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소하던 자들이... (요 08:1-11, 사 29:9-24)

첨부 1


이 이야기는 시작 단계에서는 무거운 이야기이며 인간성의 추한 일면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너무나 아름다운 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는 잔인하고 모진 면도 있지만 아주 강렬하고 부드 러운 일면도 있습니다.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라면 이 점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람 치는 칠흑 같은 밤에서 시작하여 광채 찬란한 비치므로 끝납니다. 쓰레기 같은 여성이 막 다른 골목에 다다라 "재생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1.등장하는 창녀라 불리우는 이름 없는 한 존재입니다.

 물론 그녀와 죄를 함께 지었던 남자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고소의 대상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 대에는 이중적인 도덕 기준이 남자는 여자가 갖지 못한 권리를 가졌습니 다.

이 여성은 간음하는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죄가 있는 것도 나쁜 일이 지만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는 붙잡혔다는 것이 더 나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죄를 알았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젊었고 되는 대로 마구 남자를 사랑하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죄보다 더 많은 죄 를 과거에 저질러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그녀는 냉소적이 되고 마 음이 굳어져 오랫동안 악의 길을 걸어왔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구경하 는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부끄럽게 꿇어 앉아 있습니다. 이 당시의 종교인 들 조차 안타깝게 여기거나 어떤 기대감 같은 것을 갖지 않았습니다.

 2.현장 목격 증인들 간음한 여자를 끌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경에는 별로 좋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이들에게는 칭찬할 점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켜 내려고 노력했고 교회와 국가의 기둥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지은 죄와 같은 나쁜 짓을 막는 것이 이들의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여인을 잡아가지고 예수께 온 것은 간음한 여인에 대한 율법 조항의 해석을 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그들이 끌 고 온 여인에 대해서 조금도 동정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미 이 여인은 죽어 마땅한 여자라고 판결을 내린 뒤이기 때문일 것입니 다. 다만 이 여인을 죽이기 전에 이 여자를 이용하여 예수까지 걸고 넘어 가려고 끌고 온 것 뿐입니다. 예수께서 설혹 살려주라고 하였어도 그들에 게는 이 여인을 살려줄 마음이 조금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범하 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잔인한 율법적인 인간성을 보 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음모를 꾸미는 과정에서 이들은 이 간음한 여자를 결박 하고 고통스러운 곤경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여자 자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습니다. 이 여자는 전시 품목에 불과하였습니다. 치욕적 인 상황으로 몰아 넣는 것은 이 여자가 지은 죄에 대해 분개했기 때문이 아 니었고 벌함으로 보다 깨끗한 공동체를 건설하려함도 아니었습니다. 더더구 나 예수님께 데려옴으로써 선을 베풀려는 동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들이 보기에 아무런 가망도 없고 도와 줄 가치도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러 므로 이 여자가 공개적으로 당하는 고통과 치욕은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보면 이들은 動機부터 나쁩니다. 율법에 대한 열성으로 인하여 행동하는 것으로 자처하지만 진정한 동기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난처한 입장에 빠뜨리게 하려는 음모가 동기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위 신을 추락시키고자 하는 생각에 끝없이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간음한 여자 에게 관심이 있는 척하면서 내심으로는 예수님을 난처한 입장에 빠뜨리려 고 한 이들의 행동은 위선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얻으려고 온 것이기에 지탄을 받아야 합니다. 만일 예수께서 그 여인을 불쌍히 여겨 죽이지 말라고 한다면 신명 기 22장에 있는 말씀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 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라는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될 것이요, 반대 로 율법대로 죽이라 할 것 같으면 이제까지 죄인의 친구로 자부해 온 예수 님 자신의 교훈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오니 이 문제야말로 예수를 고소할 수 있는 좋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들은 이 여자와 같은 죄를 짓지 않았으나 이들 또한 죄인이기는 마찬 가지였습니다. 간음한 여자는 육체의 죄를 지었습니다. 이들은 마음의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두 가지 종류의 죄인들이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무관심과 차가움으로 죄를 짓는 사람들보다 육체의 죄를 짓는 사람 들을 훨씬 더 가혹하게 정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비난 하지만 반성해 볼 때 우리가 바로 그런 율법적인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 이 아닌가고 생각됩니다. 가령 예를 들어 우리 교회 어떤 직분을 가진 분 이 이런 경우에 걸렸다면 우리는 그 분을 어떻게 대할까요 우리는 그를 정죄할 것입니다. 그를 상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이 교회를 떠 나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문제들이 일어난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교 회들은 이들을 가차없이 정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가 옛날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오늘 우리 교회 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어느 입장에 설까요 우리는 예 수님처럼 그 여인을 용서해 줄 수 있을까요 솔직히 이야기해서 우리는 그 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입장에 동조 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자신의 허물은 잘 몰라도 남의 허물을 찾아내는데는 빠른 습관이 몸에 배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의 죄를 가장 미워 하고 두려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에는 아버지와 함께 집에 머물러 있 었던 예의 바르고 존경받는 형이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소비한 후 뉘우 치고 돌아온 탕자보다 훨씬 더 가망이 없는 인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예 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괴롭히는 예의바르고 존경받은 사람들보다 차라리 이 간음한 여자에게 더 큰 희망을 두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들이 참으로 많 습니다. 입으로는 <죄인>이라 혹은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라고 하면서 사실은 가장 경건한 체, 가장 깨끗한 체 하기가 일쑤입니다. 이런 위선적 인 몸짓들이 습관이 되어서 어디가나 냄새를 풍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 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구역질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 를 내가 예수를 잘 믿어서 사람들이 금방 나를 알아본다고 생각할는지 모 르지만 위선적인 몸짓 때문에 전도의 문이 자꾸 막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믿는 사람이 경건해야 된다는 것은 아는데 <노력에 의한 성장 없이>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경건을 가장한 위선을 하게 되는 것입니 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선적인 사람이 목사입니다. 사람들은 목사를 경건 의 표본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에게서 거룩함과 하늘의 어떤 영적인 능력 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인은 목사가 아기를 낳았다고 경건 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교회를 떠났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 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자기들의 주체의식을 갖지 못한 채 교인들의 요구 에 자기를 맞추려다 보면 경건을 가장하게 되어 본의 아니게 위선자의 탈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목사는 교인들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3. 주역이신 예수님

