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자기 증명 (요 07:14-19)

첨부 1


예수님께서는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지 않겠다고 말씀 하셨지만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숨어 지내시다가 명절 중간에 마침내 자신을 드러내시어 가 르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그것으로 인해 유대인들과 논쟁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유대인들과 논쟁한 것의 가장 큰 핵심이 되는 것은 율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그 사건이 안식일이 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율 법 전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러면 이 논쟁을 통해서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확인시키고자 하는 것이 무었인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자 배운 적이 없는 자가 어떻게 가르치느냐는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야 할 필 요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는 고유한 언어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은 아람어로 기록된 곳도 있지만 거의 다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람어를 썼습니다. 아람어란 바벨론이 쓰던 문자였습 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로 잡혀가 있었습니다. 포로 생활 중에는 자기들의 고유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아람어를 써야 했으므로 아람어가 그들의 말과 글자로 바뀌어진 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성경을 읽고 가르치던 말이 히브리어 였으므로 그런 말이 당연히 나오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히브리어를 일고 아는 사람 들은 종교적 지도자들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히브리어를 아는 예수님이 신기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배우지도 않은 자가 감히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데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여기서부터 사건을 확대해 나가십니다. '나는 내 교훈을 이야 기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말을 하려고 왔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 해져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내 스스로 무었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보냄을 받 아서 왔다. 내가 하려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있어서 상당히 중심이 되는 싸움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나는 내 일을 하러 온 것이 아니요 내 말을 하려고 온 것도 아니다. 나는 보냄을 받아서 왔고 보낸 자의 뜻을 이루러 왔다'는 이 말씀을 17절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하면서 19절의 율법으로 연결시키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었는데 왜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느냐'는 말씀 속에는 상당한 비약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7:14-30절 까지의 내용을 풀게 해 주는 열쇠입니다.

예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싸움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율법이 무었을 위 하여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은 지키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율법을 지키는 자를 골라 내려고 오셨습니까 아니 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를 깨우쳐서 율법을 지키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까 둘 다 물론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주신 명령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지적하는 것은 율법 을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율법은 오히려 우리를 세워주지 못하고 정죄했 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같은 말씀 앞에 항복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굳이 율법 문제를 꺼내셔서 유대인들과 부딪치며 논쟁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 논쟁 이야말로 오늘날까지도 인간들이 가장 오해를 잘하고, 가장 많이 의심하고, 가장 항복하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다시 살펴보기로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자신의 전 생애에 관한 기록을 남기셨습니다.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무슨 일을 하셨는가 하는 것을 기록하셨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결단코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이렇게 하지 말아 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우리를 위하여 죽으러 오 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받는 것으 로 처음부터 못을 박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 설교,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 그것으로 인하여 인간은 항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난 다음에 어떻게 말하는지 아십니까 '당신은 어찌 그리 내 이웃에 살면서 나한테 교회에 가자고 한 마디도 말하지 않 았습니까 그때 이야기 하였더라면 그 즉시 예수를 믿을 수 있었을 것이고 좀 더 일찍 믿었을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절대로 믿는 것은 아닙 니다. 은혜가 임해야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율법에 관한 문제는 율법을 알지 못하고 오해하여서 구원을 못 받은 사람들에 게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문제 때 문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율법을 오해하고 있는 자들도 없었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기만 한 것으로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 할 정도였 던 것입니다.

