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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절대적 증거 (요 0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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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의 깊음과 그 오묘함과 풍성함을 우리가 능히 다 추적해 내지 못할 정도로 커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 안에는 많은 진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중에서 우리가 가장 애송하고 좋아하는 말씀 16절 때문에 오히 려 우리의 신앙에 착각과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살펴 보고자 하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두가지 이야기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는 것과, 또 하나는 믿는 자의 결과와 믿지 않는 자의 결과가 어떻게 다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6-21절까지 말씀을 읽다가 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 원을 위하여 하실 일을 다 하셨으니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선택 뿐이라는 인상을 늘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후반부에 있는 말씀처럼, 20절에서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한다"는 것과 21절에서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온다"는 두 부류의 사람의 결국이 하나님께서 크신 사랑으로 보내 주신 예 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느냐 않느냐에 따른 결과라고 너무 쉽게 이해해 버립니다.

물론 이것이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더 많은 의미들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더 중요한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성경에 나타난 여러 비슷한 상황들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 니다. 출 3장, 사 7장, 사 37장을 차례로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출애굽기 3장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도록 하는 사 명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보면 모세와 하나님과의 대화가 좀 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가라!"고 명하시는 데 모세가 금방 "네"하고 대답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지를 살펴 보십 시다.

출3:11-12절에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 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 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여기서 모세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모세는 이 부름을 받기 40년 전에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이 애굽의 관원들에게 고 난 당하는 것을 보고 애굽 관원을 쳐죽인 일이 있었는데 그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 의 편을 들어 주셨더라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자그만치 40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목자 노릇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모세로 하여금 이 사건에 대하여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하나의 불평을 남겨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열심과 정열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려고 했을 때에는 함께 해 주시지 않으시고 왜 다 늙은 지금에야 오셔서 나를 가라고 하십니까 이제 제 나이 80입니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별로 신뢰스럽지 않습니다'하는 표현이 여기 은연 중에 나오는 것입니다. "왜 제가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야 하며 왜 가야 합니까 저는 하나님께 서 정말 내 편을 들어 주실런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제가 가서 애굽 관원들에게 내 백성을 내놓아라 그랬다가 안되면 그전에는 젊었을 때라 도망이라도 왔지만 이번에는 나이가 많아서 옛날같이 도망갈 힘도 없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당연히 그 증거 로 하늘의 천군 천사와 불수레 불병거가 모세를 도울 것을 보여주신다 든지 하는 것이 있어야 스토리가 제대로 이해 되어질텐데 그렇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증거로 보기보다 출 애굽의 결과로 보아야 할 말 씀입니다. 그러니 말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들어 기상대에서 일기예보를 하는데 내일 비가 오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증거로 무었을 보여 줍니까 위성 전송 사진에 나타난 일기도를 보여주면서 설명하 지요. "중국 대륙에 형성되어 있는 비구름 전선이 서서히 초속 10m의 속도로 우리 나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이 구름비 전선이 한반도에 도달할 것입 니다. 내일은 전국적으로 30-50mm까지 곳에따라 비가 내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상대에서 말하기를 "내일은 비가 오겠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 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내일 외출을 했다가 틀림없이 비를 흠뻑 맞고 들어올 것으로 알수 있습니다." 이랬다면 이것은 비가올 증거를 말한 것이 아니라 그냥 예언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어떤 징조를 제시하는 것을 증거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어난 일에 대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증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 방금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일에 대한 결과를 가리켜 증거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이 출애굽을 이루실 줄을 어떻게 압니까"하니까 그 대답이 "네가 가서 내 백성을 인도하여 내서 이 산에 와서 나에게 경배하게 될 것이다. 이 것이 그증거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국 출애굽 되고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증거로 보기 는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 이 출 3장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7장에서도 나옵니다.

 이사야 7장은 이스라엘 북왕조 분열 이후의 역사입니다. 북쪽 왕조는 이스라엘이 고 남쪽 왕조는 유다로 갈라져 있을때 입니다. 그런데 같은 민족인 남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은 별로 친하게 지내는 일이 없이 늘 다툽니다. 북왕국은 정치적 으로나 외교적 수완이 훨씬 좋아서 인근의 강대국과 연합하여서 유다를 치곤 합니 다.

유다나라 아하스 왕 때에 일이었습니다.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왕 베가가 연합군 을 형성하여 유다를 치러 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하스 왕이 전전긍긍하고 있 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서 아하스에게 염려하지 말라는 위로 를 보냅니다. '걱정하지 말라! 르신과 베가는 불타다 남은 부지깽이에 불과하니라 너희가 이기리라'고 말해주자 아하스가 묻기를 '우리가 이길 것을 무었으로 압니까 '합니다. 이에 그 증거로 사7:14절 말씀을 제시합니다.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 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런데 여기서 전쟁 승리의 징조로 말씀하신 이 아들이 언제 태어납니까 이 사건 은 자그마치 800년 이후에 되어질 크리스마스의 일입니다.