간음한 여자를 예수님의 발 아래 내동댕이친 사람들은 예수님께 질문 공 세를 폅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 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들은 예수님에 관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음 이 분명합니다. 이들은 이 여자에 대해 예수님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 가를 확실히 내다볼 만큼 예수님에 관해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이 자비를 베푸시는 쪽을 택하리라고 확신하고 여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율법에 따라 "그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할 경우 난처한 입장 에 빠뜨리지 못하고 예수님의 인기만을 높여 주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나 율법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돌로 치라고 명하지 않을 것임을 이 미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예수님이 왜 이런 행동을 취 하시는지 그 이유는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 다.

첫째, 종교적 지도자들에 창피한 느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여 기에 하나님의 대리자들로서 서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얼마 나 끔찍하고 비극적일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잘못 드러내고 있습니까! 둘 째, 이 여자를 구해 주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는 치욕적인 느 낌을 갖고 있기에 정면으로 쳐다봄으로 하여 수치감을 더 느끼지 않도록 하 려고 하신 것입니다. 당당히 서있는 자들은 죄인이 수치를 느끼는 것을 보 고 즐기지만 예수님은 여자가 당하는 수치에도 괴로워하셨습니다.

1)땅 바닥에 쓰신 글은 무엇일까

예수님이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성 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알 수 없지만 한번 추측을 해 본다면 간음 죄목 들을 적으셨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님의 말씀에 그 땅바닥에 쓰여진 것들이 자기들의 죄란 것을 알게 되자 얼굴이 붉어지면서 힘주어 잡았던 돌멩이를 슬그머니 떨어뜨리고는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어 달아나버린 것입니다. 예 수님은 그들의 위선의 껍데기를 홀랑 벗겨버렸습니다. 그 위선의 껍질속 에 싸가지고 있던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드러나자 그만 부끄러워 돌아간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땅에 글자를 쓰면서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기회를 잡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더욱 촉박하게 예 수님께 압박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 여자를 돌로 칠까요, 치지

말까요" 자신들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Yes"아니면 "No"의 대답을 하도록 유인할 수만 있으면 일단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을 알만큼 똑똑한 무리들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습니다.

