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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는 우리의 길(2) (요 1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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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예수는 제자들의 무지나 우둔함을 꾸짖지 않으시고 자상하게 설명해주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제자들은 예수가 말하는 길을 공간적,물질적,지리적인 길로 생각하고 있었다. 즉 그들의 사고는 고작 3차원 내지 4차원에 국한되어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창세기 3:24에서 말한 것처럼 그룹과 화염검이라는 물리적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실은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셔서 인간이 사는 세상에도 임재해 계신다. 일방통행이라고나 할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보시고 같이 계시지만 인간은 그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거부하고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공간적인 거리나 장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신비한, 신령한 장벽이 있는 것뿐이다. 성소에도 하나님이 계시고 지성소에도 하나님이 계신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얇은 상징적 휘장이 드려있을 뿐이다.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의 죄이다. 피를 가지고 대제사장이 능히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피가 곧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예수는 이렇게 당신의 피를 흘려 대속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하나님의 임재 세계와 인간의 세계 사이의 휘장, 곧 장벽을 헐고 통하는 길이 되어 주신 것이다.

진리는 거짓의 반대이다. 사탄은 거짓말쟁이고 비진리의 총수이다. 세상에는 거짓이 판을 치고 있으며 따라서 혼란하고 어둡다. 하나님은 진리이시고 또한 예수도 진리이시다. 그러기에 진리이신 예수는 진리이신 하나님과 통한다. 따라서 진리 편에 서는 자가 하나님의 편이며 예수의 편이 되는 것이다. 8:32-36에서 말한 '자유케 하는 진리'와 연결하여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종교적 의미의 진리라고 생각된다. 인간을 죄에서 해방하여 자유케 하는 도리에 있어서 진리는 바로 예수라는 말이다. 인간 구원에 대한 거짓된 도리를 말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지만 진리는 오직 하나 예수뿐이라는 말이다.

생명. 세상은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난 이래 온통 죽음 속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세계에 오신 예수는 생명의 원천이시고 영원히 흘러나오는 생명의 소유자이시다.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는 누구든지 자기에게로 와서 생명수를 마시라고 권하신다(11:25).
이렇게 예수에게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얻고, 구원의 진리를 얻고, 잃었던 생명을 되찾아 영원히 누릴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는 자신 있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원주의자들이 예수를 통하지 않고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예수의 말씀과는 상치되는 주장이다.

< 7절 >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옛 사본들 중에는 이렇게 사실과 반대되는 가정으로 표현한 것들이 있다. 즉 [에이 에그노케이테 메], [카이 톤 파테라 무 에그노케이테 안] 혹은 [안 에데이테] 라고 된 사본을 번역한 것이다. 제자들이 지금 알지 못하는데 그 반대의 경우를 가정하고 말씀한 것이 된다. 그러나 더 권위 있는 사본들은 조건문에 현재완료형 [에그노카테]를, 귀결문에 [그노세스테]를 둠으로써 사실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너희들이 나를 알고 있으니 그렇다면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원문비평 난을 참조하라). 예수를 아는 사람은 곧 그의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계시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너희가 나를 알고 있으니 내 아버지도 알 것이다'라고 말씀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대한 설명을 8절 이하에서 더하셨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바로 위에서 예수는 `너희가 내 아버지를 알게 될 것이다'라는 미래적인 말을 했지만 여기서는 일보 더 나아가 `지금부터도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고 사실 이미 그를 보았다'라고 강조한다. 이론상으로 볼 때 예수를 본 것이 바로 하나님을 본 것이요 예수를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니까 말이다.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가 이렇게 신비하고 이렇게 밀접하다는 것을 그 때에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깨닫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히 그 문제를 질문하게 된다. 8절의 빌립의 질문이 바로 그런 것이다.

