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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와 동등인 아들 (요 05: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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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바로 앞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가 하면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 가에서 예수님 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므로 유대인들과 부딪치게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 님을 넘어뜨릴 구실을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있던 유대인들은 왜 안식일을 범하였느 냐고 꼬투리를 잡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 나도 일한다."(1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욱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자지간이라 하 면 지위 계급의 차이기 있습니다만 유대인들에게는 동격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몰아 부쳤습니다. 이렇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19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19절이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앞의 싸움에 대한 연결 부분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아버지와 다름이 없으니, 곧 나를 믿는 자는 아버지를 믿는 것이고 아버지를 믿는 자는 마땅히 나를 믿어야 되는 것이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어느 정도로 당연하다고 느끼십니까 얼른 생각해 볼때는 이해가 됩니 다만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못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를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면 왜 굳이 아들을 보내고 말고 하시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에게 여러가지 기 사를 보이시며, 사사들을 불러 일으키고, 다윗을 세우시고, 다니엘을 일으키는 등 의 일을 하셨다면 왜 갑자기 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둘이 똑같으시다는 말씀대로만 한다면 굳이 둘이 다 오실 필요없이 혼자서 하셔도 되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혼자 하실 때가 어떠하셨길래 새삼스럽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했는가 하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의 중요한 핵심입니다.

25절 이하에 보면 이 문제를 다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 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지금이 곧 구원의 때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이 본문이 안고 있는 역사 적 배경을 살펴 보아야만 제대로 그 의미와 깊은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이제 그 배경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시내산에 도착해서 백성들을 산 밑에 모아 놓고 자신은 산에 홀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받는 장면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20:18-21절을 보시겠습니다.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 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 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 니라" 이것은 모세가 첫번째 시내산에 오를 때에 홀로 은밀히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것 이 아니라 백성과 함께 산 밑에 모여서서 영광과 권능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 는 장면인데, 무슨 소리였나 하면 그것은 마치 우뢰 소리와 번개와 나팔 소리라고 그랬습니다.

백성들은 그 소리를 듣고무서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하도 무서우니까 모세에게 이 르기를 '당신이 듣고 와서 우리에게 전해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기 억해야 될 사건입니다.

왜 이것이 필요하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셔서 구원하시는데 있어서 가 장 큰 난관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우리를 만나러 오신다면 우리는 죽는다는 것입니 다. 왜 죽습니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죽습니다.

출애굽기 20:18-21 사건이 왜 이렇게 묘사 되어야 했는가 하면 그 당시는 율법을 주시는 때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율법과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 높으신 기준을 설정하는 자리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전부 모자란다는 것이 증명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직접 자원하여 '우리로 하여금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지 마시고 모세 당신이 가서 듣고 난 다음에 우리에게 전해 주십시오'라고 한 이 사건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 사건이 어떻게 더욱 확장 되는 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모세가 죽음에 임 박하여 그 당시 사건을 더 자세히 기록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신5:22-27절을 보시 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 니라 산이 불이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 리에게 보이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었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 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이니이까 당신은 가까 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여기서 특별히 기억해야 할 말씀은 24절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우리가 보았 나이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살아 있는 사람은 모세가 처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하나님을 보면 다 죽었습니다. 이는 하 나님의 거룩 앞에 견뎌낼 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는 말이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죽어 야 됩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도 죽지 않지를 않습니까 그러니 우 리를 대신해서 듣고 와서 우리에게 전해 주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 줄거리입니다.

이것은 28-31절을 계속 읽어보면 더욱 분명해 집니다.

그 당시 시내산으로 율법을 얻으러 올라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발하시면 그 말을 듣는 즉시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아도 죽지 않고 들어도 죽지 않을 자가 대표 로 갔다가 듣고 와서 말씀을 전해주면 그 말씀으로 인해 죽지 않게 되는 것이 시내 산에 오르게 된 목적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명기 18장에서는 이것이 조금 더 확장되어져 있습니다. 신18:15-20절을 보시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 하여 일으키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 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 가 죽을까 하나이다 히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내가 그들 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무릇 그가 내 이름으 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내가 고하라고 명하 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여기에서는 갑자기 모세와 같은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껑충 뛰어 말하고 있 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들을 수 있는 수준과 자격이 없어서 모세를 중보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 18장에서는 모세가 어느 편에 서있습니까 출애굽기 20장에서나 신명기 5장까지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듣고 백성에게 고하는 중보자였습니 다.

