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왕이 되소서 (요 06:14-15)

첨부 1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그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나고 있는지를잘 보 여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다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하고 체험한 수많은 무리들은 예 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이에 그 의도를 아셨던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피하여 산으로 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사건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으려 하 였으며, 또한 예수님께서는 왜 그 무리들을 피하여 홀로 산으로 가셨는가 하는 점들을 깊이 확인해 봄으로써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신앙의 참된 기준들 과 근거들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여기서 사람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으려 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왕으 로 삼으려는 근거가 무었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본문 14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 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여기서 "그 선지자"란 신명기 18:15-18절에 그 근거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 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으로 남기는 말이었는데,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중 에 그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라"고 하는 유언을 하고 있 습니다. 이 말씀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에 해당되는 선지자가 바로 요한복음 오늘 본문에 나타난 "그 선지자"입니다.

모세 같은 선지자, 즉 모세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생각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해가 옳은 것이었는가 아니면 잘못된 이해였는가가 드러나게 될 것입 니다.

그러면 성경이 모세를 통하여 약속하였던 모세 같은 선지자란 어떠한 사람을 말 하는 것인지를 알아보고, 오늘 본문에서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었을 어떻게 잘못 이해하였길래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가시게 되었는 지를 본문을 통해서 찾 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개념 속의 모세란 위 대한 정치적 영웅으로 생각되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오병이어의 사 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정치적인 영웅으로 간주하고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 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모세라는 이름으로 대표되어서 '나와 같은 선 지자'가 올 것이라고 하는 이 말 뜻 속에는 정치적인 지도자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 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어떤 식으로 지적하고 설명하고 있는지를 추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왕이 되어달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요구입니다. 이스라 엘 백성들이 초대 왕으로 세웠던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사울 왕입니다. 사무엘상 에서 처음으로 사울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유명한 사무엘 선지자가 지도자로 있 을 때에 왕으로 피택됩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엘리'라는 사사 밑에서 큽니다.

그러면 사무엘상 앞에는 무었이 나옵니까 룻기가 있고 그 앞에는 사사기가 있고 사사시 앞에는 여호수아가 있고 그 앞에는 신명기가 있습니다. 그 성경의 배열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입니다.

사사기에부터 시작해서 사무엘상까지 이르는 시대는 사사가 다스리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룻기 맨 처음 부분에 사사가 다스리던 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사기는 물론 사사들이 다스리는 시대입니다. 사무엘과 엘리도 모두 사사들입니다. 사사를 현대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법관입니다. 다시말해서 사법권을 쥔 사람인데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 시대에서는 사법권을 행사하는 사람과 분립해서 입법권을 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는 입법권은 하나님 밖에 없었습 니다. 그러므로 사법권을 쥔 사람은 마치 삼권을 다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였습 니다.

즉, 사사라고 하면 지금의 행정의 행정의 수반인 동시에 선지자이기도 하고 제사 장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사시대를 지나서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 시대에 오자 백성들은 왕을 세우고자 고집을 합니다. 이것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를 역사적인 배경을 잠시 살펴 보고 오늘 본문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 7:1-2절에 보면 가나안 입국을 앞두고 모세가 백성들을 향하여 유언한 심각한 내용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 멸할 것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심각한 유언이었던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그곳의 본토 족 속들을 반드시 하나라도 남기지 말고 다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너무도 잔인한 명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 하나라도 남기지 말고 다 진멸하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종교적인 차원의 요구이었 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 족속들을 다 죽여야 한다는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 풍습이나 종교적인 원리에 절대로 혼합하거나 흉내내지 말것을 강조하는 강력 한 요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멸하라는 명령 뒤에는 언제나 연결되어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신7:2하-4절 까지를 보시겠습니다.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 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남겨두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풍속을 쫓아서 하나님을 섬기던 것에서 벗어날까 경계하여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멸하라는 가장 큰 이유 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1장으로 들어가보면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이 명령에 대 하여 어떻게 하였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삿1:19절을 보십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고로 그가 산지 거민들의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삿1:21절에는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 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 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고 기록하고있습니다.

