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06:51)

첨부 1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이 사건을 통하여 영적인 멧 세지가 제대로 전달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사건 뒤에 부 언하여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곧, 예수님게서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 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이 오해되지 않기를 바라서 특별히 '만나 사건'과 결부시켜 설 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나 사건이 무었을 의미하며, 그것과 비교해서 말씀 하시는 생명의 떡은 과연 어떤 것인지 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론>

이 모든 것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6:47절을 버시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이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느니라"라고 되어 있고, 54절을 보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은 같은 의미이지만 53절 과는 좀 다릅니다. 5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 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53절의 말씀은 권면의 말씀이고, 47,54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결단과 선택을 한 자가 누리는 삶과 특권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경에는 대조적인 두개의 멧세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된다는 멧세지이며, 또 하나는 예수를 이미 믿은 자로서 믿는 자답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이냐 하는 멧세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선교 100년을 이제 넘기고 있습니다. 100년동안 신자들은 많이 늘어났 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전도 설교를 많이 해야 하는 선교 대상국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선택을 요 구하는 전도 설교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곳입니다. 지금와서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 면 우리 나라에도 이미 예수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예수를 믿는 것 자체가 선택 이 아니라, 그저 부모를 따라서 믿었는데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이 무었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전 도 설교가 많이 필요한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본문의 47절과 54절의 뜻이 이런 의미입니다. 먼저 47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하는 말씀이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선택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이 정의하는 "믿는다"는 단어 중에서 가장 대표적 인 정의는 요17: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아는 것'이란 깊은 교제를 의미합니다. 이름만 아 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성품이나 속성까지를 알 정도로 깊은 관계를 말합니 다. 마치 부부가 서로를 아는 것같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는 이 말씀은 권면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53절은 좀 다릅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 니라" 이 말씀은 권면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선택이나 결단을 요구하는 쪽이 아니라, 선택 과 결단을 이미 내린 자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부분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을 왜 만나와 비교하 여야 했는가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문제를 푸는 촛점입니다.

49절을 보면;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하면서 만나와 비교하고 있고, 58절에서도;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며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하면서 만나를 생명의 떡되시는 예수님과 비교하 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생명의 산 떡이라는 사실과 구약의 만나 사건과 어 떤 공통점과 어떤 대조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되심에 어 떤 도움이 되기에 이 말씀을 도입하셨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출16:1-4절을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 서 나온 후 제이월 십오 일이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 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 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 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 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 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율법을 준행하나 내가 시험하리 라" 이스라엘의 달력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달력처럼 1월, 2월 이런 식으로 되 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당한 그 때가 바로 1월 입니다. 즉 출애굽을 기념 하여 그 때부터 일년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 만나 사건은 홍해를 건너 광야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된 사건이라고 과 언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만나는 광야 생활의 시작부터 그들의 양식이 된 셈입니다 이 만나 사건이 얼마나 중여한지에 대해서는 신명기 8:1-2절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 습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 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따에 들어거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 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 는 너로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 는지 알려 하심이라" 광야 40년 동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가장 큰 결론은 저 들을 낮추시는 것이었습니다. 광야 생활의 40년 동안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의 연속이었고, 이에 반해 이스라엘 백성은 반항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들의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으며 발이 부르트지 아니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 니다. 또한, 굶주린 적도 없었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 셨고, 아침에는 만나로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골고루 준비해 주셨던 때가 광야생활 40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에 왜 그렇게 만나가 중요하냐 하면 만나 사건에서는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굶어 죽게 된 지경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들의 원망의 근거였습니다. 우선 먹고 살아야 하나님을 섬기지, 굶어 죽게 되었는 데 어떻게 섬기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을 확보해 주시 며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지의 여부를 보셨습니다. 또한 낮에는 더워서 못 살겠다고 불평을 할 때는 구름 기둥으로 해를 가려 주셨고, 밤에는 추워서 못 살겠다고 불평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면서 그들이 명령 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 지를 보셨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주셨어도 그들은 하나님 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다 들어 주셨건만,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절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원래 광야 생활은 40여년 간이나 하도록 의도되었던 것이 아니라, 1년 동안이었습 니다.