 2)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님이 이 문제를 얼마나 건전하고 솜씨 있게 다루고 계신가를 보십시 오! 예수님은 자신을 헤치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가이샤에게 세금을 바치 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막12:14)하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습 니다. 이에 대하여 "Yes, No" 대답을 하시는 대신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 다가 보이라고 하시고 거기에 누구의 화상이 새겨져 있느냐고 물었습니 다. 이들은 "가이사의 화상이나이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자를 돌로 치는 것에 반대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필 요 이상으로 반대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들이 여자를 돌로 치는 것을 금하셨더라면 이들을 소외시키는 한편 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취한 자세의 정당함을 확신하게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여자를 구하려는 열 성 못지 않게 이 악한 무리들을 구하려는 데도 열성을 가기고 계시다는 점 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 자신들이 죄가 없다면 이 여자를 돌로 치라. 죄 없는 자가 먼저 돌 로 치라 그러나 너희가 죄 있는 자라면 감히 돌을 던지지 못할 터이다"라 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한 사람씩 물러가고 그 여인과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자들이 왜 그렇게 슬그머니 사라졌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의 양심이 찔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가 생각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의 유부녀 와 놀아났던 일이 생각났는지도 모릅니다.

죄인이 죄인을 돌로 친다는 것보다 더 우스운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지은 죄는 각기 다르고 죄를 지은 정도도 각기 다릅니다. 그러 나 어떤 면에서건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그러므로 우리 손으로든지 혀 로든지 돌을 던지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그것은 건전한 자세도 아니고 기독교적인 자세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기를 공격하려는 자들로 하 여금 그들의 죄를 생각나게 하시므로 그들의 공격을 오히려 역습하실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들은 누구나 가릴 것 없이 다 죄인임을 선언하신 것 입니다.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 속에는 죄없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예수님의 선언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은 율법으로 처단할 수 있지만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인간들의 죄는 율법으로 다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죄는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율법으로 처단하기 는 간단하지만, 간음을 유발한 인간의 근원적인 죄의 동기를 근본적으로 치료함 없이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 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가 간음하지 않았다고 보신 것이 아닙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마음에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현장범인 이 여인의 죄를 결코 가볍게 보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용서하 신 것 뿐입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은 것은 도망간 자들처럼 예수 안에도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 자신이 모든 죄를 담당하므 로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할 권세를 얻으신 것입니다.

 3)예수님은 여인에게 왜 사라진 증인들에 대해 묻고 계신 것일까

예수님은 이 불쌍한 여인이 신앙을 갖도록 하시려는 영혼 구원의 마 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모진 시련을 겪는 동안 이 여인의 마음 속에서 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 여인은 '나 때문에 애꾸즌 사람 하나를 같 이 죽이려는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면 끌려 오고 싶진 않았던 그 분이 자기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예수님의 자세가 기본적으로 옳다고 느낀 사람들, 여자를 고소하던 증인 들이 하나씩 하나씩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모세의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 장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은 그의 현명한 대답으로 인하여 자 신을 곤경에 빠뜨리려던 자들을 선수를 써서 제압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끌어들이기까지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취한 행동을 통하여 불쌍한 여자 를 적어도 자신들의 손으로 돌로 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자리를 뜨자 예수님이 기다렸던 순간이 찾아옵니 다. 예수님은 그제야 몸을 일으켜 바로 서시며 처음으로 여자의 얼굴을 쳐 다봅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울먹이며 목이 메어 여자가 대답합니다. "주여, 아무도 없나이다." 자신의 죄를 증언할 사람들이 없게 되자 그녀는 안도의 빛을 띱니다. 이 여자는 너무 쉽게 해방되었고 예수님은 죄를 너무 가볍게 처리하고 계신다고 느끼 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 여자를 그토록 수월하게 해방시켜 주셨을까요 용서라는 선물은 그렇게 주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우리들 가운데 가 장 훌륭한 사람이라도 용서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4.예수님의 용서 선언이 담고 있는 뜻.

