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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라합 (수 06: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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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합이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다는 말씀을 기억해 두고 다음을 살펴보자.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수 2:8-13)”
그러자 그 두 정탐군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수 2:18)”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수 2:21)”
이렇게 해서 그들이 실제로 가나안 땅에 입성했을 때에 라합과 그의 친족들을 다 살려주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다.
예수를 믿고 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 하나님께 ‘보답’을 하고 신앙생활적 차원에서 ‘책임과 사명’을 다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성숙이라는 의미를 잘 모르는 것이다. 신자로서 ‘성숙하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의 책임이기 때문에 한다는 수준을 뛰어 넘어서 그것이 그의 기쁨이고 수준이고 자랑이고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에 해야 된다.
라합은 언제나 [기생 라합]이라고 기록된다. 라합이 구원 얻었을 때를 보면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 살림을 받는다.
“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와서 그 당한 모든 일을 고하고(수 2:23)”
라합은 신앙의 사람이었다. 라합은 자기 아비와 형제와 거기에 속한 친족들까지 다 살려낸다. 그런데 창녀이기에 남편은 없다. 라합이 구원을 얻는 모습에서 우리에게 참으로 감동스러운 것은 우리의 구원과 ‘그토록 비슷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 얻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죄인]이라고 한다. [죄인]이라는 단어가 [창녀]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면 오산이다. 창녀는 죽이지 않았지만 죄인은 죽인다. 얼마나 죽일 죄인이었는가 하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 그래서 라합의 구원만큼 우리의 구원과 그토록 멋있게 비교되는 묘사도 없다. 우리는 다 그렇게 구원얻었다. 그런데 성경이 지금 라합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씀은 구원을 얻는 것이 끝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살았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구원을 얻은 것은 구원을 얻은 다음을 위해서 구원을 얻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 자체를 위해서 구원얻는 것만큼 미련한 것이 없다. 항복을 하면 항복하기 전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 항복을 하고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것은 문턱을 넘어 다른 장소로 옮겨온 것이다. 그 이전과는 다르기 때문에 들어온 문턱이고 넘어선 이상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모두 문턱에 앉아 있다. 지금 우리가 자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 내가 그때 얼마나 몹쓸 죄인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나에게 은총을 베푸셨는가 하는 이야기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들어와서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는 대목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성숙]이라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약속하신 구원을 우리가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룻 4:16-17)”
니오미는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들어서 흉년을 피하여 모압 땅으로 피난을 갔다. 거기서 자기의 두 아들을 위하여 모압 여인을 며느리로 삼았는데 거기서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어 버렸다.
자기와 며느리들만 남았는데 이제 정말 삶이 초라해졌다. 그래서 본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한다. 나오미는 돌아오면서 며느리들에게 “아들도 다 죽었으니 시어머니를 쫓아올 필요없다. 너희 동족에게로 돌아가라”고 한다. 그래서 큰 며느리는 돌아가고 룻이라는 며느리는 그 시어머니를 붙잡고 시어머니의 신앙을 자기의 신앙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을 섬기기로 하고 좇아온다. 그 룻이 여기에 들어와서 보아스라는 거부요 지주인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애를 낳는다. 위의 말씀은 나오미가 룻이 다시 결혼해서 낳은 자식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이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마 1:5)”
여기를 보면 오벳의 아버지가 보아스인데, 보아스의 아버지는 살몬이고, 살몬의 부인이 라합이라고 한다. 보아스의 어머니가 라합이다. 그러면 오벳과 라합과는 촌수가 친할머니가 된다. 나오미가 외손자도 아닌데 그 아이를 안고 기뻐했다면 라합은 어떻겠는가 ‘라합은 얼마나 그 말년을 행복하게 보내었는가’라는 말씀이다. ‘나오미가 그 족보도 맞지않는 외손자를 안고 말년을 기쁘게 보내는 것을 인하여 이웃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 했다. 라합의 경우는 문자로 다 못쓸 정도이다.’ 보아스는 선조로부터 많은 땅을 물려받은 부자이다. 이스라엘은 땅을 매매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아버지인 살몬이 부자라는 말이다. 라합이 지주로서 부자인 살몬에게 시집을 갔다는 이야기를 성경이 하고 있는 것이다. 라합이 감춰준 정탐군들로 말미암아 창녀였던 자리에서 저주받을 땅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그의 인생의 전 기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다음 인생과 그 다음을 위한 출발에 불과한 것이고 거기로부터 하나의 전환점을 이룬 것에 불과하다.
성경에서 라합을 이야기할 때마다 기생이 붙어 다닌다. 히브리서 11장에도 붙 어 있다. 그러나 유일하게 마태복음 1장에서는 그 호칭이 붙지 않는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마 1:5)”
왕의 족보를 쓰고 있는데 어디에다 감히 [기생]이라고 쓸 수 있겠는가 성령이 우리에게 펼쳐주고 싶은 의도는 “너희가 어디서 출발했느냐, 그것은 단지 출발이니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오늘의 자랑과 영광의 자리의 시작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오늘 왕의 족보에 앉아서 과거를 돌이켜 보는 관점에서 그것이 기생이었으면 어떻고, 죄인이었으면 어떻고, 저주를 받았던 생애면 어떤가 내 생애가 지금 여기에 와 있다면 말이다. 이제 우리에게 신앙적으로 성숙하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사명과 책임을 갖고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이상의 우리의 자랑이라는 것이다. 자랑과 내가 누릴 내 생애요, 내 삶으로서 소유해야할 것들이다. 성경이 요구하는대로 살아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해 보라.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넘쳐나는 기쁨을 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지도 중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메세지화 되는 것이 사해와 갈릴리 바다이다. 나간만큼 채워진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의 생애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성숙이다. 그때에는 우리는 스스로 ‘가진 자’라는것을 알게 된다. ‘넘치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말씀이 내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누리는 기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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