출애굽해서 시내산에 갔다가 가데스 바네아에 올라와 이스라엘의 열 두 정탐꾼을 보내고 이내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14장을 보면 그들이 돌아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거부합니다. 정탐꾼들이 와서 보고를 하는데, 젖과 꿀이 흐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싸워서 이길 승산에 없다고 원망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 께서는 이렇게 벌을 내리십니다. 민14:26-30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려질 것이라 너희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 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렇게 해서 광야 40년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광야 40년 동안은 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함이 있었고, 만나도 계속 내렸고 메추라기도 계속 잡혔습니다. 이 40년 동안 너희로 하여금 광야를 걷게 한 것은 너희를 시험하여 너 희를 낮추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심 같이 정확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저들이 배가 불러도 삼기지 않았고, 따뜻해도 섬 기지 않았듯이 이제는 무슨 핑계도 갖다 댈 것이 없었던 시기가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그 만나를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한 영적인 양식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만나는 그들에게 하루를 존속시키지만 그 존속된 하루하루가 연 결되어 가나안 당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저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한 에너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 6장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를 믿는 자를 향하여 "내가 생명의 떡이 다 나를 믿어야 천국에 들어가니 나를 믿으라" 이런 식으로 먼저 권면하고 계신 것 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서 알아듣고 결단 할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렇 게 권면하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필요 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은 철저히 귀머거리요 소경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 51절에 의하면;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 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하셨는데 이 말씀은 바로 주님 자신을 희생으로 주 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떡은 일차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일입 니다. 이러한 일을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설명고 권면한다고 하 여서 사람들이 알아듣고 결단하고 영접할 수 있는 문제라면 십자가는 차선책에 불 과한 것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만이 제일 중요한 문제의 열쇠인 것입니 다.

우리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죽으러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난 지금도 자신의 죽으러 오심에 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 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어떤 효과가 생겼습니까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만이 주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이 말씀을 알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은혜를 강조하는 것은 지극히 당현한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이 고백이 튀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결단한 것은 자신이 한 것입니다만 아무나 결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단이란 은혜 다음 에 맺혀지는 열매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의 메세지는 그것으로 인하여 알아듣고 결단할 사람들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로 믿게될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믿게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생명의 떡을 위하여 피를 흘리고 살을 찢은 것이 무었이며, 그가 어떻게 믿게 되었으며, 또한 그가 받아서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믿음과 은혜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똑바로 알고 오해하지 말게 하시고 자 하시는 의도와 뜻이 더 많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대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그렇게 자 신만을 위한 만나로 사용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말씀이 촛점인 것입니다.

만일 같은 본문을 불신자들 앞에 놓고 전도 집회를 하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 집니다. 그러면 '여러분, 지금 빨리 결단하십시요!'이렇게 말해야 맞는 것입니다.

'지금 믿으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이렇게 오셨습니다. 이 생명 의 떡을 받으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미 결단하신 분이며, 하나니의 자녀가 된 분들입니다. 이같은 분들을 위하여서는 이 말씀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적용해 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를 믿는 것을 다만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필요와 방편으로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를 아는 것은 이 세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는 세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잘 모르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오해만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무었을 오해하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 무었인지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 수님이 주신 생명의 떡을 만나와 비교하여 그저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룰 수 있게 힘을 주고 에너지를 보충해 주는 양식으로만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나를 주 신 것은 가나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해서이지 광야 40년을 헤메다가 죽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려주신 그 만나를 광야를 헤메며 자신을 위하여 다 소비해 버렸습니다! 과연 주님의 만나를 이렇게 사용해도 되는 겁니까' 이렇게 우리에게는 멧세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고로 몇말씀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4:13-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 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 서;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여기까지는 괜 챦습니다. 그 다음에 말을 보십시오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 말로 보아 이 여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물을 어떻게 생각한 것입니까 그것 생활에 이익과 편리함을 주는 물로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었 때문에 예수를 믿으십니까 예수를 믿어서 어떤 이익이 있을 것 같 습니까 병원을 안 가도 되고, 학교를 안 가도 되고, 돈 벌러 안 나가도 된다고 생 각해서 예수를 믿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살고싶 은 이 땅에서 잘 살아 보겠다는 것으로 도입히고 믿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들은 생명의 떡이고 생수이지 이 세상애 필요한 것 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다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에게 가장 불행한 일이 무었이겠습니까 신자 된 다음에 신앙 생활 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부담이 되는 것은 죄를 지으면 왠지 모르게 하나님 앞에 거역했다는 것 때문에 부담이 생깁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를 하기 는 하는데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회개하지는 않습니 다. 오히려 이렇게 회개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에게 끊임없이 만나, 즉 영의 양식을 주십니다. 그것은 하 나님의 법칙대로 살고 그의 계명대로 사는 데 필요한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자꾸만 누적이 됩니다. 생수도 쌓이고, 생 명의 떡이 쌓이는데 한 6개월쯤 되면 너무나 많이 쌓여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모두 가지고 와서 반납을 합니다.

'주님, 너무나 무겁습니다. 다시 받아가 주시옵소서' 이렇게 지금까지 받은 모든 것을 반납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세상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열심히 자기 힘 으로만 세상을 살다가 다시 쌓이면 다시 싸가지고 와서 도로 바칩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에 만나를 주고, 율법을 주 고,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들을 인도하던 때와 오늘날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과는 전혀 다른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구약적 방법이 훨신 더 좋다고 합니다.

