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에 대한 바른 인식(2) (요 01:29-42)

첨부 1


주 해

1:2
9. 이튿날(te epaurion)은 1:19-28의 사건이 벌어진 날을 청날로 보고,그 다음 날을 의미할 것이다.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일로 인해서 예루살렘, 유대지방,그리고 북쪽으로 갈릴리까지 유대인의 사회에서는 일대 소란이 벌어졌던 것이다. 메시아를 대망하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세례요한의 이색적 출현과 활동은 온 민족의 관심을 끌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온 유대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털어 나왔다는 마가의 표현(막1:4-5)은 이해할만 하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서 세도를 부리고 있던 산헤드린과 바리새파 삶들에게는 유독 관심사가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세례요한을 내사(內査)하고 질문공세를 퍼 부으면서 사실을 알아보게 했던 것이다. 공관복음보다는 훨씬 세밀하게,그리고 단호히 세례요한이 자기의 정체를 밝히고,자기가 메시아가 아님을 언명한다(1:19-28). 그런 다음의 사건을 여기에 소개한다.

마가복음 평행구에는 kai egeneto(and it came to pass that...)라는 원동사 밑에 (1)elthen(예수가 오셨다), (2)ebaptisthe(세례를 받으셨다),(3)eiden (보셨다), (4) egeneto(소리가 들려왔다)의 네 개의 직설법 동사를 연결시켜서 네 개의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라고 소개한다.

누가의 평행구에는 역시 egeneto로 시작 하지만 좀 더 문법적으로 명료하게 부정사(infinitive)들을 배치했다. 즉 (1) anewxthenai(하늘이 열립),(2) katabenai(성령이 내려오심),(3)genesthai(하늘로부터 소리가 남)를 붙여서 깨끗하게 처리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가 나타나 요한과 대화하고 세례를 받으시고 거기에 따라 일어난 사건들을 차례로 보고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세례요한이 그 사건에서 예수를 어떻게 보고 말하고 증언했는가를 보도한다. 29절에서 보면 세례요한이 주어로 나타나고 (1:28에 나타난 세례요한이 29절의 주어가 된다),그가 자기에게로 오시는 예수를 보고(blepe) 말하는legei) 내용이 뒤따른다. 이 두 동사가 다 역사적 현재형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 눈 앞에 방금 벌어지는 듯이 묘사해 준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에서 우선 보라는 것은 위에서 말한대로 명령형이지만 목적물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여러분! 자 보십시오"하는 식으로 청중의 주목을 끌기 위한 말이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목적격이 아니고 주격 명사이기 때문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라는 서술적인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아,"자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릴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바로 세상 죄를 없이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라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여기서지고 간다(airon)는 것은 "없이 한다"(taking away)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airein이 "진다"는 뜻도 있지만,예수가 죄 보따리를 메고 다닌다는 뜻이 아니라 여기서는 죄를 해결하고 없애 주신다는 말이기에,그냥 지고 다닌다는 개념은 버려야 할 것이다. 세상 죄의 세상은 kosmos로서 원래 우주를 가리키는 말이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셨다"(요 3:16)는 말씀에 나오는 세상과 같은 것으로서 우선 좁은 의미에서 "인간 세상"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 o amnos tou theou은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유월절 양과 이사야 53장 7절에 나오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즉 대속의 양을 염두에 둔 것으로서,공관복음에서는 표출되지 않은 메시아관이 여기에 나타난다. 예수가 누구인가 여기서 벌써 고도로 정리된 그리스도관이 소개된 셈이다. 세상 사람은 죄를 지었고,그 죄는 없어져야만 하는데,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솔선적으로 행동을 취하셔서, logos를 세상으로 보내사 sarl가 되게 하셨다. 옛날 유월절 양의 희생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출된 것처럼,그리고 인간의 사죄를 위하여 제단에 피를 뿌리려고 말없이 죽어간 양들처럼,이제 십자가에서 희생될 그 분이 바로 예수라고 소개하는 대목이다.

1:30. 29절에서 예수의 구원론적 정체를 소개하고 나서 30절에서는 그의 존재론적 측면을 들고 나온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라고 한 것은 이사람을 가리킴이라고 한 것은 그 전 날에 한 말을 회상하는 말일 것이다(1:26-27).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느데 apiso mon erxetai aner를 자구적으로 번역하면 "한 사람이 내 뒤에 옵니다"가 된다. 예수가 시간적으로 외견상 세례요한보다 뒤에 오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은 태초(en arxe)부터 계신 분이셔서,존재론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요한보다 먼저 계신(en)분이시기 때문에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요한을 능가하시는 존재이시다. 우리 말에는 gegonen이 명확하게 번역되기 어렵다. 그것은 현재완료직설법 동사로서 예수가 이미 천지 창조 이전의 과거부터 벌써 존재했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그분이 지금도 피조물인 요한보다 월등하시고 신분상 보다 높으신 분이라는 것이다.