이렇게 사사기 1장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백성을 쫏아내지 못한 기록 입니다. 쫓아 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철병거가 있기 때문이고 험한 산지에 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2장에서 보면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이렇게 날카로운 지적 을 하십니다. 삿2:11-15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 는 백성들의 신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 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 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다시 20-22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 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좇아 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 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사사기 1장의 기록에 의하면 철병거가 있기도 하고 험한 산악지 대에 있었기 때문에 가나안 족속을 좇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2장 20절 이하의 말씀을 근거로 해보면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그들이 "나를 순종치 않 아 쫓아내지 아니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될 중요한 싸움거리인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나안에 있는 족속들을 쫓아낼 만큼 무력적인 힘이 없 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은 철병거도 가지고 있었고 험한 요새도 가지고 있었습 니다. 이에반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변변한 무기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전쟁은 무력에 관한 전쟁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었습니다. 여러 분이 잘 아시는 대로 맨 처음 가나안에 입국하자 싸웠던 여리고 성의 함락 사건에 서 이스라엘이 화살 한번 쏘지 않고, 칼 한번 뽑아보지 않은 채 여리고 성을 무너 뜨릴 수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역사적으로 가장 험한 난공 불락의 대명사로 일 컬음을 받는 성입니다. 그런데 그 성을 단지 일곱 바퀴를 돌므로써 무너뜨린 것입 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철 병거가 있어서 못 쫏아냈고 험한 산지에 있어서 못 쫏아냈다고 핑계를 합니다. 성경의 기 록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은 것은 가나안 족속의 삶의 태도나 그들의 풍속을 좋아했기에 그 풍속대로 따라 갔다고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사기 전체의 기록이 무었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 보 다 강한 나라와 싸워 지게 하는 것은, 블레셋이라든가 미디안 암몬이나 모압이라는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 보다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때 에 이스라엘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고 배반하였기 때문에 이방의 손에 붙이시는 것 뿐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사사기에서 겪는 모든 환난은 그들의 무력이 약하고, 경제력이 약하고, 다른 민족보다 무기가 노후해서 전쟁에서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대가로 주는 벌이기 에 항상 이방 민족에게 파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무었입니까 이방 민족의 손에서 고통하며 신 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 받는 방법이 무었입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로 돌 아 오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선택 하였습니까 그것이 바로 왕을 세워달라는 방법으로 간 것입니다.

