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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제자 (요 01: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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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다섯 제자를 부르시는 모습이 나온다. 처음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 있고, 그 중의 하나인 안드레가 그의 형 베드로를 불러오는 사건이 있고 빌립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이후 나다나엘을 데려오는 등 다섯 명의 부름이 있다.
이 다섯 명의 부름을 크게 각기 형태별로 나누면 네 가지 형태가 된다. 처음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받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사람과 인도함을 받아서 오는 베드로와 나다나엘의 모습과 다른 사람의 인도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데려오신 빌립, 또한 같은 초대함을 받은 것이라도 안드레의 초대를 받는 나다나엘은 좀 차이가 있다.
보통 우리 신자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네 가지 유형이 아니라 대개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생각한다.
①부모님들에 의해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게 되어 있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는 사람이 있다.
②인생을 살다가 중간에 믿게 된 분들이 있다.
교회 안에서는 이 두 파가 종종 충돌하곤 한다. 중간에 믿은 사람들은 대개 깨끗하다. 그리고 믿은 대로 아는 것만큼 행한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교회생활을 하신 분들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 간격이 너무 크다. 그러나 여기에 우열의 개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 메시야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다 듣고 다 알고 있다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여기 있는 세례 요한의 두 제자와 같은 경우이다. 그런가 하면 빌립처럼 길거리에서 부름 받은 사람도 있다.
신자들의 큰 불행은 내가 어떻게 부름 받았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논쟁하는 일에 있다. 논쟁의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고 신자된 것이 자기에게는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는 본능적인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초대를 받았던 그 감격과 경험이 묘사되는 이유는 ‘보라 어떻게 내가 당신과 다른 사람인가’ 하는 것을 구별해 내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어떻게 예수 믿게 되었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내가 오늘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문을 통과하여 내가 어떻게 변했는가, 오늘 즉 현재를 놓고 비교해야 한다.
은혜 받는데 뭔가 조건이 있다면 그건 은혜가 아니다. 자기가 구원 얻은 날, 구원을 얻었을 때의 감격, 그때의 남과 다른 점에 관심이 집중되면 안된다. 그것만큼 신자들에게 비극은 없다. 신앙은 그것에서 출발하여 오늘을 사는 싸움을 해야 한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어떻게 오늘을 살고 있는가 어떤 결심을 했는가 세상을 사는 방법과 원리와 목표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어떤 고민과 갈등이 있는가 이걸 비교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비교하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에 있는 자연적인 일들 중에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계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출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기억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영적으로 출생을 확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출생했으므로 바뀌어야 되는 것이다. 그 싸움이 늘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인식과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다. 그 이야기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사건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35-36)
두 제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섰다가 부르심을 받았다. 구원은 우리가 요청한 것도 아니요 우리가 그 일에 부름 받아 쓰이는 것도 아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싸우러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일하러 오셨고 그 일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초대받은 사람에 불과하다.
우리 중에는 어느 누구도 다름 사람보다 나아서 부름 받은 자는 없다. 그러면 우리의 시선은 어디로 모아져야 마땅한가 그들은 처음부터 완성된 베드로, 안드레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출발은 누구나 동일하다. 은혜와 긍휼과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는다. 문제는 살아 있다가 인생이 끝나는 날 누구는 사도 바울로 누구는 가룟 유다로 누구는 별 볼 일없는 사람으로 그렇게 결정지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부름 받아 살면서 나중의 삶을 누가 더 성실히 살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 세례 요한이라는 안내자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발견한 자도 있고, 그리스도를 본 자가 강권하여 그를 불러왔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베드로도 있고, 길거리에 있다가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역 속에 이끌려온 빌립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 그러한 사실들에 경중을 두고 기록하지 않았으며 다만 그들의 마지막 생애가 그를 증명할 뿐이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를 기록한 거의 결론이다. 이 본문 말씀 가운데 맨 처음 부름 받게 된 사람은 바로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이고 한 사람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바로 이 성경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자기의 이름을 거의 밝히지 않고 사랑하는 그 제자라고 기록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돌아볼 체험이 과거 구원받은 감격밖에 없어서는 곤란하다. 살아서 지금 도달한 것으로서 지금의 결과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출발점을 회고하는 것과 그것이 유일한 사건인 것과는 다르다. 신자가 물을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다. 오직 예수님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문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온 천하의 주인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거지같이 사느냐 정당하게 사느냐의 싸움인 것이다.
출생 자체에 대한 자기 확인과 자기 조건으로서 자기를 확인시키고 싶었던 모든 사람들은 다음 과정에서 무너질 때마다 늘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돌아가는 것으로 자기만 넘어뜨릴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한다. 왜 당신은 나와 같지 않느냐고 쓸데없는 시비를 한다.
그러나 출생 자체에 대해서 걱정하고 어떤 것으로 단장해서 설명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우리의 싸움은 부름 받은 싸움이지 부름 받은 그때의 경험으로 비교되는 생은 아니다. 신자에게는 모두 가능하고 확실한 하나의 이상이 있고 기대가 있고 포부가 있고 욕심이 있다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다같이 동일한 출발점에서 뛴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신자들을 향한 성경의 끊임없는 권면이 있다.
“깨어 기도하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경주하는 자같이 목표를 향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뛰어라,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짧은 생애를 통하여 우리의 영원한 상급이 결정되고 우리의 영원한 지위가 결정되기 때문에 누구나 하면 되기 때문에 구원 얻은 것이 동일한 은혜요 그 다음은 누구나 하면 되는 자리에 앉기 때문에 모든 자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영원한 상급을 준비하사 영광의 면류관을 준비하사 우리 모두에게 권면하는 말씀인 것이다. 힘을 다하여 이 상급을, 이 복된 자리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인생을 살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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