1:3

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스나의 나도 kago는 요한이 비록 예수와 혈친관계가 있어서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고,예수가 좀 별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지만,어떤 시점에 이르러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 하나의 선지자 역할을 하도록 광야로 파송 받을 때까지는,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말일 것이다. edein은 oida의 과거완료형이지만 미완료의 뜻을 가진 것으로서,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사명수행을 위하여 나타날 때까지는 예수를 바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섰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자기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알게 됫을 뿐 아니라 예수의 길을 예비하여 그가 이스라엘에게 밝히 드러나도록 하라는 지시에 따라 사람들에게 나타나 물세례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이스라엘에게 예수가 나타내어지도록 하는 일이다. 예수는 본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 죄를 없이 하시는 하나님의 대속양이시지만,예수를 보고 그렇다고 깨닫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갖은 방법을 가지고 예수의 정체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 세례요한의 사명이다. 세례요한이 나타나 물세례를 주는 일이 예수의 정체를 나타내는 일에 지대한 효과를 나타내고 필수적인 일이었슬 것이다. 요한이 광야에 나타난 사실이 없다면 어떻게 예수를 소개했겠는가 그가 그 시대인들의 죄를 통박하고 회개를 재촉하고 회개한 사람들을 물로 세례 준 것은 어디까지나 예수에게로의 길을 닦는 일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그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선구자로서 이스라엘에게 예수를 소개하려는 일편단심으로 행동하였다.

1:32-34에서 요한은 결정적으로 예수의 정체를 입증해 준다. 요한복음 저자는 여기서 다시 세례요한의 명백한 증언을 소개한다. 마 3:16과 막 1:10에서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와 예수에게 임하시는 것을 본 분이 예수로 되어 있다. 요한복음에는 세례요한도 그것을 눈으로 보았다고 기록한다. 요한을 파송하신 분 곧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을 주셨슬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마태와 누가는 상령이 그의 위에 (ep auton)내리셧다고 되어있는데 마가복음에는 그 속으로(eis auton)들어 가신 것으로 되어 있다. 요한복음에는 나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하는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예수) 위에 머무셨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즉 ep auton이라는 부사구가 머물었다는 동사에 붙어 있다. 즉 다른 복음에서처럼 내린다는 동사에 붙은 부사구가 아니라는 말이다.

비둘기 같이 os peristeran. 하필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에게 임하였슬까 혹자는 창 1:2에 있는대로 수면에 운행하신 하나님의 영을 연상한 것으로 본다. 또 어떤이는 창 8:8 의 노아가 내보낸 비둘기나 신 32:11의 독수리를 연상케한다고 말한다(Pheme Perkins, Harper's Bible Dictionary,1985,p 225). 맥클로우(W.S.McCllough) 의 설명은 또 다르다. 비둘기는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이라는 것, 비둘기는 유순하다는 것(마 10:16), 필로(Philo)의 말대로 비둘기는 덕과 이지(reason)의 상징이라는 것, 아가서 2:12에 나오는 반구(斑鳩)의 소리를 탈굼(Targum)에서 "구속하는 성령의 소리"로 해석한다는 것, 랍비 요세(Jose)가 탈무드(Talmud, Ber.3a)에서 "내가 비들기의 '구'하는 소리 같은 하나님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노라"고 한 것 등이 근거가 됫슬 것이라고 했다(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Vol.I,p 867).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에게 임하셨다는 것은 이상에서 본대로 예수로 하여금 많은 창조적 역할을 하게 했다는 뜻일 것이다.

1:3

3. 31절에서처럼 세례요한은 원래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여기서 다시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러 주시면서, 성령이 내려서 그 누구에게 머무는 것을 보거든 바로 그사람이 성령으로 세례를 줄 사람으로 알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 말씀대로 예수에게 성령이 내려 그 위에 머무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지금도 눈 앞에 선하다는 것이다. 성령은 원래 pneuma곧 바람이라는 말에서 왔으므로,비둘기라는 가견적 모습으로(somatikon 눅 3:22) 예수에게 내려오지 않았다면 요한도 그것을 감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요한은 33절에서도 성령이 예수 위에 머무셨다는 것(menon)을 다시 밝히고 있다.

