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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증거자 세례 요한 (요 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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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요 1:7)
빛에 대하여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은 놀라운 말씀이다. 빛은 증거할 수 없는 것이다. 빛에 대하여 우리는 빛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뿐이지 빛이 어떻다고 증명하지는 않는다. 빛을 증명해야 한다면 아무리 해도 증명할 수 없다.
색깔에 대하여 눈을 뜨고 있는 자에게는 증명이 필요 없다. 색맹이 아닌 사람은 누구나 보면 색깔을 구분할 수 있다. 이것을 증명해 줘야 하는 사람은 장님이다. 그러나 장님에게는 증명이 불가능하다. ‘빛과 색깔’을 본 사람끼리는 구구하게 말이 나올 수 있지만 그것 자체를 증명할 방법은 없다.
바로 이 점이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우리가 바로 ‘빛을 증명해야 된다’는 것이다. 빛이 세상에 왔으므로 빛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증명이 되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들이 가장 오해하고 있는 말은 아마 죄라는 단어일 것이다.
죄의 본체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다. 그러나 독립이라는 것과 분리되는 것은 꼭 적대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관심의 관계이다. 우리 인간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모르는 자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불신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눈뜬 자가 눈감은 자에게 빛을 설명하는 것 같은 벽에 부딪친다. 미국에 갔다온 사람과 안 갔다온 사람이 싸우면 안 갔다온 사람이 이긴다. 전도는 이와 같은 식이다.
우리의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어느 학자는 이런 말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을 표현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 정도는 마치 지렁이가 메니큐어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
혹자는 인간들이 그래도 종교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앙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종교심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에게 있어 가장 불행한 요소는 도덕성과 윤리성이다. 그것은 분명히 기독교가 갖고 있는 외형적인 모습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핵심이 되어 버린다면 윤리와 도덕만큼 기독교에 어려운 대상도 없고 종교심만큼 어려운 대상도 없다.
왜냐하면 종교심, 윤리성이 핵심이 되는 날에는 그 사람이 교회를 드나드는 열심 있는 교인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는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기적이요, 혁명이요, 불가사의한 일일 것이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기적과 축복 속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들의 위치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혼자 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있다고 하니까 장님들이 와서 두들겨 패는 것이다. 왜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해서 우리 장님 세계를 혼란스럽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눈을 떠서 보게 된 빛의 세계들이 우리들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그걸 못 보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개안시키기 위해서 내가 가진 축복을 찬양하며 사는 이들이 없다.
신자들을 만나면 꼭 이런 기분이 든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떠서 놀라운 빛의 세계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가서 살아야 하는 사회는 빛을 본 자가 입을 다물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눈을 뜬 것이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눈은 언제 필요하냐 하면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에 갈 때 천국에서만 필요한 사람처럼 살아간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본 사람들이다. 그것을 못 본 사람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겠는가 14절의 설명을 보자. 눈을 뜬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와 충만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영원을 보고, 절대를 알고, 진리를 알며 생명의 풍성함 속에서 사는 신자의 풍성함을 아는가 본다는 것으로써 기뻐하는 자들을 아는가 우리가 바로 그 축복과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특권이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 신자들이 그의 시력이 회복된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받는 축복과 특권들로 인하여 얻은 결론과 경험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적과 승리와 보람과 환희의 경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없다는 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가장 큰 불행이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요 1:6-7)
세례 요한은 빛을 보는 자다. 하나님을 보는 자다. 본 자가 안 본 자에게 증거할 수밖에 없다. 설명이 아니라 증거할 수밖에 없다. ‘빛이 있다’고 ‘나는 본다’고 말한다. 그 빛이 이 땅에 오셨고, 그 일을 완성하셨고, 지금도 빛을 비추고 계시고 우리를 또 빛으로 세상에 보내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다. 이제 우리는 빛으로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한쪽은 눈을 감은 자요, 한쪽은 눈을 뜬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가 더 오래 참고 용서하며 양보하야 하겠는가 눈을 뜬 자이다.
우리에게 희생이 따라야 하고 빼앗겨야 하고 우리가 더 많이 고생하고 수고하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애를 써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패했거나 약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상에서 당하는 우리의 대적들이요, 환난들이다. 그것을 회피하고 싶어서 짐짓 눈감은 자처럼 나도 장님이다 하면서 편한 자리에 서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있으므로 장님들이 올바른 길로 인도함을 받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그들이 눈을 떠야 따라올 것 아닌가 눈을 뜨기까지는 설명을 해서 납득시킬 수가 없다. 그러나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하여 애쓸 수밖에 없다. 그게 신자들이 살아 있어야 하는 가장 큰 사명이다. 그 일을 외면하면 안된다. 빛을 증명 받아야 되는 사람들 속에 이제 간신히 시력을 회복한 사람들이 섞여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왜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고 싶어하는가 그 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도 편하게 대접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접받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 아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우리는 자신을 대속물로 주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한 명령을 받는다. 그 사람들이 눈이 뜨일 때가지 참고 견디고 당하는 것이 신자의 생활이다. 아무 힘들어도 회피하지 말고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이력서에 더 많은 간증 거리를 기록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며 나는 그의 손에 붙잡힌 바 되었던 일들이 이렇게 많았었노라고 당당하게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고루 주신 축복이다. 또한 신자된 우리 모두가 마땅히 누려야 할 특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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