율법이란 자기가 가진 지식과 지성과 능력과 열심으로부터 출발해서 구원에 도달 하게 되었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들어 '살인하지 말라!'라고 말하였을 때에 '안 하면 될 것이 아니냐 그러면 제대로 치기는 것이 아니냐' 이런 식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가리켜 '너희들은 율법을 지킨 적이 없다'고 하실 때에 유 대인들은 '우리는 지금까지 율법을 잘 지켰다!'고 주장합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이들의 주장에 대하여 반문하시기를; '그러면,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하며 지적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님을 못박았습니다. 강도였던 바라바를 십자 가에 못박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으라고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율법을 가진 민족이 말입니다. 이것보다 그들의 인간 됨을 잘 지적하는 것도 없습니다.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 3년 동안 의 공생애를 보내셔야 했던 것입니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그가 생명을 갖고 있다는 표이다' 이것 이 바로 결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는 예수를 믿게 마련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을 얻은 조건이라기 보다,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떨어지는 행 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이것을 이렇게 어렵게 확인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너무도 많은 신자들이 자기가 얻은 구원을 율법적인 차원에서 오해함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은혜인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간단한 이 근본적인 기초를 잘못 낳는 날이면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계속 쌓아야 할 것을 쌓 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신자들은 신앙은 마치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여 놓고 늘 받치 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제대로 쌓아지지 못한 신앙의 벽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 기가 들은 설교 가운데서 은혜스럽다고 여기는 부분인 하나의 결론을 들고 와서는 일단 창고에 쌓아 두는 것입니다. 어느 날 어느 교회, 어느 기도원에서 받은 은혜 이지만 그것은 창고에 쌓여 있을 뿐이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잠깐 이방 세상에 나갈 때에는 떠받치고 있던 것을 할 수 없이 잠시 무너뜨렸다가 돌아 와서는 다시 아무리 쌓으려고 해도 잘 안 쌓여지니까 목사님과 상담을 한 다음 다시 떠 받치고 서 있는 격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신앙같이 보인다는 말 입니다.

이것은 어딘가 우리의 신앙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잘 못된 근거는 은혜가 무었인지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구 원을 못 얻었다든지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잘못 정리하고 있다는 뜻입 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논쟁의 배경을 초막절에다 맞추고 이미 처음부터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일종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일년 동안 농사지었던 곡식들을 거두어 들여 서 곳간에 쌓아 놓고 기쁨의 절기로 보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수확하고 거두어 들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절기를 지킬 때에는 모무 초막에 나가서 지키게 되어 있습 니다.

무었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습니까 그것은 네가 소유한 것과 네가 거둔 것들과 네 가 기거하고 있는 집은 원래 네 것이 아니었고, 너는 다른 곳에서 이곳에 왔다는 확인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이것은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 으로 말미암아 출발되어지거나 시작된 것이 아닌 것을 지금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켜 주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에서 은혜라고 밖에는 말하지 못하 는 것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무었인가를 소유하게 되면, '나는 너하고 달라서 이런 것들을 얻었느니라' 그러면서 뽐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앙 의 성숙에 있어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논쟁은 우리 가 새생명을 얻을 때에 일어나는 논쟁이 아니라, 이미 새생명을 얻고 난 다음에 일 어나는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 삼년 반동안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말씀하시고 논쟁하신 것은 바로 이 같이 그 신앙의 근거가 혼동되어 오해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어차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면 언제 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까 태어나자마자 가능하면 일찍 지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30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리셨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너희 들, 내 심정을 알겠느냐'고 날마다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30년을 참으셨다가 정작 3년 반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에 꼭 필요한 말씀 외에는 하 실 틈도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 바로 '율법이란 무었이냐 오해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시고 계시는 것 입니다.

본문 14절부터 다시 보시겠습니다.

"이미 명절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말씀을 배우지 아니하였는데 어떻게 가르치느냐 이것이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율 법에 관한 유일한 원리입니다. 백성들의 그 말에 예수님은 근거를 따지기 전에 내 말이 맞는가 안 맞는가를 하나님의 법과 맞는지 틀리는지를 보라고 하십니다. 유대 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안 맞을 수밖에 없는 것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유대인 들에게 있어서는 죄목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답변하시기를; 요7:22-23절을 보십시다.