1:3

4. 이렇게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예고해 주신대로의 사건을 목격했기에 (eoraka )이제 결정적으로 예수가 누구라는 것을 자신있게 증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 outos estin o uios tou theou. 세례요한의 이 증언은 1:49의 나다나엘의 고백과 일치하는 것이며,요한복음 저자의 저술 목적이 실현되는 실례들이다. 어떤 사본에는 하나님께 택정된 자 (o eklektos)로 나오는데 원문비평학적으로 볼 때 타당성이 적다.

이렇게 본문의 전반부에서 세례요한을 통하여 아주 훌륭하게 예수의 신자(神子)되심을 증언한 셈이다.

1:3

5. 장면은 다음 날의 사건으로 옮아 간다. 같은 요단강 변이고 셰례요한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군중은 회개하고 세례받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떠나지 않고 요한 주변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셰례요한이 앞으로 큰 일을 꾸밀 것으로 여겼고,야심이 있는 자들은 요한을 받들어 모시다가 때가 되면 자기들의 꿈을 이루어 보자는 것이었을 것이다. 제자 중 두 사람이라는 말에서 요한은 이미 제자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한의 운동은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벌서 많은 사라들의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요한의 추종자들 중에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기로 서약을 하고 그 주변을 떠나지 않고 끈질기게 그에게 시중을 들고 있었을 것이다. 다음 날 다시금 요한과 그의 제자 두 사람이 일찍부터 요단강 가에 나타나 서 있었던 것이다(eistekei). 여기에 과거완료직설법 동사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누구보다도 먼저 나타나 현장에 서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1:36. 그 전 날 세례요한에 의해서 많은 군중에게 소개된 바 있는 예수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요한 운동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가 걸어다니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때 요한은 다시금 예수에 대한 증언을 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야이로다 ide o amnos tou theou. 요한의 사명은 예수를 이스라엘에게 소개하고 그를 나타내는 일이었기에,한 번의 증언으로 사명을 완수햇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한에 대한 민중의 신뢰와 기대가 워낙 크고 두터웠기 때문에 세례요한의 한 번의 발언으로써는 군중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요한의 제자가 되겠다고 맹세하고 장담했던 뜻 있는 청년들의 마음을 돌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슬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틔날 다시 예수가 눈에 보일 때 군중울 향하여 다시급 어제 말한 내용의 말을 되풀이했던 것이다.

1:3

7. 그 때 세례요한의 말은 효과를 가져왔다. 스승의 말을 들은 두 제자는 인제 마음이 동하여 예수를 따라나셨다. 그 전날 하루 밤을 지내면서 스승이 낮에 한 말을 음미하며 예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슬 것이다. 오늘 다시금 요한이 되풀이하는 말을 듣고는 적어도 두 제자가 한 번 알아 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예수에게 접근하기에 이르렀다.

1:3

8. 뒤따르는 두 사람의 인기척을 알아차리신 예수는 자연히 뒤를 돌아보셨고 그들에게 말을 걸 수 밖에 없었다. "당신들의 요구가 뭐요. 뭐 때문에 나를 따라오는거요"하고 물으셨다. 그들의 대답의 첫 마디는 "랍비여!"였다. 번역하면 "선생님이시여!"하고 부르는 말이었다. 낯선 사람에게 "오,위대한 분이시여!하고 부른 것은,요한을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들로서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스승의 설명을 통해서 예수에 대한 엄청난 이야기를 듣고 밤새도록 생각한 연후였기 때문에 적어도 랍비라는 말은 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묻는 말은 어디 계시오니까 pou meneis;였다. 같이 가서 사귀며 대화하고싶다는 뜻일 것이다.

