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화에로의 부름 ①-초대 (엡 03:16-19)

첨부 1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신앙에 있어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는 것은 자기가 공감하고 동의하는 것을 신앙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 나름대로 ‘신앙 생활은 옳은 일이다’ ‘착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다가 자신의 삶에 희생이 요구되는 문제가 생겼을 때는 당황한다는 것이다. 신앙인의 삶이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의 집단 속에 초대받은 자이기 때문에 세상적인 가치관과 기준으로 보자면 희생이 요구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
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8-19)”
예수를 믿는 것 자체가 세상으로부터의 외면이고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괄시를 받는 것이 정한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왜 나에게 이러한 어려움이 있어야 합니까’ 아우성을 치는 것이다.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이는 것들 속에서 신앙적인 약속들을 추적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
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
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 3:16-17)”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삶에 있어서 주인 노릇을 한다는 차원의 이야기이다. 요한계시록 3:20에서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겠다는 것은 그가 우리 안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주인 노릇을 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로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은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믿는 자답지 않다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주인 노릇을 하지 않으니 있으나 마나 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밖에서 두드리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주인되게 하라는 이야기의 심각한 점은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고 싶어도 안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신앙 성장 문제에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애매하게 여기는 대목이다. 내가 그것을 해야 하겠다고 동의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룰 능력이 없으면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시면 당장에 요구하시는 것이 모두 영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영적인 것들에 동의한다는 것만으로 일이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목적지에 갈 수 있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전도나 봉사라는 것이 등장한다. 물론 그것 자체가 업적이기도하며 동시에 훈련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속사람이 강건해진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
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풍성이라는 말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씨 하나를 뿌려서 열매 맺는 것만큼 신기한 것은 없다. 여기에는 정말 풍성이라는 단어 외에는 적절한 표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심는 자들의 신앙 생활을 보면 싹난 사람도 얼마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주권을 요구하고 계신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을 부를 때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이 말은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를 호칭하는 명칭이 되었을 뿐이지 신앙 고백적인 본의는 흐려져 버리고 말았다.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해야 하는데 신앙 생활의 목적과 방법과 원리를 우리 손에 가지고 있게 된 것이다.
신자들에게 제일 많이 요구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요구되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 요구되어지는 일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훨씬 더 많다는 이유에서이다. 비록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일을 시키시는 분을 신뢰함으로 결국은 참고 인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어나는 사건을 설명해서 납득이 되기까지는 못 믿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씨를 땅에 묻으면 꽃이 핀다고 하는데 우리는 꽃이 피는 것을 보기 전에는 씨를 못 심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문인 에베소서 3:17은 “주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라”고 한다.
늘 우리의 마음에 계셔서 우리를 주장하시는 분이 되게 하여야 한다.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내가 정한 목적과 내가 정한 방법에 그가 능력으로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인생을 정하시고 그 방법과 모든 것을 주장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하나님께 능력만을 요구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신앙의 문제에 있어 실패하는 중대한 이유는 정작 싸움을 딴 곳에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정한 싸움을 해놓고 승리를 달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슨 싸움을 해야 할 것인지를 그분이 정하시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
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
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
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3-5)”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생각들과 이론들을 그리스도 앞에 꿇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대적한 모든 생각과 이론들은 누구인가 인간의 죄이다. 결국 우리의 신앙의 싸움은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과의 싸움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을 알고 있음에도 정작 실행할 때는 우리가 어느 것을 선택하는가 언제나 자기가 생각한대로 선택하고 있다. 선택은 자기가 해놓고 왜 하나님은 나에게 힘을 주시지 않고 승리를 주시지 않는가 우기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모신다는 것은 우리 생각을 그분에게 의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주장이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감정도 기호도 그분의 감정과 기호로 바뀌는 것이다. 중심을 그분께 맡기지 않는 상태에서 쉬운 일은 없다.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다면 우리가 하는 일을 참음과 믿음과 인내와 충성으로 버티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의 주인 되심이 어느 한 부분에서라도 거부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불신앙이다. 그분이 하라고 하면 내가 싫고, 쓸데없다고 생각되는 것까지도 해야 한다. 지금 당장 그렇게는 못 하지만 점차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다.
결국 신앙 생활은 누구를 믿느냐의 문제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천국행 기차표를 사는 것이 아니다. 이 정도를 훨씬 뛰어넘어서 그분의 인격과 존재 앞에 권위적 차원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