그런데 신 18장에서 모세는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고 또 스스로 중보자가 될 수 없 다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도 이스라엘 백성 중에 속하므로 자신에게도 중보 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18:15절을 다시 보면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리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을 지칭합니다만, 왜 모세가 예수님을 가리켜 '나와 같은 선지자' 라고 하였는가 하는 점이 이 사건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사건에 있 어서 모세의 역활이 '중보자'로서의 역활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16절에 계속 연 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호렙산은 시내산의 또 다른 별칭입니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 나오는 말씀 중 '네가, 너'는 모세를 칭하는 말이지만 계속 이어지는 문맥상 이스라엘 백성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모세가 상징적으로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지만 개인적으로 지칭될 때는 그도 한 인간으로 돌아가 이스라엘 백성 속에 거하게 된다 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접근하시기 위하여 중보자를 세우실 수 밖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자마다 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인지라 죄를 보면 그 죄에 대한 보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빛을 비추면서 어두움을 존재케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상징적으 로 말하자면 드라큐라가 햇빛을 받으면 녹아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새로운 방법을 채택하셔서 오실 수 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그 새로운 방법이란 하나님께 있는 영광과 심판에 관한 거 룩을 감추시고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갖 고 계신 계획과 우리를 향하여 베푸실 모든 것을 접적으로 전달하시고자 하는 것입 니다. 바로 이와같은 일을 예수님께서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려면 드러내지 않으셔야 하는 것이 있으데 그것 이 심판권입니다. 이 심판권을 감추시지 않으시면 그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 리가 만나기만 하면 또 죽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 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근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우리가 만나서 대화 를 하면서도 놀라지 않을 뿐 아니라 죽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듯이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모든 하나님의 일꾼들이 그런 대접을 받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복을 아는 자들이 복음을 들고 나갈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요구하 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고 외칠 때에 하늘에서 천둥 번개 가 화답하고 선포자의 눈에서 광채가 나서 듣는 사람이 두려워 떨며 믿는다고 약속 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된다면 듣기도 전에 다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된다면 구원하러 가기만 했다 하면 사람이 죽어 나가므로 복된 소 리를 전파하러 간것이 아니라, 재앙과 저주를 가져간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러니 차라리 안가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의 전파는 온전한 대접을 다 받지 못하는 자들로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고 싶으신데 구원하려고 문만 두드려도 집안에 있던 사람들까지 죽어버립니다. 우리를 구원을 하시고자 하시지만 만날 수가 없으니 어 떻게 하면 좋으시겠습니까 이리하여 찾아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권, 즉 그의 영광과 무한하시고 엄위하신 그의 권위를 전부 비우시고 마침내 종의 형체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심판권은 놔 두고 왔다고 놀려댑니다. 호랑이가 개천에 빠지면 강아지가 놀리고 용이 개천에 빠지면 미꾸라 지가 놀려 대듯이 놀리는 것입니다. 예수님만큼 이와같은 조롱을 철저하게 당하신 분도 없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 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요한복음 5:19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왜 이런 방법으로 말씀을 유도해 나가셨는가 하는 것이 감이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는 자꾸만 나와 하나님은 하나이고, 나는 그 분에게 말씀하신 것만 전한다, 본대로 한다, 구원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계속 반복하셨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직접 오실 수도 있었으나 구원하시기 위해서 중보자로서의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 다. 그러니까 무었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쓴 것일까요 모세를 생각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그렇게 요구했듯이--'모세, 당신이 듣고 와서 이야기 하시오! 직 접 듣게 되면 우리가 죽습니다.--그래서 내가 온 것이며, 너희를 구원하기 위하여 나를 이렇게 보이시고 보낸 것이므로 너희가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은 바로 내 말 을 듣고 믿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 보십시다. 요5:19-29절.........