1:3

9. 와 보라 erxesthe kai opesthe. 올테면 와보라는 말이 아니다. "오라"는 말과 "보라"는 말 즉 두 개의 동사가 나란히 놓인 것이다. 그러나 원어를 엄격히 따지면 오라 그리하면 보게될 것이다라는 말이다. 처음 동사는 명령형이고 둘째는 미래직설법 동사이다. 헬라어 문법에 있어서 신적 미래(divine future)는명령의 뜻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ofesthe를 명령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명령으로 보는 경우에는, 어째서 erxesthe는 미래직설법 eleusesthe로 바꾸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러니까 첫째는 명령이고 둘째는 "보게될 것이다"라는 직설법으로 해석한은 것이 옳을 것이다. 예수의 허락을 받고 그를 따라간 두 제자는 예수의 계신 곳즉 그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설명이 없으므로 알 수 없지만,오전부터 오후 4시까지라는 긴 낮 시간을 같이 지내면서 결정적인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스승인 세례요한을 숭배하고 존경해 온 그들이지만,이제는 요한이 예수에 대해서 말한 것이 참되다는 것,그리고 예수야말로 대망의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40. 그 둘 중의 하나는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였다. 스승 요한의 가르침과 지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예수를 따라가 그의 정체를 알아본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이름을 밝히지 않은 또다른 제자였다. 요한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에서처럼 베드로를 부각시키는 일을 삼간다. 그리고 오히려 보다 이상적인 제자상으로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를 은근히 내 세운다.

1:4

1. 안드레가 누구보다도 자기의 형 베드로를 먼저(proton)찾아 그에게 경과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proton을 부사로 본다면 안드레가 만사제지하고 우선 형을 만나는 일을 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본에는 protos라는 주격으로 나오는데 그런 사본 계통(Textus Receptus)을 따른 영국흠정역 (KJV)과 우리의 한글 구역등이 "이가 먼저" 즉 어느 누구보다도 안드레가 "먼저" 베드로를 찾아 만났다는 뜻으로 번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원문비평학적 입장에서 볼 때 proton이 원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안드레의 보고에 의하면 자기들은 메시아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저술의 목적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하려는 것이었다면 안다레와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아로 알았다고 볼 때 이미 그 목적이 달성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1:34에서 세례요한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한 것과 또 1:29에 나오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증언을 안드레와 베드로가 어떤 뜻으로 이해했던가가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예수를 보는 눈은 아직 어두어서,그들의 전통적 대망이었던 정치적 메시아를 발견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라고 본다. 요한복음이 A.D.90년대에 나타난 글로서,그 시대의 신안의 입장에서 영화된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스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고백으로 관철되어 있지만,안드레와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그 원시 단계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지는 못했을 것이고,예수가 대속의 양이라는 말의 짐의도 깨닫지 못했슬 것이다.

1:4

2. 안드레는 훌륭한 전도자였다. 자기 형을 데리고 예수에게로 갔다. 그 둘은 매우 흥분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큰 뜻을 품고 세례요한 운동에 가담하고 그의 제자가 되어 선봉이 되었던 지사(志士)들이기에,세례요한보다 월등한 참 메시아를 찾아가는 그들의 발거름은 희망에 차 있었고 굳은 결의가 서려있었을 것이다. 예수 앞에 그 형제가 나타났을 때 예수는 베드로를 유심이 뜯어 보셨다(emblepas). 낮에 오래 동안 예수와 대화하면서 안드레가 자기 가정 사정도 얘기했슬 것이고 형 베드로에 대해서 또는 자기들의 포부,결심, 희망 등도 피력했섰슬 것이다. 예수는 이제 베드로를 향하여 "당신은 요한의 아들 시몬이지요. 앞으로는 게바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겠소"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은 베드로의 정식 이름이다. 즉 시몬 벤 요하난이라는 이름을 가진 보통 사람이다. 예수는 이제 그 평범한 사람에게 특수한 이름을 부여하셨다. 게바(kefas) 즉 반석(Πetros)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주님은 평범한 시골 어부 시몬을 특수하고도 귀한 그릇으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교회의 기둥이 되게 하셨다.

V. 사 역 (私譯)

2

9. 이틔날 그는 예수께서 자기에게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분은 세상의 죄를 없이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30. 이분에 대해서 내가 이미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뒤에 한 사람이 오십니다.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십니다. 3

1. 나도 그분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분이 이스라엘에게 드러나는 일 바로 그것을 위해서입니다.'"
3

2. 또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하늘로부터 비둘기 같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분 위에 머무셨습니다.
3

3. 나도 그분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바로 그분이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 누구에게든지 성령이 내려오셔서 그 위에 머무시는 것을 보거든,그 사람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다.'
3

4. 나는 정말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합니다.
3

5. 이틔날 다시 요한과 그의 제자 중 두 사람이 일찍부터 서 있었다.
36. 요한은 예수가 거니시는 것을 눈여겨 보고,"보십시오. 이분이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하고 말하였다.
3

7. 요한의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랐다.
3

8. 에수께서 돌아 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당신들이 구하는 것이 뭡니까"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랍비여! 어디 유하십니까"하고 되물었다. 랍비여!는 곧 선생님이시여!라는 뜻이다.
3

