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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이신 그리스도 (요 01:1-2)

첨부 1


성경에는 복음서가 네 권이나 기록되어 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은 앞에 있는 세 복음서와는 사뭇 다르다.
다른 세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사건적 추적을 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그 내용과 의미를 추적하고 있는 책이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른 복음서는 사건 기록이 많은데 비하여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이나 세례나 시험에 관한 기사가 없고, 변화산의 기사나 최후의 만찬이나 겟세마네의 기사도 없고, 수많은 비유나 이적담들이 없는 대신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을 설명하시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주의할 것은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하나님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이 말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충분히 이해시킬 만큼 묘사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래서 독생하신 하나님, 즉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말씀이라는 단어로 묘사하고 있는 이유이다.
우리는 천국에서 세 분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흔히 말하는 한 분이라는 뜻은 숫자상 한 분이라는 뜻이 아니다. 성품과 능력과 존귀와 영광이 똑같으시다는 말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본체라는 말은 숫자적으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똑같다는 의미의 하나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9)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2)
천국에 가면 우리는 분명히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이 세 분은 똑같이 다 거룩하시며 전능하시며, 영광과 경배를 받아 마땅하신 분이다. 세 분은 능력이나 영광에서 차이가 없으시다.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일하시는 순서가 있을 뿐이지 누가 더 높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에게 바로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그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6-8)
예수님께서 말씀이라는 별명을 가지시는 것은 예수야말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전달시키고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9-10)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5-19)
우리는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신 것과 같이, 그리고 그의 안타까움들과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수행시키는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같이 우리를 보내신다.
이런 점에서 신자는 이 세상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유일한 ‘말씀’인 것이다. 내 말뿐만 아니라 내 판단, 내 행위, 내 모양이 그대로 기독교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오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의 자녀로 부르셨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의 삶 전체를 말씀으로 사셨듯이 그는 걸어다니는 말씀이다. 우리가 세상에 그렇게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가 참 신자의 삶은 무서운 것이다. 사람이 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는 이유는 다 빛을 보라고 보이는 곳에 두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으로써 하나님을 설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전 생애를 사시면서 어느 한 말씀, 어느 한 행위도 은혜롭지 않고 진리가 아닌 것이 있었는가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생명샘이라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 와서 먹고 마시라’ 우리가 바로 그러해야 한다.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신자는 그것을 위해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짐을 우리에게 가지고 와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구원자나 대속자가 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문은 되어야 한다. 일차적으로 우리를 통과하여야 한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온전한 사람이 없었다. 중풍병자, 귀신 들린 자, 소경, 앉은뱅이들이었다. 우리는 흔히 유유상종이라 말한다. 그러나 신자는 그렇지 않다. 신자는 얼마나 부족한 사람들 틈에 있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 인격을 증거한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에게 휩싸여 있는 사람, 그가 잘하는 사람이다. 교회 안에서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지 말라.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없는 사람은 갈곳이 없다.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 속에 가서 끼기 쉽지만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 틈에 끼지 못한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있다 없다는 것은 꼭 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돈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신앙이다. 신앙이 성장하고 난 다음에 제일 못 참는 것이 무엇인가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가 엉뚱한 질문을 하면 너무나 냉정하게 대한다.
성장한 믿음의 사람이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키우는 토양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나는 말씀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하는 말의 깊은 뜻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렇게 우리는 보냄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은혜와 진리로써 우리의 영광을 취해야 한다. 지식과 능력이 아니다. 은혜와 진리로 우리는 우리의 일터에서, 혹은 만나는 사람 앞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2.증거자 세례 요한(요 1:6-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요 1:7)
빛에 대하여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은 놀라운 말씀이다. 빛은 증거할 수 없는 것이다. 빛에 대하여 우리는 빛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뿐이지 빛이 어떻다고 증명하지는 않는다. 빛을 증명해야 한다면 아무리 해도 증명할 수 없다.
색깔에 대하여 눈을 뜨고 있는 자에게는 증명이 필요 없다. 색맹이 아닌 사람은 누구나 보면 색깔을 구분할 수 있다. 이것을 증명해 줘야 하는 사람은 장님이다. 그러나 장님에게는 증명이 불가능하다. ‘빛과 색깔’을 본 사람끼리는 구구하게 말이 나올 수 있지만 그것 자체를 증명할 방법은 없다.
바로 이 점이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우리가 바로 ‘빛을 증명해야 된다’는 것이다. 빛이 세상에 왔으므로 빛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증명이 되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들이 가장 오해하고 있는 말은 아마 죄라는 단어일 것이다.
