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도피성 (수 20:1-9)

첨부 1


지난 1995년 6월 6일 현충일 아침에 정부는 서울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공권력을 투입하여 거기에서 농성중이던 한국통신 노조 간부들을 연행했습니다. 이 일로 카톨릭 교계와 불교측이 거세게 반발하였습니다.
카톨릭교회측은 서울대교구에 속한 모든 사제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시국기도회를 매일 오후 개최하는 동시에 지난 금요일부터 3주간동안 매일 오후 4시에 조종을 44번씩 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카톨릭교계가 이렇게 크게 반발을 하는데는 97년동안 지켜온 성역이 하루 아침에 침해당했다는 비애감과 허탈감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카톨릭교회측은 이번 사태를 마치 고이 길러온 딸을 치한에게 유린당한 것처럼 모독으로 여기고 정부의 공식적 사과가 있을 때까지 저항을 계속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이런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이해를 할 필요가 있어서 오늘 이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바로 여기에 관계된 말씀입니다.

본문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불러서 모세에게 이미 명한 지시를 여호수아가 시행하도록 명령을 하시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수아가 정복하는 가나안땅의 성읍들 가운데 강 이쪽편에 셋, 강 저쪽편에 셋, 이렇게 도합 여섯 성읍을 도피성으로 택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도피성으로 택정할 여섯 성읍은 게데스, 세겜, 헤브론, 골란, 라못, 베셀로서 지도상에 보면 전국적으로 고루 퍼져있어 지리적으로 잘 안배가 되어 있습니다.

이 도피성의 목적이 무엇이냐가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을 따라 보면 이렇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부지중에 다른 사람을 죽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우선 이 도피성으로 도망을 할 수 있습니다. 도피성에 가서 거기에 있는 장로에게 자기가 낸 사고를 보고합니다. 그러면 장로는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서 살 곳을 먼저 마련해 줍니다. 이때 이 살인자를 잡으러 오는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죄인을 내놓으라고 요구를 해도 죄인을 내어주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살인을 했을 때는 무슨 곡절이 있었을 것인데 그냥 죄인을 내어주면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전에 보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인자가 일방적으로 보복을 당하기 전에 우선 몸을 숨겨주는 것입니다.

그 살인자가 언제까지 도피성에 머무를 수 있느냐 원칙적으로는 재판을 받을 때까지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머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기한입니다. 그러니까 거의 평생 머무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도피성은 하나님의 특별명령에 의해 택정됩니다. 도피성은 어떤 경우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은신한 사람이 분명히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 할찌라도 함부로 들어가서 체포할 수 없습니다.

왜 도피성이 있느냐 그것은 비록 살인은 했지만 일단 몸을 피하고 정당한 재판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려서 벌을 받게 하여 억울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우선 그를 은신하게 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 도피성은 오늘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미국에서 1970년대 소위 Santuary Movement, 즉 피난처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서 오늘은 정치적 망명 (Refugee)의 개념으로 발전된 것입니다.

흔히 이북에서 망명객이 남한으로 넘어오는데 망명객이 넘어오면 그 나라에서는 범법자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인권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인인도를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런 제도의 연장입니다. 교회나 성소를 성역으로 보호하고 인식하는 것도 바로 이런 도피성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공권력이 성역에 들어간 것은 성서적으로 볼 때도 문제가 있고 사회통념상으로 볼 때도 해서는 안되는 무리한 일을 정부가 한 셈입니다. 경찰공권력이 조계사에 들어간 역사는 두 번에 걸쳐 있었습니다만 명동성당에 들어간 것은 1898년 명동성당이 건립된 이래 처음있는 일이라고 천주교는 물론이고 종교계 전체가 충격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우기 독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유신시대 5공 6공 시절에도 없었던 일이 소위 문민정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데 대해서 천주교측은 더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몇가지 중요한 자기 모순과 사회통념을 무너뜨리는 행위에 대해 짚어볼 일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정부는 "법집행에 있어서 성역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공권력을 투입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신학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먼저 성역은 거룩한 영역입니다. 거룩한 영역이란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간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역(聖域)인 것입니다. 이것은 수천년, 아니 인류역사가 이 땅위에 존재해 오는 동안 인종과 문화, 체제를 막론하고 인류보편적으로 그렇게 인정하고 지켜오던 가장 오래된 인류의 전통입니다.

