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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없는 자가 먼저 (사 29:9-24,요 08: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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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어 온 서기관 과 바리새인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이야기에서 간음한 여인 을 잡아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한번 살펴봅시다.

이 사람들이 이 여인을 잡아가지고 예수께 온 것은 간음한 여인에 대한 율법 조항의 해석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얻으려고 온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그 여인을 불쌍히 여겨 죽이지 말라고 한다면 신명기 22장에 있는 말씀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 자가 그를 성읍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문으로 끌어내 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라는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될 것이요, 반 대로 율법대로 죽이라 할 것 같으면 이제까지 죄인의 친구로 자부해 온 예수 님 자신의 교훈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오니 이 문제야말로 예수를 고소할 수 있는 좋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그들이 끌고 온 여인에 대해서 조금도 동정하거나 불 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미 이 여인은 죽어 마땅한 여자라고 판결을 내린 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만 이 여인을 죽이기 전에 이 여자를 이용하 여 예수까지 걸고 넘어가려고 끌고 온 것 뿐입니다. 예수께서 설혹 살려주라 고 하였어도 그들에게는 이 여인을 살려줄 마음이 조금치도 없었습니다. 그것 은 율법을 범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잔인한 율법적인 인간성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을 읽으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비난하지만 우리 자신을 가만히 반성해 볼 때 우리가 바로 그런 율법적인 인 간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가고 생각됩니다.

가령 예를 들어 우리 교회 어떤 직분을 가진 분이 이런 경우에 걸렸다면 우리는 그 분을 어떻게 대할까요 우리는 그를 정죄할 것입니다. 그를 상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이 교회를 떠나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문제들이 일어난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들은 이들을 가차없이 정죄하였습 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가 옛날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오늘 우리 교회 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어느 입장에 설까요 우리는 예수 님처럼 그 여인을 용서해 줄 수 있을까요 솔직히 이야기해서 우리는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입장에 동조할 것입 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자신의 허물은 잘 몰라도 남의 허물을 찾아내는데 는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한 사람씩 물러가 고 그 여인과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자들이 왜 그렇게 슬그머니 사라졌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의 양심이 찔렸기 때 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의 죄가 생각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의 유부녀와 놀아났던 일이 생각났는지도 모릅니다. 변장하고 창녀에게 갔던 일이 떠올랐 을지도 모릅니다. 점잖은 체면에 오입은 못하고 우연한 기회가 오지 않나하고 기다리던 생각이 났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성 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알 수 없지만 한번 추측을 해 본다면 간음 죄목들 을 적으셨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님 의 말씀에 그 땅바닥에 쓰여진 것들이 자기들의 죄란 것을 알게 되자 얼굴이 붉어지면서 힘주어 잡았던 돌맹이를 슬그머니 떨어뜨리고는 슬금슬금 꽁무니 를 빼어 달아나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의 껍데기를 홀랑 벗겨버 렸습니다. 그 위선의 껍질속에 싸가지고 있던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드러나 자 그만 부끄러워 줄행랑을 놓은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들이 참으로 많 습니다. 입으로는 "죄인"이라 혹은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라고 하면서 사실 은 가장 경건한 체, 가장 깨끗한 체 하기가 일쑤입니다. 이런 위선적인 몸짓 들이 습관이 되어서 어디가나 냄새를 풍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믿지않는 사람들에게 구역질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내가 예수를 잘 믿어서 사람들이 금방 나를 알아본다 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그 반대입니다. 그 위선적인 몸짓 때문에 사람들이 금방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전도의 문이 자꾸 막히는 것입 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경건해야 된다는 것은 아는데 노력에 의한 성장없이 이것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경건을 가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선적인 사람이 목사입니다. 사람들은 목사를 경건의 표본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에게서 거룩함과 하늘의 어떤 영적인 능력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 래서 어떤 교인은 목사가 애기를 낳았다고 경건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교회 를 떠났다는 웃지못할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자기들의 주체의식을 갖지 못한채 교인들의 요구에 자기를 맞추려다 보면 경건을 가장 하게 되어 본의 아니게 위선자의 탈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목사 는 교인들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 목사가 하나님 대리자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 다. 그러면 목사는 그에 맞추어 자기가 정말 하나님의 대리자나 된 것처럼 행 동을 합니다. 교인들이 심방을 자주 요청하는 것은 그 하나님 대리자가 와서 복을 빌면 금방 복이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 까 또 교인들은 목사를 목양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 입니다. 목사 자신이 자기자신도 다스리기 힘든 데 감히 어떻게 다른 영혼들 을 목양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목양할 수 있는 분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뿐입니다. 목사도 그 양떼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란 말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저 종일 뿐입니다. 때를 따라 창고에서 곡식을 꺼내 다 나누어주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교인들은 자기 나름대로 목사의 틀을 만들어 놓고 목사를 거기에 맞추려 고 합니다. 그 틀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경건하지 못하다, 신령하지 못하다고 낙인을 찍어 쫓아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병폐들이 바로 이런 부작용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사도 여러분과 똑같은 인간입니다. 여 러분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인간입니다. 다만 맡은 직책이 다를 뿐입니다.