죄의 본체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다. 그러나 독립이라는 것과 분리되는 것은 꼭 적대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관심의 관계이다. 우리 인간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모르는 자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불신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눈뜬 자가 눈감은 자에게 빛을 설명하는 것 같은 벽에 부딪친다. 미국에 갔다온 사람과 안 갔다온 사람이 싸우면 안 갔다온 사람이 이긴다. 전도는 이와 같은 식이다.
우리의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어느 학자는 이런 말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을 표현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 정도는 마치 지렁이가 메니큐어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
혹자는 인간들이 그래도 종교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앙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종교심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에게 있어 가장 불행한 요소는 도덕성과 윤리성이다. 그것은 분명히 기독교가 갖고 있는 외형적인 모습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핵심이 되어 버린다면 윤리와 도덕만큼 기독교에 어려운 대상도 없고 종교심만큼 어려운 대상도 없다.
왜냐하면 종교심, 윤리성이 핵심이 되는 날에는 그 사람이 교회를 드나드는 열심 있는 교인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는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기적이요, 혁명이요, 불가사의한 일일 것이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기적과 축복 속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들의 위치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혼자 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있다고 하니까 장님들이 와서 두들겨 패는 것이다. 왜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해서 우리 장님 세계를 혼란스럽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눈을 떠서 보게 된 빛의 세계들이 우리들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그걸 못 보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개안시키기 위해서 내가 가진 축복을 찬양하며 사는 이들이 없다.
신자들을 만나면 꼭 이런 기분이 든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떠서 놀라운 빛의 세계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가서 살아야 하는 사회는 빛을 본 자가 입을 다물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눈을 뜬 것이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눈은 언제 필요하냐 하면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에 갈 때 천국에서만 필요한 사람처럼 살아간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본 사람들이다. 그것을 못 본 사람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겠는가 14절의 설명을 보자. 눈을 뜬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와 충만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영원을 보고, 절대를 알고, 진리를 알며 생명의 풍성함 속에서 사는 신자의 풍성함을 아는가 본다는 것으로써 기뻐하는 자들을 아는가 우리가 바로 그 축복과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특권이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 신자들이 그의 시력이 회복된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받는 축복과 특권들로 인하여 얻은 결론과 경험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적과 승리와 보람과 환희의 경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없다는 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가장 큰 불행이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요 1:6-7)
세례 요한은 빛을 보는 자다. 하나님을 보는 자다. 본 자가 안 본 자에게 증거할 수밖에 없다. 설명이 아니라 증거할 수밖에 없다. ‘빛이 있다’고 ‘나는 본다’고 말한다. 그 빛이 이 땅에 오셨고, 그 일을 완성하셨고, 지금도 빛을 비추고 계시고 우리를 또 빛으로 세상에 보내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다. 이제 우리는 빛으로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한쪽은 눈을 감은 자요, 한쪽은 눈을 뜬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가 더 오래 참고 용서하며 양보하야 하겠는가 눈을 뜬 자이다.
우리에게 희생이 따라야 하고 빼앗겨야 하고 우리가 더 많이 고생하고 수고하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애를 써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패했거나 약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상에서 당하는 우리의 대적들이요, 환난들이다. 그것을 회피하고 싶어서 짐짓 눈감은 자처럼 나도 장님이다 하면서 편한 자리에 서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있으므로 장님들이 올바른 길로 인도함을 받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그들이 눈을 떠야 따라올 것 아닌가 눈을 뜨기까지는 설명을 해서 납득시킬 수가 없다. 그러나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하여 애쓸 수밖에 없다. 그게 신자들이 살아 있어야 하는 가장 큰 사명이다. 그 일을 외면하면 안된다. 빛을 증명 받아야 되는 사람들 속에 이제 간신히 시력을 회복한 사람들이 섞여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왜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고 싶어하는가 그 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도 편하게 대접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접받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 아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우리는 자신을 대속물로 주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한 명령을 받는다. 그 사람들이 눈이 뜨일 때가지 참고 견디고 당하는 것이 신자의 생활이다. 아무 힘들어도 회피하지 말고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이력서에 더 많은 간증 거리를 기록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며 나는 그의 손에 붙잡힌 바 되었던 일들이 이렇게 많았었노라고 당당하게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고루 주신 축복이다. 또한 신자된 우리 모두가 마땅히 누려야 할 특권인 것이다.