< 8절 >

이번에는 빌립이 질문을 한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4절 이하에서 예수는 당신이 어디론가 가는데 그 길을 제자들이 알고 있다느니, 당신을 알고 있으니 자기 아버지도 알게 된다느니, 지금부터 아버지를 알고 있으니 벌써 그를 보았다니 하는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들의 눈 앞에 예수밖에 안 보이시기 때문에 모두가 의문이 생겼을 것이다. 여기 빌립의 이름이 대표적으로 나오지만 실은 모든 제자들이 공통적으로 같은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아니 모든 인간의 공통적 의문이 여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게 해 주시오' 라는 말은 이성을 가진 현대인의 공통된 요구가 아닌가.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의 아버지를 볼 수 있으면 모든 의문이 풀리겠다는 말일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제자들로서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기들과 3년이나 같이 지내고 있는 예수가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라고 말할 때,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가 궁금했을 것이 틀림없다.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을 다 아버지로 믿고 있는데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실 때에는 어떤 독특한 것이 있는가 라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기독교 신관의 특이성을 묻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 예수의 아버지로서의 성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그 특이성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 9절 >

예수와 함께 오랫동안 같이 지내었지만 예수의 정체를 바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빌립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의 눈에는 인간 예수가 보일 뿐인데 그 이상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여기에서 예수는 당신과 아버지의 독특한 관계를 계시하고 있다. 신(神)이신 하나님이 여기에 육신을 입고 예수라는 존재로 와 계시기 때문에 예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것이 된다. 가령 얼굴이 아주 닮은 사람 둘이 있다면, 그 하나를 본 사람은 다른 하나를 본 것과 다름이 없다는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수다'라는 등식(等式)의 관계가 아니고, 삼위일체론 적인 신비로운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위(位, person)는 다르면서도 본체(體, substance)가 하나요 같으신 그러한 관계이다. 외형적으로는 예수가 사람이지만 그는 곧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표시되고 성육하신 로고스는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표시됐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두 개의 다른 개념이며 그 위가 서로 다르지만 유일신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존재양식의 표현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신비스러운 진리를 제자들이 깨닫는다는 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초기 복음서들에서는 취급도 되지 않은 진리가 제 일세기 말, 즉 교회의 신학이 상당히 발전된 시대에 비로소 요한복음이라는 색다른 복음서 속에서 소개되는 것이 아닐까

< 10절 >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예수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예수 안에 있는 그러한 관계란 서로 별개의 정체성을 가지면서도 하나라는 것인 바, 사람의 논리에는 맞지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 사실을 믿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는 것이면 다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엄연히 사실이고 진리여서 인간이 마땅히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좀 더 정확히 번역한다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말들은 나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당신의 일들을 하고 계신다'가 될 것이다.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레마]도 단순히 예수 자신이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속에 계시는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뜻이다. 둘째 부분에서 그의 일 [타 에르가 아우투] 라고 한 것은 `말씀'을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한 말인가 아니면 말은 물론이고 예수가 하시는 다른 모든 일도 예수 안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후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된다.

< 11절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피스튜에테 모이 호티]라는 구조를 번역한 것인데 목적어가 둘이 있는 문장을 얼버무려 놓았다. 영어 번역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 (NRSV등) 는 자구적으로 번역한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나를 믿으라'고 한 다음에 이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것을'이라고 했으니 연결짓기가 어렵다. `나는 이러이러한 존재다'라는 것을 믿으라는 말이든지, 아니면 `내가 이러이러하다고 말했는데 그런 말을 한 나를 믿으라'는 말일 것 같다. 10절에서는 [피스튜에이스] 가 직접 [호티]이하를 목적어로 받기 때문에 간단했는데, 여기서는 [모이]라는 여격 대명사 때문에 간단하지 않다. 어쨌든 예수와 하나님의 이 신비스러운 관계를 믿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와 하나님의 이 특이한 관계를 믿는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믿음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하실 수 없는 일들을 사람들 앞에서 행하셨고,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일들' ([타 에르가 아우타], the works themselves)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표징 [세메이온]이 되는 것이었다. 요한복음에서 일곱 개의 큰 표적을 소개했고, 그 밖에도 많은 표적을 행했다고 말하면서 그 목적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20:30-31).
14:12-14 예수를 믿는 믿음의 능력

< 12절 >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예수 안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예수가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예수 안에, 예수가 그 안에 있는 신비스러운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이기에 이론적으로 볼 때 예수를 믿는 자가 예수가 하신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옳다.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 안에 있고 예수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니 결국 예수 믿는 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신 일을 그 사람도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선다. 그뿐 아니라 예수가 세상에서 행하신 일들보다도 더 큰 일도 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신 다음의 세계는 제자들에게 위임된 시대로서, 제자들을 통하여 얼마든지 더 큰 일을 하시기로 계획하셨을 것이다. 예수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죽은 자들을 몇 살리셨지만 참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은 그가 죽으신 후에야 일어날 일이었다. 성령이 임하시고 그 능력을 힙입어 도처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맡겨진 것이어서 예수가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20:21-23; 16:6,11 참조).

