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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육신 (요 0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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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14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은혜와 진리’라는 말씀이다. 14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그의 영광을 보니”-‘본다’는 단어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만큼 어려운 말씀도 없다. 그러면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구원의 자리까지 나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을 다 해놓으셨으므로 우리가 할 것은 그것을 믿는 것이고, 믿지 않는 것 때문에 정죄를 당하고 믿는 자는 그것을 믿은 것, 즉 인정한 것 때문에 구원을 얻는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율법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율법과 복음의 가장 큰 차이를 들자면 율법은 방법론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율법은 그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율법이 한 번도 구원의 방법으로 제시되지 않는 이유는 그 율법을 지킬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은 후에 그 율법을 받은 것이 구원의 증거인 줄 알았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었다. 율법은 목적지에 이르도록 약도로 준 것이다. 율법은 분명히 방법으로서 준 것이다. 그것을 지키면 목적지까지 찾아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두가 소경이기 때문에 이것을 볼 줄 모르고 기껏 사용한 것이 지팡이로 썼을 뿐이다.
거기에 반해 복음은 종종 이렇게 활용된다. 율법이라는 지팡이를 준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지팡이로 오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라. 그러면 목적지까지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14절 말씀이 갖는 이 문제에 대한 해석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요한복음 1장은 두 가지 인간군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들과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 말씀을 단순히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로 구원을 선택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해서 구원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14절은 보는 자들에 관한 말씀이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두움과 빛을 꺼내놓고 선택을 강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장님이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는 빛을 선택한 자가 아니라 빛을 보는 자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이다. 우리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한 자로서 기적으로 통과한 자들, 구원을 얻은 자들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다 구원 문제를 절대 선택할 능력이 없다. 구원이라는 것은 율법적 차원에서 말하면 율법을 제시했을 때는 그 방법을 통하여 목적지까지 오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까지 오라고 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신 것이다. 영생에 과한 성경의 정의는 이렇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 안다는 말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자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율법을 제시하고 약도를 그려 줘도 찾아오지 못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방법을 제시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방법을 만드셨다. 인간이 나를 찾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친히 찾아가겠다는 말씀이다.
구약에서 이 문제를 가장 잘 상징하고 있는 것은 야곱의 벧엘 사건이다. 야곱이 외삼촌의 집을 향하여 가다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야곱이 하나님을 찾아가서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와 만나신 것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다. 우리 모두 그렇게 구원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혼동하는 이유는 우리의 선택을 요구하는 듯한 성경 본문들 때문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행 16:31)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보게 된 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된 다음에 내가 하나님 앞에 동의하고 공감하고 협조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옳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정도의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알게 된 것에 대한 자기 항복으로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성경에는 단 한 번도 믿는다는 단어로 내용을 대신한 적이 없다. 믿는다는 것은 본질은 알고 있는데 거기까지 가는 길을 모르고 있는 사실에 대한 표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설명으로 남을 설득시킬 방법은 없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 줄 알고 하나님이 누구인 줄 안다. 그것이 신자들이 갖는 믿음이다.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항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용과 본질과 핵심을 내가 충분히 납득했다는 뜻이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 신앙생활의 실천 부분에서 많은 문제가 되는가를 살펴보면 확실해진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좌절로 가득차 있는가 아니면 승리로 가득차 있는가 이렇게까지 타락한 형편없는 생활을 했는데 이제 무슨 낯으로, 무슨 면목으로, 이런 생각이 든 적은 없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구원을 얻은 것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근거가 되면, 내가 면목없이 산 것으로 예수를 놓아버릴 수 있다는 동일한 논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나를 변화시킨 것이다. 변화되어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항복한다는 것은 신앙고백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다가 비록 타락한 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우리의 운명은 이제 지옥으로 갈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가고야 말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다면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살아도 되지 않느냐 질문하기도 한다. 우리는 제멋대로 살아도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존재다. 구원 자체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으신 이상 하나님의 손에서 도망갈 수 있는 환경과 여건으로 타락할 수는 없다. 최악의 수준에서 잡혔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도 운명이 바뀌지 않는 자리에 와 있는 것으로 위로를 받아야 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3-15)
우리가 얼마나 신자답게 사느냐 하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다. 신자만이 예수님과 세상을 놓고 보게 되는 것이다.
복음과 율법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율법은 제시한 대로 행하여야 되고 행치 않는 자는 벌을 받아야 하지만, 복음은 믿으면 구원을 얻고 믿지 않으면 죄값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며 진정한 복음의 의미는 우리의 선택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직접 내 안으로 꿰뚫고 들어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6-17)
모든 단어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의 넘쳐나는 충만으로 우리가 생명을 받는다. 그가 우리에게 행하신 일의 결과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한 것이다.
복음의 복음됨은 그것이 우리를 뚫고 들어와 우리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크신 축복으로 은혜로 기도로 그분만의 방법으로 우리를 고쳐 놓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다. 그러므로 승리할 수밖에 없고, 또 승리해야만 되는 운명에 처하게 하시고 그 축복에 초대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셔서 우리의 삶을 감사함으로 긴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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