 

3.무지(요 1:9-13)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 가장 잘 착각하는 것은 ‘왜 당연한 이 말씀을 믿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9-11)
빛이 왔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고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가 오셨지만 피조물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땅의 주인이신 왕이 오셨는데도 백성들은 영접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앞에 있는 이 세 가지 지적을 성경이 우리의 죄인된 것을 책하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을 한다. 빛이 왔는데 알아보지 못했으니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가 하나님이 오셨는데 그를 십자가에 못 박다니 그럴 수가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은 한다. 왜 그런가 나는 믿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믿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보통 믿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렇게 비교하는 습관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다. 본문의 결론은 13절이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영접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영접이 불가능하기에 혹시 그런 사람이 생기거든 그 사람은 자기가 설명될 수 없는 기적을 통과한 줄 알아라 하는 이야기가 13절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기가 기독교인이 되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얼마나 단순한 축복이요, 기적인지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예수는 누구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습관에 빠져 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할 때 정당성을 제시하고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하는데도 안 믿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믿는 것을 가리켜 기적이라고 말씀한다. 이와 같이 빛을 비춰도 빛을 보지 못하고 자기를 만든 조물주가 와도 모르고 왕 되신 이가 와도 영접할 줄을 모른 자들이므로 그를 영접하게 되는 길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그를 영접하는 자들이 많지 않은가 성경은 이렇게 된 사람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이 기독교 복음이 제시하는 은혜와 축복과 기적이 담겨 있는 자리이다.
우리의 신앙 가운데 가장 많이 흔들리는 게 무엇인가 내가 예수를 믿었는데도 축복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가장 중요한 우리의 우리된 특권과 사랑과 확신과 축복의 기초를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으로 제시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었고, 교회에 와주고 헌금을 내주고 기도하고 철야까지 했는데 나오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예수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기적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요구들이다. 예수 믿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확실한 증거가 마태복음 20:28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우리는 보통 이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희생하시고 사랑을 베푸셨는가 하는 것에 너무 집중이 되어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장님인 것과 죽은 것과 멸망의 자녀인 것을 알고 오셨다. 그가 누구인지 우리가 몰라볼 것을 그분이 더 잘 아신다. 예수님은 그렇게 오셨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고침을 받았다. 신자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그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믿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얼마 만큼 하나님을 안 믿는가 하는 것이 이해가 잘 안된다. 이것이 이해가 잘 안되는 이유는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 생기는가 쓸데없는 증거를 찾으러 다니게 되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건강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2차, 3차에 해당하는 것이다. 신자의 자기확인은 2차적이거나 3차적인 다른 것으로 가서는 안된다. 단 하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것 하나로도 너무나 엄청난 사실이다. 우리가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꼭 인정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신자만의 상징은 아니다. 죄인된 인류의 상징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2-3)
이 말씀이 요한복음 1:9-11에 나와 있는 말씀과 무엇이 다른가 이스라엘 백성도 그렇다. 그들도 자연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많이 베푸시고 일일이 간섭하신다고 해서 더 나아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겠는가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사 1:10)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무엇을 지적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인간이 자기의 문제를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것이 성경이 주장하는 바다. 아무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구원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아는 자도 없고 관심을 가진 자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그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고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큰 기적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영접하는 자가 되었다. 이사야 1장에 말씀했던 것과 같이 구약은 이렇게 끝이 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셨다.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엘리야에게 갈멜산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시고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건지셨다. 이렇게 하셨어도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희의 얼굴을 보기 싫으니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저주의 말씀도 아니요 심판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 후에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전 역사에 걸쳐서 확실한 증거를 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우리의 가장 큰 비극은 일어난 기적, 즉 이미 손에 잡은 우리들의 축복과 약속들과 특권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으로 뜻으로 난 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이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우리가 오늘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자리에 와 있는 것은 나의 출발이 아니요 내가 내놓은 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 온 것을 알기 때문에 복받치는 감격의 고백이요 자신에 가득찬 비명인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39-41)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셨는데 소경이 아닌 자를 심판하신다고 했다. 이 말씀은 너희 중에 소경 아닌 자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희 모두가 소경이므로 내가 필요하니 내가 너희로 보게 하기 위해서 왔다는 말씀이 요한복음 9장이다.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 1:9 이하에서 보는 것이 바로 그 말씀인 것이다.
요 1:9-11 말씀은 결코 꾸중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이루어진 일이 영접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큰 기적과 축복과 은혜 속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 자녀에게 이 이상의 축복은 없다.
그 어떤 축복도 첫 번째 축복을 능가하거나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의 삶이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제 확인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사실이요 얼마나 대단한 기적을 통과한 것이요 우리에게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요 자랑인가를 스스로 확인하는 길만 남아 있다.
우리를 흔들 자가 없고 방해할 자가없고 다른 무엇으로 유혹할 비슷한 것도 없다.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누리고 승리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는 일들을 매일매일 맛보기로 결심하고 기대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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