전쟁을 할 때에도 '이 전쟁을 하리이까 말리이까'해서 '하라!'고 하면 하고, '어 느 지파부터 올라가리이까'하고 물어서 가라고 하는 지파부터 올라가면 됐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쉬우므로 옛날이 더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구약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 시대가 훨씬 좋습니다. 만나로 주셨던 것에 비해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인도 하심이 사건적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도들의 신앙은 그 평균 수준이 주로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되는가, 어떻게 결례를 지켜야 하는가, 어떤 방법 으로 제사를 드려야 되는가 하는 식으로 그 신앙이 사건적이고 조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 신앙이 사건적이거나 조목적이지 않고 인격적입니다. 신 앙의 대상이 직접 하나님 자신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불안한 마음은 하나님의 눈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필요한 것들을 주시고 매사에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하 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떡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죽었던 자리에서 살아있는 자리로 옮겨지는 데 그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거듭나 게 하시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 말씀하신 것같이 우리는 거듭난 자들입니다. 즉 생명의 떡을 이미 받은 자들입 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봅니다. 신령한 눈을 떠서 이제 계속 눈 뜬자로서 살아갈 모든 영적인 축복과 능력들과 원리들과 방법들 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떠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보았는데, 눈을 뜬 자로서 주신 것을 바로 사용하며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는 나의 삶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 다. 내 길을 요구하면서 이미 보아서 알고 이쓴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내가 가는 길에 도움을 주시는 분 정도로 밖에는 우리에게 불림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병이어의 사건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우선 주를 아는 문제가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혼동에 빠질 우려가 있으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사람들에게 보이자 사람들이 뛰어와서 예수 그리스 도를 붙잡고 맨 처음 요구한 것이 무었이었는가 하는것을 6:26-27절에 이렇게 지 적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은 양식을 위 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우리가 물어볼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참으로 신앙 생활을 할 각 오가 되어 있는가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정말로 세상으로 향하던 나의 생애가 하 나님을 향하여 바꾸어 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마땅히 바뀌어야 하고 큰 각오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우리의 마음 속에 뿌리 깊히 박혀 있는 것은 좀 더 편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이웃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바로 이것을 고쳐야만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었입니까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 진리대로 살자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렇게 부름을 받았고, 우리는 그렇게해야 될 것을 알고 있 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됩니다. 물론, 오래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알고 있기에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더 떳떳하게 다 그런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 합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가서 얼굴이나 비치면서 한 번 들어주고, 세상을 살 때는 눈치껏 살아야 된다는 이야기가 바로 신자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눈치껏 살지 못하면 도리어 비웃음을 당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행동들을 내려다보며 웃으시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세상과 타협해서 잘 사는 것이 똑똑한 것인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결론>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했습니다. 지나 온 날을 돌이켜 보십시요. 살같 이 빠르게 왔습니다. 앞으로도 잠깐이면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으시대는 것을 위해 살지 마십시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에서 재미있게 살고 싶어 하는지 모 릅니다. 그러니 마지못해 교회 나오는 신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어 억 지로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억지로라도 나오는 것이 안 나오는 것보다 훨씬낫습니 다. 그러나, 그렇게 나오는 것보다, 나를 불러 초대하신 예수님께서 내게 베푸시고 먹이시고 누리게 하실 신령한 것에 감격하고 체험하셔야 합니다. 신자에게 이같은 하늘의 신령한 것이 없다면 무슨 낙이 있으며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많은 신자들이 이렇게 살지를 못합니까 그것은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아서 그렇습 니다. 한국 교회의 분위기가 바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성공 과 물질적인 면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세상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그것을 받아 주는 사람들과 타 협해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아무데나 가서 놀다가 주일날 한 번 교회에 참석하여 헌금이나 내는 것을 최상으로 알기 때문에 언제나 주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다행이도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살아 생전에 혼이 나게 해주시면 그나마 축복입니 다. 그러나 죽어서 혼이 날까봐 그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돌이켜야합 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성실해도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 저 사람은 마 땅히 대접을 받아야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이 사람은 오히려 대접을 받는 것이 이 상하게 보여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의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이 항상 일치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의 기준들 중에서 우리로 하여금 가장 못 함게 하는 것이 무었인 지 압니까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하지 않은데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 자의 가장 큰 특권과 평안이 어디서부터 오는가 하면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고통 받기를 원하신다면 나는 기쁘게 받으리라' 이런 태도입니다.

돈이 없어 예수를 못 믿을 사람에게는 절대로 그런 시련을 주지 않습니다. 돈이 있어야만 예수를 간신히라도 붙잡거든요. 그러므로 우리의 시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전 생애에 걸쳐 가진 것 때문에 자랑스러워 하고, 가지지 못한 것으로 인해 부끄러워 하지 않게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매일 우리에게 다가와서 할큅니다. 물론 아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이 주는 것으로 인하여 배부른 자가 어니요, 세상이 주는 것으 로 인하여 배고픈 자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다른 물과 다른 양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