사사기의 기록은 이방 민족 앞에서 이방 민족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블레셋보다 무기가 나빠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기가 나빠서 진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 싸움에서 이기는 길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사사들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훌륭한 무기만 있었더라면 이길 수 있었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더라는 내용이 바로 사사기의 기록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사기를 지나 사무엘상 8:1-7절에 구체 적으로 나타납니다.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 아들들이 그 아비 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항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이스라 엘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 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 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내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 신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그래서 등장하는 왕이 사울 왕입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싸움의 쟁점이란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면적인 차 이점이라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괴롭게 하는 것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정치적으로나 군사력이 다른 민 족보다 못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하 나님의 명령을 좇지 않고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친히 징계와 벌로써 사용한 도구가 이웃의 나라들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되어버린 가장 큰 핵심적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 는 것보다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세상 풍속을 좇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 러므로 이 고통은 세상이 준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들이 다시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는 일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한 문제의 중심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고통 당하는 것은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그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 결해 주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는 계속 고집을 피우며 버티면서, 오히 려 그 고통을 해결할 다른 방법으로 왕을 세울 것을 주장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부모가 어린 자식을 때리는 이유는 그 아픔을 통해서 잘못된 것을 깨우 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는 이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고 때립니다. 그런데 하루 는 아들이 대장간에 가서 맞아도 아프지 않는 갑옷을 주문해서 입고 와서는 그 갑 옷의 값을 값을 달라고 조릅니다.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 않을 갑옷 값을 치르게 해 달라고 그 부모를 조르는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 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며 웃지못할 요구 입니까 '왕을 세워 주십시오!' 다시말해 우리가 지금 마음대로 가고 싶은 길을 다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우리의 요구와 욕심들을 다 이루어 줄 자를 하나님께 달라고 요구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분에서처럼 예수님은 무리들을 피하는 방법 이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건이 모세에게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해 모세가 어떤 상징성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모세는 참으로 많은 메세지를 갖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나와 같은 선지자'라고 얘기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이 만들어 내었습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입니까 아니면 애굽사람 입니까 물론 모세가 애굽 사람이지만 그렇게 단순히 말하기에는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민족, 즉 자기의 동족들 앞에서 동족 취급 을 받았던 적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명심해 두어야 합니다. 모세는 40년의 광야 생 활 중에서도 그의 백성들로부터 늘 그 권위에 도전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면서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보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구한 말 시절에 우리나라가 열강의 식민지 대상이었을 때, 자주권을 부르 짖었으며 한국을 개화시키려고 애를 썼던 선구자 중에는 서재필이라는 분이 계셨 습니다. 이 분은 민족적인 지도자로서 애를 많이 썼으면서도 힘을 다 발휘하지 못 한 사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가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한국 사람들과 동질감을 갖게 하는 데 상당한 장애 요소가 되었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고) 이승만 대통령이나 그 외의 다른 애국 지사들은 모 두 한국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서재필 박사는 미국 생활을 오래 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 시민권을 가지 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이와 같 은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한 번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80세에 부름 을 받았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40년 동안은 바로의 궁에서 자랐으며, 그후의 40년 은 먼 미디안 지방에서 동족과 인연을 끊고 지냈습니다.

만일 기미 독립 선언서를 분비하고 있던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 일본의 황실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가정한다면 누가 그런 사람을 그 큰 일에 가담 시킬 것을 논할 수 나 있었겠습니까 그가 아무리 진심을 가지고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지라도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사실일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피 식민 계급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들을 억압한 황실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비록 그의 뿌리가 이 스라엘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 사십년은 왕실에서 자랐 던 그 고귀한 몸이 양떼나 치면서 어렵게 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기 백성들이 애굽에서 어렵게 벽돌을 구으면서 고생을 하는 동안 그는 미디안에서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으면서 남의 장막 속에서 살지 않았느냐고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사실 편했던 것으로 치면 어쩌면 모세는 훨씬 편했을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모세를 '나와 같은 선지자'라는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상징화 시키려고 하셨을 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지금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서 자기네들 이 고르고 선택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또 한, 그들에게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의 필요가 무었이며 그 필요를 위해 제대로 적절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고자 모세를 그렇게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스라엘이 잘 납득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법 으로 준비하고 세우신 것입니다.

이제 무었이 문제인지 아시겠습니까 쉽게말해, 그들이 왕을 뽑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들이 목표를 정하고 자기네들이 가야 할 곳에 필요한 조건을 갖춘 자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식으로 일을 이끌고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냐하면 우리는 모두 다 자기가 가야 할 참된 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 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이 되게하여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키우시지 않고 으로부터 간섭하는 자로 상징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림잡아 삼백만 정도는 되었음에도 그 사람들을 세력화한 적은 없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 삼백만이 라는 인원 중에 칼을 뽑을 수 있는 자는 육십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는 뒤에 앉은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내리면 지는 전투였고, 애 급에서 나올 때에는 하나님께서 내리신 열가지 재앙 때문에 나왔지 그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감탄과 비명 소리를 내는 것 뿐이었 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 놀라서 소리 지르고, 가데스바네아에서 정탐꾼이 갔다 온 후 못 간다고 통곡하고, 만나밖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 고기를 달라고 요구하고, 이번에는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요구하고, 그러다가 배가 부르면 네가 뭔데 우리 앞에서 잘난 척하느냐 우리가 직접 지도자를 뽑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기껏 한 일이라고는 이 정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고라 자손이 모세에 맞 대항하는 지경에 이르는 어려움을 당하는 정도였지 한 번도 그의 백성들은 모세 편을 들거나 말을 잘 듣거나 혹은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무었을 상징하기 위해서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 중에 누구도 그들의 왕 을 선택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바로 우리의 싸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가고 싶은 길이 있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며, 그 일 을 이루기 위해서 능력을 가진 분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복하며 무 었을 하리이까 하고 물을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항복하고 경배할 대상으 로서의 능력자는 두고 싶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귀챦아지고 피곤해 지기 때 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알라딘의 마술 램프 이야기와 같습니다.