"모세사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 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모 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한 것으로 나를 노여워하느냐" 유대인들의 율법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라는 율법이 있는 것만큼이나 할례를 행하 라는 율법에 대하여 언급하십니다. 할례는 태어난 지 팔일만에 행해야 합니다. 지 금의 예로 바꾸면 주일을 지키고자 하지만 주일에 출신을 하면 그 산모는 주일을 지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도 아이를 낳고 팔 일째 되 는 날이 안식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할례를 폐할 수가 없으므로 안식일 임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안식일을 범하지 않느냐 할례라는 법을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을 범하지 않느냐 그런데 내가 그것보다도 더 중하고 급한 한 병자 를 사탄의 권세로부터 놓아 준 일을 가지고 나를 책잡을 수 있느냐 지금 너희는 법을 지킬려는 것이 아니라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아렇게 노여움에 관한 싸움이 라고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울법을 폐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 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즉 이것은 감정의 싸움이지 율법의 문제가 걸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을 보면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싸움은 지금 아주 격렬하게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 논쟁을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끌고가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논 쟁을 걸고 있는 것은 율법에 관한 싸움이 아니라, 율법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는 데도 왜 예수님을 죽여야만 합니까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율법을 지키는 자라면 마땅히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 이 옳습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예수를 죽이려고 하 는가에 대한 힌트가 그 중심과 저의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18절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너희는 율법을 스스로의 영광을 취하기 위하여 밖에는 쓸줄을 모르는구 나! 하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얻은 자이건, 구원을 얻지 못한 자이건 간에 율법이 무었인지, 은혜가 무 었인를 확인하지 못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끌고가게 되는 것입니다.

롬 3:24-27절을 보시면 율법과 자랑에 관해 가장 좋은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 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 재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 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 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 랑할 데가 어디 있느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 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율법과 은혜의 가장 큰 차이는 거기에 자랑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됩니다. 율 법을 사람들은 '나는 지켰는데 너는 왜 못 지지키니' 이런 차원으로 밖에는 사용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데 너는 왜 안 믿느냐' 이런 방향으로 나가는 사람은 아직도 은혜가 무었인인지 잘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은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너희는 율법을 동원해서 한다는 일이 율법을 지키는 것과 안 지키는 것이라는 외형적인 근거를 제시해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밖에는 한 것이 없다. 그것이 구원인 줄 아느냐 결코 아니다. 오히려 너희는 지금 내가 오자 나하고도 경쟁을 했다, 너희가 하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 로부터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가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 에서 누가 누구보다 더 나은가 하느 싸움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내가 너 희들이 자랑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자 너희는 너희 자랑을 보호하기 위하여 나마저 죽이려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지적인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야기 합시다.

예수님과 이런 싸움으로 인하여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잡아오게 하기 위하여 병 졸들을 보냅니다. 45-49절을 보시겠습니다.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 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 다" 본문을 보면 예수를 잡으러 갔던 하속들이 되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는 잡아올 만 한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알기 때문에 그런 데에 미혹되지 않지만 너희같이 무지한 것들은 결국 미혹되지 아니하였느냐'는 이 말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듣는 말입니 다.

'뭐 예수를 믿어 자고로 똑똑하고 잘 사는 사람치고 예수 믿는 것 봤어 실패하 고 못나서 올 데 갈 데가 없으니까 교회에 가는 것이지. 교회에 가봐라. 어디 남자 가 많는 것 봤어 거의 다 여자와 아이들 뿐이지'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듣는 모욕입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갖는 일반적인 죄의 심성입니다.