이에 비해 법은 인간이 인간의 삶을 위해서 약속을 하는 인간적인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법을 제정하는 자와 그 법에 제한을 받는 자 사이에 이해가 상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항상 수정되고 거부되는 예가 허다합니다. 지금까지 공화국이 바뀔 때마다 법은 개정되었습니다. 이것은 법이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이며 한시적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일제시대에도 일제당국이 조선인들을 탄압할 때 법집행을 내세웠습니다. 힛틀러가 파쇼제국을 건설할 때도 법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그들의 법이 적법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법집행에 있어서는 성역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는 인간의 법이 하나님의 영역에도 들어갈 수 있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성소는 거기에 있는 성직자, 즉 사제나 승려나 목사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가 있든지, 어떤 성직자가 있든지 관계없이 이미 그곳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성역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고 성역에 대한 인간의 예의로 성전에 들어가면 비록 비신자라 할찌라도 예의를 갗추는 것입니다.

둘째로 정부는 교회나 성당이 법을 어긴 죄인이나 숨겨주는 그런 곳이냐는 주장이 있습니다. 먼저 죄를 짓지 않는 자는 도피할 이유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당이든지 교회이든지 찾아갈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피신한다는 자체가 불리한 위치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더군다나 성경에서 도피성은 살인자가 은신하는 곳입니다. 범법자가 부당하게 보복을 당하지 않도록 대화와 정당한 조사를 통해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여유를 갖도록 우선 몸을 피하는 곳입니다. 원래 교회는 죄인이 오는 곳이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셋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통념을 깨트려버렸다는데서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나 성당은 신자가 아닌 경우에라도 경의를 표하고 신성하게 여기는 것이 일반 사회통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추악한 범법자라 할찌라도 교회에 들어와서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예의는 있는 것입니다. 명동성당 같은 경우는 5공 6공때도 농성사태가 자주 있었는데 60일, 70일간이나 계속된 예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농성자들이 자진해서 해산할 때까지 투입을 자제했습니다. 이것은 그 때에는 경찰력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거룩한 곳이고 사회통념을 지키는 차원에서 과격한 행동은 자제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우리가 기대하는 문민정부가 그랬다는데 대해서 놀라움이 있고 충격이 큰 것 같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명동성당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도 막상 투입명령이 떨어졌을 때 설마 그럴리가 있겠는가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성당이나 교회나 사찰은 비단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사회학적인 의미에서도 소위 사회의 완충지대로 보는 것이 사회적 통념입니다. 사회적 의견이 대립할 때 종교는 그것을 화해하고 완충하는 그런 지대로 우리 모두가 인정해왔고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옛날 우리 가정에서 보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손자들 3대가 함께 한 집에서 삽니다. 간혹 손자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무엇을 잘못해서 혼이 나는데 이 때 다급해진 손자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품으로 달려가 거기를 피난처로 삼습니다. 이때 아버지나 어머니는 아무리 화가 나도 할아버지나 할머니 품에 안겨 있는 손자를 빼앗아 오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자기 자식일찌라도 그 위의 어른이 있을 때는 함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할아버지 할머니 때문에 아이들 버릇이 나빠진다 하지만 이 때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품은 완충지대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품에 손자를 안고서 다정하게 물어보면서 왜 그랬느냐고 묻고 다시는 그렇게 하면 안되고 부모님말씀을 잘 들으라고 타이릅니다. 부모에게는 아이의 고민과 입장을 대변해 줍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중재가 이루어집니다.

이때 할아버지 품은 조정과 화해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속에서 하는 성소의 역할입니다. 이번 명동성당측이나 조계사가 중재를 하려고 계속 노력했습니다. 그런데도 일방적으로 밀어부친 것은 그럴만한 무슨 위급한 상황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혜롭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1989년 철의 장막 베르린 장벽이 무너지기전에 구 동독의 라이프찌히에서 있었떤 일입니다. 구 동독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정권아래 억압당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도 자기의 의견을 발표한다거나 논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 정권아래에서도 유일하게 한 공간이 자유롭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교회안으로 몰려들었고 거기에서 자유와 인권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그들은 이 교회안을 Space of Freedom, 즉 "자유의 공간"이라고 이름붙혔습니다. 종교를 부인하던 공산주의 정권도 이 교회만은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이 교회안에 교인들은 와서 기도하고 자유를 희구하는 사람들은 와서 자유에 대한 소망을 피력했습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개인의 죄를 참회하고 용서받고 구원받는 일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사회와 민족과 국가가 추구하는 정의와 평화와 자유를 위해서도 만민이 와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살인자도 와서 기도할 수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용서하고 용서받고 화해를 이루고 사랑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개인이 행동할 때도 해도 되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을 자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덕스런 사람이고 인격적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번 일은 정부가 유감을 표현하고 앞으로는 스스로를 조금 더 성숙되게 자재하고 통제할 수 있는 덕스러운 정부가 되고 인격적인 정부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국통신 노조는 자신들의 권익을 위한 일이 국민에게 불편을 주지않고 끝까지 대화를 통해서 결과를 얻는 활동을 해 주시기를 바라고 이를 통해 우리 한국의 온 사회가 성숙해 지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