설교가 목사론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만, 문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인 위선을 조심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것 한가지는 "진실성"입니다.

 우리는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처리하신 경위를 보겠습니다. 예 수님은 먼저 자기를 공격하려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생각나게 하시므 로 그들의 공격을 오히려 역습하실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들은 누구나 가릴 것 없이 다 죄인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는 말씀속에는 죄없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예수님의 선언이 들어 있는 것입니 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은 율법으로 처단할 수 있지만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인간들의 죄는 율법으로 다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 문에 그 죄는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율법으로 처단하기는 간 단하지만, 간음을 유발한 인간의 근원적인 죄의 동기를 근본적으로 치료함없 이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 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가 간음하지 않았다고 보신 것이 아닙니다. "여자를 보 고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마음에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현장 범인 이 여인의 죄를 결코 가볍게 보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용서하신 것 뿐 입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은 것은 도망간 자들처럼 예수 안에 도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 자신이 모든 죄를 담당하므로 모든 인류 의 죄를 사할 권세를 얻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바로 보신 것입니다.

인간의 원죄는 기독교만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에서도 인간의 타 락을 말하고 있으며, 많은 철학자나 문학 잘품들이 사람들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절망의 요소를 찾아내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를 간단한 이야기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맹수에게 쫓긴 사람이 낭떠러지에 떨어졌는데 중간에 난 나무뿌리를 잡고 겨우 목숨을 건졌 으나 그 나무 뿌리를 흰 쥐와 검은 쥐가 차례로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밑에는 독사가 있었고 하늘에는 독수리가 날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바위틈 에 있는 석청을 발견하고 그 꿀을 먹는데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완전한 인간의 절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디고 구원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위대한 문호 톨스토이는 어떤 구원의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채 객사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스티븐슨이란 사람이 쓴 "이중 인간"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원래 제목은 Dr. Jekil and Mr. Hide입니다. 여기서도 인간 내면 깊숙히 자리잡은 악의 뿌 리를 잘 지적했지만 결국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결론을 내 리고 끝난 것입니다. 인간이 추구하여 온 철학이나 문학은 인간의 원죄를 찾 아내고 그 상태를 그려내는데는 공헌하였지만, 그 절망을 어떻게 넘어서느냐 에 대해서는 공헌하지 못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인간의 원죄와 죽을 수 밖에 없는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인간의 이 모든 절망을 함께 처리해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인류의 죽음을 자 기가 담당하시므로 모든 인류를 살게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당하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에 대한 벌을 다 치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입니다. 마치 한 알의 밀이 죽어서야 새 생명을 싹트게 할 수 있듯이, 가을에 낡은 생명을 떨어버리고 춥 고 혹독한 긴긴 겨울을 지나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나무들같이, 뚫고 나갈 길이 없는 절벽과 같은 절망을 넘어서 홀연히 나타난 부활의 소망을, 새 로운 삶의 희망을 제시하시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증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인을 용서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받을 율법의 저주를 예수께서 친히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은 자가 되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갈라디아서 3:13의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율법의 역할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결 국 인간을 저주아래 몰아넣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저주를 자기 몸 에 받으므로 그 저주가 우리 위에 내려오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부름을 듣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자는 누구나 용서와 평안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이리떼와 같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끌려올 때 이미 그는 죽은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갈갈이 찢겨진 옷과 끌려오면서 매맞아 터진 상처들, 그리 고 짖이겨진 그의 육체가 예수 앞에 내던져졌을 때 거기 다시 삶의 희망이 따 뜻한 햇살처럼 퍼져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율법의 저주 만이 그를 짖누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한 순간이 지난 후 이 여인이 눈을 떴을 때 그가 본 것은 사나운 군중들의 눈총이 아니라 자애로운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 님의 따뜻한 음성을 들을수가 있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그렇습니다. 어떤 죄가 있는 자라도 주님 앞에 나오면 무조건 다 용서를 받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내가 지고 고민하던 모든 죄 짐에서 자유 롭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기쁨을 가슴 가득히 받을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재미있는 것은 처음에 예수 앞에 죄인으로 끌려온 여인은 주님의 용서를 받았는데 의인으로 자처하고 나타났던 자들은 오히려 죄인으로 정죄받고 돌아 간 사실입니다.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앞에 죄인으로 나타났던 자들은 다 사죄의 확신을 얻었습니다. 삭개오가 그랬고 사마리아 여인이 그랬 고 가나안 여인이 그랬으며,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었던 여자가 그랬습니 다. 예수님 옆에 달렸던 한 강도도 예수님의 놀라운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앞에 의인으로 나타났던 자들은 아무도 사죄의 확신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의회원이며 부자였던 청년, 예수를 힐란하던 많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예수를 조롱하였던 헤롯, 또 그를 심판하던 빌라도, 이들은 다 주님의 사죄의 은총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그 앞에 죄인으로 나오는 자들에게 사죄의 은총과 확신 을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1,3).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 받고 풍성한 삶을 누리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 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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