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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화에로의 부름 ②-희생 (빌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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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성화의 과정을 밟아감에 있어서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일에 있어 봉사만큼 오해되는 부분도 없을 것이다. 봉사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쓰여져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봉사 자체가 유일한 목적이 되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이 봉사를 요구하는 것은 선행적 차원이 아니다. 봉사를 정의하자면 그 봉사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열매가 얼마나 더 나타나고 표현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우리의 봉사는 그리스도가 연약하여 그분을 돕는 차원이 아니다. 그분이 하시려는 일에 동참되어 사용되어져서 그분의 원래 계획과 하시려 했던 어떤 일이 나타나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곧 그분 자신이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 중 그의 가르침과 그의 방법론은 사람들이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세상의 방법과 원리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
라(빌 2:7-8)”
‘자기를 비어’ 이 말은 자신이 자신에 대하여 어떤 결정을 내리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고 사람의 형체로 나타나신 것이다. 지금 이 구절에서 비교되는 점은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능동형이고, ‘나타나셨다’는 것은 수동형이다. 즉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운 다음에 무엇이 되는 문제는 자기 소관이 아니다. 나의 몸, 나의 존재를 사용하고 주장하는 주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양시키는 데까지는 나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드려진 나를 무엇으로 사용하며 무엇으로 만드시느냐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를 비웠으니 무엇으로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것까지 우리의 것으로 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많이 혼동하고 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는 뜻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부리시며 무엇으로 쓰시는가 하는 것이 그분의 손에 달려 있지만 그렇게 되기 위한 우리의 책임이나 전제 조건으로서 내가 포기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 생활에 있어서 도대체 나의 할일이 무엇이며 우리의 책임의 영역이 어느 자리에 와 있는가 혼동스럽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 사시며 일하시며 우리를 명하시기 이전에 내가 나 자신을 비운다는 것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하셨다. 그 다음에 무엇이 되느냐는 것은 모르는 일이며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약속된 다음의 길은 만족할 만한 길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항상 그분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일생을 걸어야 하기에 성경에는 그분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묘사가 훨씬 많이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립보서 2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자기를 비우셨다.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비우시고 이제 그를 보내시는 아버지의 것으로 채우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일에 상상할 수 없는 순종을 하셨는데 바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순종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그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손에 의존하시며 사셨는지 생각해 보라. 그분은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어린 아이로 오셨다. 이 자체는 엄청난 사건이다. 어린 아이는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가 스스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방어력이 없이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연약한 모습으로 부모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전 생애는 목마르며 주리신 생애였다. 그의 전 생애를 보면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를 보내신 이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는 것 외에는 그에게 다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신자에게 요구되는 봉사의 초대에 있어서 가장 큰 희생은 빌립보서 2장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다.
신자의 생애는 오직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 맡겨진 것이다. 우리를 그분 발 앞에 엎드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비우며 우리 자신을 없는 것으로 취급하여 주 앞에 바쳐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주께서 우리를 들어서 쓰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한다. 주 앞에 봉사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가진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자기를 비웠느냐의 싸움인 것이다. 이렇게 비운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물질을, 또한 지식을 맡겼을 수도 있는 것이지 내 것을 내어 놓아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물질이 있는 것으로 쓰신다면 어떤 사람은 물질이 없는 것으로 쓰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신자들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바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쓰임받지 못한다. 그것은 아직도 비워있지 않은 자신을 나타낼 뿐이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 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사울이 백성
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계수하니 보병이 이십만이요 유다 사람이 일
만이라 사울이 아말렉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하니라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내려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
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
고 칼날로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삼상 15:3-9)”
사울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좋은 것, 기름진 것을 남겨 놓았다. 이에 사무엘은 격노하여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사울에게 물었다.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
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
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삼상 15:15)”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로 바치려고 남겨 두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사울은 왕으로서 버림을 받게 된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
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
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
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
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는 것이 봉사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진심을 표현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만드는 방법이 되거나 주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주권이다. 우리의 주권을 이양하라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해서 둘째 아들은 “내 것을 주십시오”라는 것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돌아와 “아들이라 칭함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품군의 하나로 여기소서”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십시오!’라고 한다. 결국 이 말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시기는 주시되 쥐엄 열매를 먹게 하신다. 그러다 드디어 돌아와서는 ‘일군 중의 하나로 여기소서’라고 자세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걷고 있는 신앙의 현실 속에서 많이 일어나는 현상이 봉사가 명예를 위해서 동원된다는 점이다. 또한 그 명예를 유지하는 봉사로 악순환의 연속이 되는 것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
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
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
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
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
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
코자 함이니(고전 9:19-22)”
19절에 바울은 “내가 나 자신을 모든 사람의 종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22절에 “많은 사람에게 나 자신이 여러 모양으로 되어졌다”고 했다. 내가 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종으로 비우고자 하나님게서 나를 모든 사람 앞에서 여러 모양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무엇을 했느냐’ 하는 싸움을 건다. ‘너는 무엇을 할 줄 아느냐 무엇을 했느냐’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것은 언제나 ‘네가 누구냐’라는 것이다. ‘네가 지금 그 자리에 너 혼자 섰느냐 그리스도의 종으로 섰느냐’하는 질문이다. 세상이 결국 어떤 결과를 얻는 원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것을 이루어 낸 나를 보아라’라는 일이라면 신자는 언제나 그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보이기 위하여 내가 등장하는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나를 보내시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이 증명되는 것으로만 나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가장 힘든 이유는 우리에게 있어서 나 자신을 죽이고 포기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영적인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에게 선행되어야 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진단하는 일이다. 우리는 얼마나 내가 주권자로서 하나님을 보조자로 그의 능력만 요청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일에 내가 순종하는 것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만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분 앞에 내 전부를 맡겨 버리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우리 스스로 확인하고 인정하여야 한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서서 그 하
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
다 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왕하 5:11-12)”
우리는 마치 이 나아만 장군과 같다. 단순하다는 것은 인간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무엇을 몰라서 못하고 있지 우리 자신이 무능해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이다.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결국 자기 부정의 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깨닫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포도 나무에 달린 가지이다. 포도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나무 자체는 지팡이로도 사용치 못하여 아무 쓸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포도 나무의 열매는 어떤 과일 열매보다도 풍성함을 가장 잘 나타낸다. 그래서 언제나 포도송이가 과일의 풍성함을 나타낼 때 등장한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바로 이런 모습의 삶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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