지금 당장 급한 것은 내일 전쟁을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하스 왕은 이 일로 인하 여 심히 떨며 어쩔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셔서 ' 걱정하지 말라 반드시 너희가 이긴다', '이길 것을 어떻게 압니까'하니, '800년 후에 네 후손 중에 메시야가 나리라 그것이 승리의 징조니라'고 말합니다. 아니 바 로 내일이 전쟁인데 800년 후에 태어날 자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37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앗스르 왕 산헤립이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산헤립은 자기 가 앞장 서기 전에 그의 군대 장관인 랍사게를 먼저 보냅니다. 랍사게가 와서 예루 살렘을 에워싸고 유다를 향하여 조소를 합니다. 도저히 살아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게서는 이사야를 보내셔서 또 그렇게 예언합니다.

'걱정하지 말라 너희가 이긴다', '이길 증거가 무었입니까' 이에 사37:30절을 말씀합니다.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이년에는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참으로 희안한 말씀을 주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일 당장 산헤립과 대항 하여 싸워야 합니다. 만약에 지면 모두 망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모두 죽거나 노 예로 끌려가고 부녀자들은 모두 종으로 잡혀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일 전쟁에서 '너희가 이기리라'하시므로, 그 증거가 무었입니까 하니 '너희가 너희 땅에서 난 것을 먹을 것이다. 너희가 씨뿌리고 추수할 것이다." 그러 나, 이런 것들은 전쟁에서 이기고 나야만 생기게 되는 부스적인 결과들입니다. 만 약에 진다면 그런 것들은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이길 수 있느냐는 것을 묻고 있는데 이기게 되면 생기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기고 나면 생기게 되는 결과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난제를 통과해야만 되어질 결과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증거가 늘 그렇습니다. 그건 증거가 아닌데도 하나님께서는 늘 그렇게 증 거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잠깐씩 혼동을 일으키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믿으면 내가 너희를 승리케 하리라!' 이렇게도 말 씀하지 않으시고, ' 너희가 이 싸움에서 이길 것이니 이기기 위해서 너희는 이렇게 하라!'는 조건도 없습니다. 다만 그 싸움에 대해서 걱정하는 우리가 싸움을 이기고 난 후에 생기는 결과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 대목에서 주의깊게 살펴 보아야 되겠습니다.

 다시 출애굽기 3장을 살펴 보십시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계신 지를 살펴 보십시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할 때에 하나님께서 무슨 대답을 하시리라고 생각됩니까 '모세야 가거라 네가 가면 에가 싸우리라 그리고 반드시 이기리라' 이렇게 나와야 자연스럽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출3:12절에 보면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 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함께 있을 것이니 그건 이기는 것이며 내가 함께 하는 싸움이니 그것은 내 싸움이므로 마땅히 이길 것이다" 하는 이야기 입니다.

같은 이야기가 조금 전에 본 이사야 37장에도 있습니다. 다시 보십시다. 사37:30-32절을 보면;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이년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 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는 자는 다시 아래로 뿌 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히리니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이 전쟁에서 이길 가장 확실한 근거가 무었입니까 하나님이 그 싸움을 싸운다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출 3장의 말씀이나 사 7장의 말씀이나 사 37장의 말씀 에서 공통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힌트 얻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바는 언제나 이 싸움을 이기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될 것이 무었 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따로 말씀해 주지 않습니다.(No comment) 그 대신 이 싸움을 통과한 다음에 우리에게 생기는 결과들만 증거로써 제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촛점은 지금 우리를 확신시키기 위하여 무었을 보이시려는가 하는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이 부분을 빼어 놓으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당장 눈 앞에 닥친 이 싸움이 더 다급한데 하나님께서는 전쟁에 대해서는 잠잠하시고 승리했을 때 일어나는 축복된 결과를 가지고 앞당겨서 선언하 십니다.

 하나님의 방법 중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싸울 싸움이 있고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는 싸움이 있다는 사실 입니다. 하나님이 싸우시 는 싸움은 그 분이 대신 싸우시므로 우리는 결과만 누리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때 에 우리가 경험하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것은 결과이지 싸움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 리가 직접 싸워야 하는 싸움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두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으로서 구원 이후에 믿음의 삶을 위하여 싸우는 싸 움들이 있습니다. 이 싸움은 성숙과 상급에 관한 싸움입니다.