9. 예수는 그들에게 "오십시오. 그러면 보게될 겁니다"하고 이르셨다. 그래서 그들은 가서 예수가 계신 곳을 보았고 그 낮 시간을 그와 함께 지냈다. 오후 네 시경이 되었다.
40. 요한의 말을 뜯고 예수를 따라갔던 두 사람 중 하나가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였다.
4

1. 이 사람이 자기 형 시몬을 먼저 찾아서 말하기를 "우리가 메시아를 발견했습니다"라고 했다. 메시아는 곧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4

2. 안드레는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께로 갔다. 예수는 베드로를 눈여겨 보신 후 말씀하셧다. "당신은 시몬 벤 요하난입니다. 그러나 장차 게바라고 불리울 것입니다."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이다.

VI. 메시지

1.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걸쳐서 많은 선지자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때로는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전하기보다 자기들의 영달을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을 벋아 하나님이 명하시는 말씀을 무엇이든지 충성스럽게 외치고 전하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다. 세례요한은 구약 시대 마지막 선지자로서 여인이 낳은 사람 주에 제일 큰 자라는 칭찬을 예수에게 받은 사람이다. 요한이 나타나서 선지자 노릇을 한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시기였다. 순교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선지자가 될 수 없는 시대였다. 그는 과연 순교자가 됫다. 예수도 결국 죽어야하는 그런 험한 시대에 태어났다. 그러한 때에 예수의 선구자로 태어나 서슴지 않고,한 치의 양보도 타협도 없이 고지곳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세례요한의 인격은 예수의 제자가 된 우리 모두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보내신 분(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충성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증언하는 충성된 선지자 요한은 우리 모두의 보범이 될만 하다.

2. 세례요한의 증언은 인간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니믓 영의 감동으로 진실을 보고 깨달아,남이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진실을 말하였다. 그러기에 그의 증언을 우리가 에누리 없이 듣고 따르고 믿어야 하겠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1) 예수는 세상 죄를 없이 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영감을 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고작 축마사로,괴기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성인으로,말 잘 하는 사람으로,공자 같은 도덕교사로 알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대속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요한의 증언대로 깨닫고 믿어야 한다1:29).
(2)예수는 선재(先在)하신 logos로서 만물의 창조자이시다. 내 눈에 그가 안 보인다고 해서 안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신간적으로 세례요한보다,공자나 석가보다 뒤에 세상에 나타나셨다고 해서 그들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는 역사 이전에 계셨고 만물의 창조자이심을 깨달아야 한다(1:30). (3) 예수는 세례요한처럼 물로 세례주시는 분이 아니라,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물세례는 형식이요,물리적 변화나 심리적 영향을 줄 뿐이다. 예수는 성령을 통하여 사람을 중생케 하고,새 차원에다 우리를 탄생케 한다.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에로 옮아가게 하시는 분이시다(1:33). (4)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만이 참된 신앙이다. 그 이하로 믿는 신앙은 참된 신앙,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앙이 될 수 없다.

3. 세례요한이 예수를 반복적으로 증언한 것은 아름답고 바람직한 행위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한 한 번의 행위도 귀하지만,진리를 반복해서 그리고 기회가 있는대로 나들이 알아 들을 때까지 외치는 일은 전도자와 교육자들의 유의할 점이다. 반복처럼 좋은 교육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군중과 제자들에게 재삼재사 그 사실을 선포하였고,그 때문에 제자들은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한 번으로 끗났으면 제자들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았을 것이요,예수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았을 지 모른다(1:35-36).

4. 진리를 들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추구하는 태도를 안드레와 다른 제자에게서 배워야 한다. 진리에 대한 적극성은 자신과 남을 구원할 수 있다. 진리를 안 사람은 자기만 마음에 간직하고 독점해서는 안된다. 행복을 만인이 같이 누리도록 선전하고, 동참하도록 권해야 한다. 그것이 안드레에게서 배울 점이다.

5. 안드레와 베드로는 예수를 메시아로 알고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예수를 겨우 알기 시작한 것뿐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그 후 3 년이나 따라다녔고, 끝까지 그를 메시아로 고백했지만,마침내 예수가 수난할 때 다 버리고 다라났었다. 예수에 대한 참된 인식은 계속 자란다. 부활하신 예수를 뵙고,성령의 강립을 체험한 후에야 비로서 예수를 더 잘 알고 바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예수에 대한 인식을 오늘의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더 나은 인식을 위하여 계속 기도하며 성령의 조명을 구해야 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