죄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까지 떳떳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은혜로 구 원을 얻고 싶어 하지 않고 하나님께도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떳떳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 머리를 땅에 묻고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입장은 결단코 배격합니다. 불신자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만 예수를 믿 는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무었인가를 주의깊게 들으십 시오 이 논쟁은 25절로 이어집니다. 요7:25-28절을 보시겠습니다.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 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 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예수께서 성 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 나"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는 말에 유대인들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라고 했습 니다(30절) 그러면 유대인들이 가장 분노한 부분은 어느 부분입니까 그들이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신앙과 신앙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데 있어서 기억할 것은 참 신앙인은 우리가 모 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르는 것이 있다는 말에 화가 난 것은 신앙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자존심에 관한 싸움이었던 것입니 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신자란 자존심을 버릴 수 밖에 없는 존재 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갖고있는 그 무었도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것 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 다고 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쓸데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손해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 중에서 필요한 것이 무었이 며, 예수를 믿는 것에 도움이 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자동차가 있어 도움이 됩 니까 물론 교회 올 때 편하게 빨리 오니까 좋습니다. 그러나 그 자동치를 가지고 교회를 온 것과 교회에서 멀리 떨어질 때를 따져볼 때 어느 쪽이 더 많습니까 그러면 돈이 많은 쪽이 예수를 믿는데 좋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 많 으면 헌금 내는 것이 아까와서 아주 인색해 집니다. 없는 사람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똑똑해서 예수를 잘 믿을 수 있습니까 좋은 신앙을 가진 사 람 중에는 언제나 똑똑한 사람들 보다 단순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가지고 끈질기게 논쟁을 하실까요 그것은 이것만큼 우리에게서 뿌리가 뽑히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 분입니다. 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똑똑해서입니까 빨리 주님을 알아 보았기 때문입니까 그것은 38년된 중풍병자를 보았기 때문도 아 니요, 여러분의 자녀를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기 때문도 아니요, 오 직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구원된 자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런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게 되자 우리는 모두 다 조금씩 눈을 뜨게 되어, 그 리스도 안에 있는 축복들과 생명들과 약속들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더 많이 알게 된 자가 적게 아는 자를 향하여 자기 과시를 하게 된 것입 니다. 그것은 자기가 어느 속에 있으며 어느 기초 위에 있는 지를 잘 모르기 때문 입니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있으면서도 너는 왜 뒤에 앉아 있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왜 자꾸만 그런 속성이 나옵니까 그것은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 직도 자기를 근거로 하고 있는 자요, 자기가 가진 실력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인정 받고 있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다른 단체입니다. 다른 이유는 모두가 은혜를 기억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혹시라도 저 사람보다 좀 나아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 코 자랑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아는 집단이기 때문에 용서가 있고 기다림이 있고 무었보다도 따뜻함이 있는 곳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잘 잊어버립니다. 그가 갖고 있는 큰 은혜의 기초를 망각하고 자기는 원래부터 별종의 부류인 것같이,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 것 같이 모두가 떳떳하고 잘난척하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이웃을 죽이 므로 오늘 본문 말씀처럼 율법을 들어 율법을 파기 하는 자들이 되어거고 있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우리를 위해 선택된 민족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가진 것 때문에 스스로 망할 수 밖에 없었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대표되는 인물 한 사 람을 예를 들어서 성경은 이 말씀으 ㄹ더욱 더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 처럼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정성을 가진 인물도 없었습니다. 그 런데, 그가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열심과 정성이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 서 가 담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을 향해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 말에 사울이 얼마나 놀랐는 지 모릅니다.

'제가 언제 무었 때문에 주를 핍박했습니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는 하나 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편을 든다는 것이 지나쳐서 하나님을 핍박하는 일이 되었 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남은 생애를 참된 주의 사역에 더 큰 열심으로 불사를 것 을 결심했는 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와 같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분명히 구원을 얻 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바울로 변신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짚어 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사울인지 모 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가 무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최선의 것들을 모아서 모두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신앙이라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뭉쳐서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버리는 작업이 요, 죽이는 작업입니다.

 <결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정성이 있다면 그것은 자랑스러운 정성이 아니라, '주여, 저는 십자가 아래서 죽었습니다. 이제 종이 가지고 있는 인생과 이름을 써 주십시오!'이지, 우리가 갖고 있는 학력과 지위도 하나님을 위해서 그것 자체가 빛 을 발한 적은 없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일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일했다고 하나 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오늘 받아야 할 지적입니다.

우리는 마음 깊이 물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바로 이 물음에도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웃도 사랑하고 계십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밝히신 얘기입니다. 계명 중에 가장 큰 계 명이 무었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 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 이 사랑하라" 여러분은 이웃을 사랑하는가 보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첫째 계명도 틀린 것이라고 말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이 말씀을 들고 나가서 '당신은 왜 이웃 을 사랑하지 않느냐'하는 식으로 율법을 심판용으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그것을 들어 '당신네들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오'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 가 그 사람에게 심판과 저주를 벌써 선언하라고 그랬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그 두 가지 실수에서 벗어나십시오. 만일 잘 되지 않거든 인내하며 참으며 기다리십시오.

심판과 정죄는 우리의 우리의 권리도 아니며 그럴 자격도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복음서의 맨 끝에 십자가가 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우리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거나 그 앞에 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를 한없이 겸손 하게 하고, 항복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같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목과 동일함과 경쟁심을 없애는 유일한 해답이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