< 13-14 >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제 예수 안에 있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궁극적 사업에 동참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목적은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이어서(요17:1)그 목적에 부합되는 간구라면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다. 내 이름으로란 말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형식을 갖추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그의 공로를 가지고 간구하라는 뜻이다. 13절에서는 누구에게 구하라는 말이 없어서 막연하다.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14절에서는 예수에게 구하라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본에 따라서 [메] 라는 목적어가 빠져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13절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후대에 삽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14절을 통해서 역시 하나님과 예수의 대등성을 발견하게 된다.

Ⅷ. 사 역

1 너희는 마음에 불안을 느끼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 집에는 공간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장소를 마련하러 간다는 말을 하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장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데려다가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
4 그리고 내가 가는 곳(으로)의 길을 너희는 알고 있다.
5 도마가 그에게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는 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길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6 예수가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곧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하나도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내 아버지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 아니 지금부터 너희가 그를 알고 있으며 또 그를 벌서 보았다.
8 빌립이 그에게 여쭈었다. 선생님, 우리에게 그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만족하겠습니다.
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긴 시간 너희와 같이 있는데 아직 네가 나를 알지 못하였느냐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 어떻게 너는 "우리에게 그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그렇지 않으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가 하는 말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신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는 내 말을 믿어라. 그러지 못하겠거든 (내가 한) 그 일들 자체를 보고 믿어라.
12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행하는 일들을 역시 행하고 또한 그것들보다 더 큰일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그것을 행할 것이고, 따라서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언가를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할 것이다.

Ⅸ. 메 시 지

1. 사람의 지상 생활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떤 가시적이며 유형적인 것에 의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상을 만든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 계신다. 그렇기에 2천년 전의 제자들이나 오늘의 우리들이 마음에 불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우상이나 인위적 종교는 허상이기에 그것을 의지해 보아도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는 당신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그의 삶에서 특히 그의 수많은 기적들과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입증하셨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우다. 세상에 믿을 만한 말이 어디 있는가 걱정하지 말라, 안심하라, 떨지 말라고 리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실 분이시다. 그분이 직접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고 또 자기를 믿으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셨고, 마음에 불안을 느끼지 말라고 타이르셨하는 말이 사방에서 들려오지만,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 말이다. 번번이 속았기 때문이다. 아니 지금도 속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달콤한 말을 듣고 따라가다가 실망하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것은 감언이설을 하는 사람들 자체가 거짓말쟁이고 알맹이 없는 허깨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진리 자체이시고, 그가 진리이심을 그의 삶과 행동으로 입증하셨다.

2. 그리스도는 그냥 자기를 믿으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을만한 내용을 풍성하게 제시하셨다. 인간의 현실은 고달프고 괴롭고 절망적이다. 돈과 명예와 지위와 기타 바라는 것을 다 가졌을지라도 결국 물거품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죽어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참된 삶의 고향을 찾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 눈에는 그곳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는 우리에게 그 home을 제시해 주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 있을 곳이 많은 집, 우리들을 기다리는 집이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결코 절망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으로써 끝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도 있을 곳, 우리가 갈 곳이 있는 그러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가치 있게 존귀하게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아무렇게나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특히 독생자 예수까지 보내셔서 인생을 그 [홈] home으로 데려가시는 공작을 하셨다. 결국 인간은 외로운 존재가 아니다. 절망적 존재가 아니다. 희망이 가득하고 가슴 벅찬 행복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존재이다.

3. 그리로 가는 길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실패하고야 말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리로 가는 길을 마련하시고 그 길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이다. 오직 길은 하나뿐이다. 예수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그러므로 가장 현명한 일은 길이신 예수를 붙드는 일이다. 그를 믿는 일이다.

4. 예수를 믿는 것은 인생의 [홈] home 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삶의 윤택과 풍성을 누리는 길이 된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큰 능력의 소유자가 되고 그리스도가 하신 그런 일도 하실 수 있고, 그보다도 더 큰일을 할 수도 있게 된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크리스천으로서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저 영원하고 무한한 미래의 세상에서도 형언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과 사업을 하게 될 것이다. 실망이나 걱정을 하지 말 것은 물론이고, 무한한 일감이 기다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부픈 꿈과 희망을 가지고 기쁜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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