요청할 일이 있을 때마다 램프를 문지르기만 하면 검은 연기와 함께 마왕이 나타나 서 묻습니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이렇게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마왕이지만, 주인은 늘 알라딘인 것같이,오늘날도 우리는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주인은 언제나 우 리 자신입니다. 다시말해서 우리는 주인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종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을 그들이 왕으로 삼고자 추대위원으로 집요하게 설득 하려고 한 것이 무었 때문이었습니까 진정으로 왕답게 모시려는 것 때문이었습니 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무었을 해야됩니까"를 물어보고 항복하기 위해서 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들 생각에 이 사람만 상당히 이용하면 우리가 필요한 무었 이든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을 그들의 모 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해결사로 모시고자 한 것아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피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싸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싸움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도 주인으로 섬기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할 일이 너무 많고 욕심은 너무나 큽니다. 그러므로 그 일을 이루어 줄 동업자를 필요 로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을 내시고 나는 아이디어를 내겠습니다. 이런 식입 니다. 그리고 나눌 때에도 내 아이디어 방식대로입니다.

어떤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노숙을 하게 되었는데 저녁을 같이 지어 먹었습니다.

한 사람은 고기를 내고 한 사람은 물을 내었습니다. 나중에 그것을 똑같이 나누어 먹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은 물을 낸 사람은 물만 먹고 고기를 낸사 람은 고기만 먹어야 된다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힘을 주시옵소서! 돈을 주시옵소서! 이루어 주시옵소서!"하며서 내가 요 구 했던 일이 이루어 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신앙입니까 그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나님께서 가지신 고기 건데기를 나의 얇팍한 맹물에 끌여들여 모든 진국을 다 울궈 내놓고서는 진국 빠진 맛없는 건데기를 되돌려 주는 것을 어찌 신앙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지능 적이고도 수준 높은 사기라고 말한다면 심한 것일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속으시지 않습니다.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일찌김치 그 얇팍한 꿈을 깨 야 합니다.

 <결론>

오늘날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는 어떻게 키우고 있습니까 여 러분 자녀에게 출세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마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방법을 가르 치십시오. 하나님을 기뻐하는 방법으로 살아서 망한다면 망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어제 우리가 출세 지상주의 사명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왜 은연중에 자꾸 그렇게 자녀들을 몰아 부치는 것입니까 그러니 이제 순교할 각오를 가지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워 졌습니다. 아무도 망 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망할 것 같으면 아예 이 신앙을 포기하고 성공을 선택하 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큼 신앙이 아닌것도 없습니다.

신앙이 무었입니까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무었이 옳은 것이며, 무었을 해야 하는가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서 정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언제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였습니까 누가 언제 남보다 잘 난척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축복 받은 것이라고 가르쳤습니까 그런 가르침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기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을 복음 되게 하며, 영원을 준비하며, 내 이웃과 물욕으로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이 생의 자랑 때문에 다투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싸움이어야 합니다.

나와 내 자녀와 나에게 맡긴 가정, 나와 부딪치는 모든 사람 앞에서 우리는 이 세 상을 초월해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말해서 영원을 준비 하는 사람들이라고 증명되도록 삶을 살아가도록 요구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그러한 증명되는 삶이 얼마나 있습니까 이것이 주님의 최대의 관 심사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