지라도 죄라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는 커다란 권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고, 죄에 익숙한 자들이요, 죄와 아직도 친한 자들이요, 죄를 이길 힘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결심한다고 해서 죄를 안 지을 만큼 수준이 있는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짓지 못하도록 우리를 간섭하지 전까지는 죄를 이길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런 우리들은 아무리 신분적으로 의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수준적으로 거룩케 되고 성결케 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간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마태복음 28장 20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었는데, 그 목숨이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다면 그것으로는 우리를 위해 얼마나 더 큰 일을 하시겠느냐고 비교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려고 온 것이라고 묘사한다. 죽은 것을 살려 생명을 주는 데는 풍성이라는 개념은 없다. 그러나 생명이 일단 있는 것은 풍성함이 있는 것이다. 성경이 약속한 구원이라는 것은 죄사함 받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생명이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까지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의 신앙활동을 보면 전부 씨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신자로서 요구하는 책임은 이제 우리를 꽃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며 완성시키려는 하나님의 의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순종하며 발을 맞추느냐 하는 차원에서 책임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고 신자가 된 것이다. 그 다음에는 1절의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이고, 9절의 표현대로 하면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고, 10절의 표현대로 하면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와같이 성경에서는 ‘구원’을 여러 단계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의 피로 인하여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은즉 하나님과 화목되어서 평화를 누리고 그 안에서 완성까지 가야하는 것이다.

죽었던 나무에 생명이 주어지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물주시고, 햇빛을 주시고, 좋은 토양이 되셔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자리까지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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