그런데 여기서 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했을까요 이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속에는 보내신 분에 관한 이야기만 있 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우리를 죽일 의사가 없다는 의 미입니다. 오직 구원할 의사가 있으셨기에 예수님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신 그 의미를 알라는 뜻입니다. 그런 데 유대인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 위에 있는 예수님을 보고 '내려와 보라!' 고 조롱했습니다. 침을 뱉고 뺨을 쳤습니다. 그것을 만일 예수님께서 들춰 내시는 날이면 그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법궤만 만져도 죽었던 그 옛날을 기억하십니까 법궤를 달구지에 싣고 가는데 법 궤가 흔들려 떨어질 것 같아서 손을 댔던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조롱했으니 어찌될 것인지 말히지 않아도 뻔합니다.

25절을 다시 보십시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우린 죽은 자들입니 다.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 성을 들으면 정말 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감당치 못합니다. 그래서 감당케 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려내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지 금이 바로 '이 때'입니다.

이제는 이 말씀의 배경과 문맥을 거의 정리했는데, 아직 한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 니다. 그것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인간의 속성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일차적으로 무슨 실수를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 맨 먼저 요구하는 것이 당신의 권위와 능력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네가 참으로 하나님의 이들이어든 십자가 위에서 내려 와 보라!'고 아우성입니 다. 우리 마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십자가로 다시 올라가는 한이 있더라도 내려 와 서 뺨이라도 한 대 때려 줘야만 속이 후련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잠 하십니다. 이와같은 반응은 얼마나 놀라운 대목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일일이 변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일에 열심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 변명에 급급한 사람만 큼 가난한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인간의 아우성과 조롱 앞에서도 묵 묵히 당신의 일만 하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찬송을 받으시지만 어느 곳에선가는 모욕을 감내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이 말 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구원의 때라! 하나님이 나를 중보자로 세워서 보내신 것을 기억하라! 지 금 구원의 문을 열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 때문에 잘못 생각하지 말라. 나를 위하여 변명하지 않겠다. 하나님을 위하여 변명하지 않겠다. 그러나 너희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너희가 알아서 선택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끝 부분에 나오는 무서운 결론입니다.

28절의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는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죽은 자들이 주의 말씀을 듣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의미입니다. 이것 은 인류 마지막 날에 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세상의 심판주로 강림하시는 주님 의 음성입니다. 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강림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고 영원한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자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심판으로 떨며 떨어질 자가 있다 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어느 때에 준비해야 합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영원한 운명이 결 정되는 때는 지금입니다. 그 때에는 주님께서 더 이상 심판을 두고 오시지않습니다 무서운 심판의 권세를 가지시고 오시는 것입니다(27절). 이 말씀은 그를 믿는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얘기를 역으로 표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다른 구원의 방법이 없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오직 심판 뿐입니다.

안 믿는 자들을 나무랄 필요는 없습니다.

바다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긴급하게 구조선이 왔습니다. 구조선에서 손을 내밀었 는데도 그 사람에게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 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파도가 자동적으로 휩쓸고 갈 뿐입니다.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만 구해가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의입니다.

그런데 왜 27절에서 처럼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리스 도가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 말씀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 그의 영광과 권위와 자신을 변호하시는 것을 어떤 의미에서는 보류하시고, 우리를 향하여 그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의 팔을 펼치셨는가를 기억해야 되는 말씀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긍휼과 지비를 오늘날 까지 베푸시고 계십니다. 그렇다 고 하여서 함부로 농락해도 좋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러 한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화를 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심판하거나 화를 낼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은 구원의 구원의 때요, 은혜받을 만한 시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은 곧 지나갑니 다. 그리고 깜짝 놀랄 때가 곧 옵니다. 우리에게는 그날이 기다렸던 기쁨의 날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히 오지 않기를 원했으나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날이 되 고 말것입니다.

이와같이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심판의 날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 나 그 전에 먼저 은혜의 시간이 설정되어 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먼저, 여러분 자신을 정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여러분의 주변에 아직 이 말씀을 전해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에게 칼을 들고 가서 증명할 생각이라면 아예 그만 두시기 바랍니다. 다만 계속 당하고 지는 오해와 괄세 속에 서 그들을 항복 시키기 바랍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여 구원을 얻었으므로 그들도 역시 그렇게 구원 얻을 것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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