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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와 영광의 입성은 곧 겸손 (사 42:1-9, 마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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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함께 시작되는 고난주간의 첫째날과 둘째날, 그리고 셋째날에 관한 내용이다. 즉 고난 주간의 첫 째날에 일어난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청결사건(1-17), 둘째날 에 일어난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에 대한 저주(18-22), 그리고 셋째날 에 일어난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과 두아들의 비유 및 포도원 농부 의 비유(23-46)가 언급되고 있다. 이와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본장에서 우리는 예수와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팽팽한 긴 장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긴장감 속에 나귀를 타신 예수는 예루살 렘으로 입성하셨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그의 입성을 환영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겉옷을 길에 펴기도 하였고, 나 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리들 가운데 이스라 엘의 종교를 대표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하나도 없었다.

이렇듯 예수는 훌륭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영광받기 보다는 낮고 천 한 많은 무리들에게 영광을 받으셨던 것이다.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쳐댔다. 이는 '지금 우리를 구하소 서. 우리가 당신께 간구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에게 찬송하 리로다'라는 뜻이다. 예수는 만감이 교차되는 감람산 기슭 벱바게에서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먼저 예수는 자신의 전지성(全 知性)으로 '주께 쓰임받을 나귀'를 미리 아시고 제자들에게 준비하게 하셨다. 그리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다.

이처럼 나귀 를 타고 입성하시는 모습은 이미 스가랴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메시야 의 모습이었다. 나귀는 뭇짐승 가운데서 가장 초라한 짐승으로 겸손을 나타낸다. 즉, 예수는 위엄하게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온유함과 겸손 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많은 무리들의 기대 에 어긋난 것이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 어울리지 않는 모 습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모습을 무리들 에게 보이심으로써 자신이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임 을 공식적으로 드러내셨다. 예수의 겉모습이 초라할지라도 그 사역의 성격상 승리와 영광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 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승리의 입성이라고 하고 또 영광의 입성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의미를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1-5절에서 예수님의 입성은 곧 승리의 입성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스가랴의 예언대로 나귀새끼를 타고 초라한 모습으로 예루살 렘에 들어가셨다. 아마 이 모습을 본 무리들은 예수의 화려한 왕위등 극을 보지 못해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는 한갖 인간의 마 음을 만족시키기 위해, 인간의 자만심과 이기적인 욕심을 채워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무리들이 메시야의 도래를 대망하 였다면 메시야가 오실 때 어떤 모습일지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 리들은 자신들이 처한 압제의 상황에서 막연하게 어떤 돌파구로서 메 시야를 고대하였을 뿐 메시야 도래에 대한 깊은 생각과 준비가 없었 다.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면서 그에 따를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정작 메시야가 오셨을 때 깨닫지 못하고 2,000년 전의 유대인들처럼 메시야 를 십자가에 매다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또한 자기 이기적인 생각 대로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자기 욕심을 채울 수 없을 것이다.

 예수는 겸손의 왕이요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분이셨기 때문에 겸손 하게 주님께 순종하는 성도를 아름답게 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무리들이 예수의 초라한 모습에 실망했다고 해서 예수의 예루살렘 입 성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외형상의 그 초라한 모습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승리의 입성이었다. 대적자들의 시 기와 질투, 음해와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성에 당당하게 입성 하심으로 대적자들에게 승리하셨다. 초라한 메시야의 모습을 보고 실 망하는 모든 무리들에게 겸손과 온유의 왕으로 당당히 입성하였으니 그 또한 승리였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사역을 통해 사망권세를 이기 시고 부활하심으로 만유의 왕이 되셨으니 이 또한 승리가 아닌가 6-11절에서는 예수님의 입성은 영광의 입성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는 많은 무리의 환호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입성을 환영하는 무리들은 낮고 천한 소외계층이었다. 특히 무리들은 주님이 지니가시는 길에 자기 겉옷을 깔며(겸손과 헌신을 상징하는 행 위) 길 옆의 나뭇가지를 꺾어 땅에 뿌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승리를 기뻐하는 행위) 환호하였다. 여기에서 종려나무가지는 승리의 상징이었다. 백성들의 환호와 영광은 장차 예수께서 고난 후에 받으실 영광을 예시한다. 비록 무리들은 예수가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세상적 인 기대 때문에 열광하였지만 예수는 백성들의 기대를 영적으로 이루 셨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단지 3일만에 살아나셔 서 사망과 세상을 이기시고 명실공히 왕으로 등극하셨다. 그러므로 백 성들의 환호와 열광은 바로 예수의 영광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영광의 입성이다.

 오늘날 예수가 우리에게 오신다면 어떤 모양으로 오실까 예수의 영 광만 바라보다가 초라한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예 수님은 천국에서 양과 염소를 나누실 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으로 인정된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우리가 예수의 영 광만 바라본다면 지극히 작은 한 사람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을까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의 오심을 간절히 소망하여 겉옷을 길 에 깔며 영접한 예루살렘의 무리들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헌신 하는 가운데 주님 오시기를 소망하여야 한다.

 성 프란시스는 자기가 가르쳤던 제자들을 모아놓고 송별회를 했다.

이때 제자들은 스승의 곁을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어서 성 프란시스에 게 질문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배웠는데 이 세 상에 나가 꼭 필요한 말씀을 해주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대로 살아가 겠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질문을 받았던 성 프란시스는 이렇게 말을 했다. "겸손하라". 또 다른 제자가 물었다. "두번째는 무엇입니까".

이때도 그의 대답은 "겸손하라"였다. 다시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지만 그의 입에서는 "겸손하라"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당당하게 말을 타고 예 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있다. 바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서 메시야로 오셨 고 만왕의 왕으로 오셨지만 그는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해 오셨다.

"너희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태 20:26-27). 섬기는 일을 친히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던 예수님은 말 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귀를 타신 예수는 남을 지배하고 주인으로 모든 사람을 통치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구속사업을 앞두고 베드로의 발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신 다. 이때 베드로는 자신의 발을 절대로 씻어서는 안된다고 말을 한다.

이 발을 씻는 것은 예수의 섬기는 자세를 베드로에게 가르쳐 주기 위 함이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 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 에서 호산나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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