둘째로는 우리가 싸울 필요가 없이 하나님께서 싸워 주시는 싸움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문제에 관한 싸움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선택도 없 고 언제나 모두를 하나님께서 직접 하십니다. 사탄을 쳐 엎으시며, 죄를 들어 던지 시며, 죄 값을 해결 하실 때에 우리는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 건이 출애굽 사건에서 홍해를 건널 때의 일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오늘날 너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잠잠히 서서 오늘 날 너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잠잠히 지켜 보기만 하라." 어떻게 라는 설명도 없고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니 그저 서서 보기만 하 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싸우실 때의 방법이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곧잘 혼돈하는 부분입니다. 출 3장 사건이나 사 7장 사건이나 사 37장 사건의 특이 한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편에서 보자면 모세가 준비되고 있는지 보냄을 받고 있는지 모르 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볼때에는 이미 모세를 보낸 시점이 시내산에 와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 님이 정녕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가기도 전에 이미 내려져 있는 결론은 "내가 정명 너와 함께 있으리니 가 서 내 백성을 인도하여 이 산에 와서 나를 경배할 것이니라. 이것이 내가 너를 보 낸 증거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이 일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애굽에 얽매여 있는 백성이 이 산에 와서 나에게 경배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내가 할 것이며 너희가 반응을 하든지 안 하든지 될 때까지 하시겠다는 의 지를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사야 7장의 임마느엘 사건은 무었입니까 아하스 왕은 내일 전투가 벌어 지면 질 것이 너무도 뻔하기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마침 이사야가 와서 하나 님의 약속을 전합니다. 틀림없이 유다가 이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전력으로 볼 때에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장 가운데서도 뚜렸한 보장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에 필요한 원군을 보내 주신다면 모르겠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유 다 가문에서 800년 후에 동정녀를 통하여 메시야가 탄생하신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한 여자는 어느 가문에도 소속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문에도 소속되지 못할 처녀 이야기를 왜 갑자기 필요로 하십니까 그리고 이 임마누엘에 관한 이야기를 볼 때에 메시야는 유다 지파에 오도록 되어 있지만 유다 가문이라는 이야기는 아닌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처녀가 아 이를 낳는다면 남편이 없을 것이니 어느 가문에도 소속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800 여년 후에 한 처녀가 유다 유다 족속으로 아이를 낳을 것이라면 유다 지파는 그때 까지 존속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아하스가 망하여 지파가 없어져 버리면 800여년 후에 처녀가 잉태하여 낳는 아들의 이름이 임마누엘, 즉 메시야가 태어나리라는 모든 성경의 예 언이 틀려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800년 후에 태어날 메시야가 유다 지파가 되 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은 아하스 편을 들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하스 왕이 어떻게 이길 것이냐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37장으로 와도 그렇습니다. 당면한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 고 단지 약속하시는 것이 있다면 밭에서 추수한 것을 먹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느냐 하면 그래야만 요한복음 3장이 달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다시 요3:16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 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함께 앞에서 살펴본 히스기야가 직면한 전쟁, 아하스가 직면한 전쟁에 서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이 오셔서 '너희들이 내편을 들면 이기게 해 주고, 내 편 을 들지 않으면 너를 지게 하리라'하는 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우리의 심각한 죄와 사망 에 관한 싸움터에 서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예수를 믿으면 너를 그 전쟁에서 이 기게 해 주겠고, 안 믿으면 나는 모른다' 하는 이런 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구원 문제에 관한 한은 하나님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견이나 도움 이 전혀 사용되어 질 수 없는 특별한 싸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우리의 싸움이 요구되는 예도 많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고 나를 의지하면 너희가 언제나 전쟁에서 이길 것이지만 너희가 나를 외면하고 나를 배반하면 너희 땅에 기근과 염병과 전쟁이 그치지 않으며 너희 가 늘 포로되며 늘 사로 잡히고 늘 망하리라" 이 말씀은 구원 자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구원 받은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답 게 사느냐 안 사느냐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부터는 하나님께서 우 리에게 간섭하시면서 "넌 내 자녀니라, 그런데 왜 자녀답게 살지 않느냐" 하시고 때리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만드시는 싸움에서는 우리의 할 일이 하나도 없 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편에 서느냐 반대 편에 서느냐 하는 싸움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결국, 요3:16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죽이러 보내신 것이지 조 건을 제시하러 보내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자! 나는 내 아들을 내 놓았는데 너는 날 위해 무었을 내 놓을래 이제 믿을테냐 안 믿을테냐"하면서 조 건적인 제시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원수와 싸워 사탄을 누르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 은 우리를 생명으로 초대하기 위한 하나님의 싸움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승리하신 복된 자리에 초대받은 자들 입니다. 마치 아하스 왕이나, 히스기야 왕이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워 주신 싸움에서 승리의 결과를 누리기만 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요3:16절의 이야기 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우리는 늘 이 부분을 혼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사랑의 승리냐 인간 반응의 결정이냐 하는 사이에서 나의 반 응의 결과로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렇게 길게 하나님의 싸움에 관해서 말씀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사랑과 구원의 집념의 결과로 보아야 합니다.

 <결론>

여러분이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오늘 이자리에 들어와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집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내가 희망이 없 어 보일 때라도 우리는 힘이 솟아 나게 됩니다. 지금보다 더 희망이 없고 좌절될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찢고 꺽어 피흘려 내 죄를 속하 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만큼 엉망일 수는 없는 것입 니다.

예수를 믿으십니까 참 잘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큰 은총이요 기적인 가를 기억해 보셨습니까 그것을 기억하신다면 삶이 더욱더 힘이 나고 변화될 것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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