 그렇다면 우리의 죄에 대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 여 자가 했던 대로 하나님의 용서해 주심을 받아들여 죄에 등을 돌리고 죄를 잊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용서하신 것은 잊어버리십니다. 이것이 그의 약속입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렘 31:34) 하나님이 잊어버리시는 것을 여러분과 나는 잊어버릴 권리가 있습니 다.

수치와 공포에 차 예수님 앞으로 끌려 왔던 불쌍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고 그 인생에는 새벽을 기다릴 수 있는 희망이 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사랑의 은혜를 입어 서 밤의 종막이 아니라 새 날의 새벽을 발견했습니다. 이리하여 무한한 기 쁨에 젖은 그녀는 새 출발을 내디뎠습니다. 우리도 과거에서 돌이켜 우리 주님과 교제하게 되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예화) 스티븐슨이란 사람이 쓴 <이중 인간>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원래 제목은 Dr. Jekil and Mr. Hide입니다. 여기서도 인간 내면 깊숙히 자리잡 은 악의 뿌리를 잘 지적했지만 결국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부정적으 로 결론을 내리고 끝난 것입니다. 인간이 추구하여 온 철학이나 문학은 인 간의 원죄를 찾아내고 그 상태를 그려내는데는 공헌하였지만, 그 절망을 어 떻게 넘어서느냐에 대해서는 공헌하지 못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인간의 원죄와 죽을 수 밖에 없는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인간의 이 모든 절망을 함께 처리해 버리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인류의 죽음 을 자기가 담당하시므로 살게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 에 처형당하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에 대한 벌을 다 치루신 것입니다. 그래 서 하나님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인을 용서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받을 율법의 저주를 예 수께서 친히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 은 자가 되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라디아서 3:13) 율법의 역할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결국 인간을 저주아래 몰아넣는 것입 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저주를 자기 몸에 받으셔서 우리는 살게 하셨습 니다. 그리곤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 라." 이 부름을 듣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자는 누구나 용서와 평안을 얻게 됩니다. 간음한 여인이 이리떼와 같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끌려 올 때 이미 그는 죽은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갈갈이 찢겨진 옷과 끌려오 면서 매맞아 터진 상처들, 그리고 짓이겨진 그의 육체가 예수 앞에 내던져 졌을 때 거기 다시 삶의 희망이 따뜻한 햇살처럼 퍼져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율법의 저주만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을 뿐입니 다. 그러나 이 여인이 눈을 떴을 때 그가 본 것은 사나운 군중들의 눈총이 아니라 자애로운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따뜻한 음 성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그렇 습니다. 어떤 죄가 있는 자라도 주님 앞에 나오면 무조건 다 용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내가 지고 고민하던 모든 죄 짐에서 자유롭 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기쁨을 가슴 가득히 받을 수 가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처음에 예수 앞에 죄인으로 끌려온 여인은 용서를 받았는데 의인으로 자 처하고 나타났던 자들은 오히려 죄인으로 정죄받고 돌아갔습니다.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앞에 죄인으로 나타났던 자들은 다 사죄의 확 신을 얻었습니다. 삭개오가 그랬고 사마리아 여인이 그랬고 가나안 여인이 그랬으며,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었던 여자가 그랬습니다. 예수님 옆에 달 렸던 한 강도도 예수님의 놀라운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앞에 의인으로 나타났던 자들은 아무도 사죄의 확신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의회원이며 부자였던 청년, 예수를 힐난하던 많은 서기관들 과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예수를 조롱하였던 헤롯, 또 그를 심판 하던 빌라도, 이들은 다 주님의 사죄의 은총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 은 오늘도 그 앞에 죄인으로 나오는 자들에게 사죄의 은총과 확신을 주시 는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 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1,3).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 받고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수치와 공포에 차 예수님 앞으로 끌려 왔던 불쌍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느꼈습니다. 그녀의 인생에는 새벽을 기 다릴 수 있는 희망이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사랑의 은혜를 입어서 밤의 종막이 아니라 새 날의 새벽을 발견했습니다.

이리하여 무한한 기쁨에 젖은 그녀는 새 출발을 내디뎠습니다. 우리도 과 거에서 돌이켜 우리 주님과 교제하게 되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