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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간 (수 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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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주신 땅이다. 가서 ‘빼앗아야’ 되는 땅이 아니라 이미 ‘자기네’ 것이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수 6:17-19)”
금은은 예전에 가장 값진 물건이기에 가장 귀한 곳에 써서 보통은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치장하는 데 썼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바칠 것이 요구되었다. 말하자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동철은 우상을 만드는 금속인데 이스라엘은 무기를 만드는 것도 금하게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이 나라의 국방력은 칼이나 활이나 말에 있지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 그들 사회의 모습과 삶의 모습에서 메세지화 되어 있던 민족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다윗은 이방 민족을 치고 전리품을 취하여 올 때 말의 뒷발 힘줄을 끊는다. 이런 일들이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할 기본적인 신앙의 원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간이 이제 그 일을 어긴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수 7:21)”
아간이 이 물건들을 취했고 이 일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전쟁에 패배하는 화를 만난다. 아간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라합과 다르다. 라합의 생애 전반부에 대해서는 성경은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살몬은 라합을 통하여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롯을 통하여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아간은 7장 1절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더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범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라]라는 이름은 ‘새싹,떡잎’이라는 뜻이다. [삽디]는 ‘하나님만이 좋은 것을 주시는 분, 하나님만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아간의 아버지 [갈미]는 ‘풍성한 수확, 풍성한 열매’라는 뜻이다. 이제 무슨 이야기인지 자명해진다. 싹이 나서 잎이나서 이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싹이 나고 그 싹이 자라서 열매까지 맺었으니 그 다음에 남은 것은 영광 밖에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간]이라는 이름은 ‘사고뭉치’라는 뜻이다. 이것이 아간에게 있어서 기가막힌 메세지이다. 아간은 당연히 영광과 행복과 기쁨과 존귀를 누려야 할 대(代)에 들어선 사람인데 돌연한 사고와 말썽으로 그때까지 이룩된 모든 조건을 거기서 끊어버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간의 후손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는다. 어느 쪽이 나은가 우리들의 생애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앞은 아간과 같고 뒤는 라합과 같아야 한다.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수 7:25-26)”
한쪽은 그의 족보와 생애가 오늘날까지 연결되고 한쪽은 멸망의 돌무더기가 오늘까지 있다고 한다. 이것이 아간과 라합의 대조적인 요점이다. 우리가 신자로서의 삶에 있어서 가장 불행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신자들이 너무나 사는 이야기를 못하고 있다. ‘살아가는 현장’ 이야기는 없고 죽은 다음의 이야기만 한다. 그러니까 신자된 도리와 두려움과 힘과 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삶의 현장에서는 도무지 맥을 못춘다. 신자된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야될 삶의 방향을 거꾸로 살아갈 때가 많다. 전반부는 라합이고 후반부는 아간이다. 그래서 라간이 되고 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생애인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라합같이 사느냐, 아간같이 사느냐는 우리 각자의 책임이다. 우리는 아간으로 시작해서 라합으로 생을 마쳐야 한다. 그것이 라합과 아간이 주는 교훈이다.
“백성중 삼천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 륙인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와서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수 7:4-5)”
개인의 범죄는 개인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패하였다. 그리고 ‘백성의 마음이 물같이 녹았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승리를 한 개인으로 하여 빼앗길 수 있다. 여호수아는 이 사건을 이렇게 푼다.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수 7:19)”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그 앞에 자복하라” 아이 성 전투의 실패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이름이 완전히 먹칠을 당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아이성 사람들의 힘이 강해서도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을 치기 위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먹칠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손을 대시는 사랑의 손길이다. 자신의 명예와 이름이 제 삼자 앞에 먹칠이 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자녀의 범죄한 사실에 간섭하고 들어오시는 그분의 열심을 아는가 우리는 조만간 우리의 인생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돌아갈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누구나 선다. 멸망과 구원의 심판대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을 어떻게 보냈는가 하는행위의 심판을 받으러 설 것이다. 우리는 지옥불에 던지우지 않고 천국에 구원얻어 간다는 것만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 일생동안 그가 어느만큼 하나님의 자녀로 그분의 약속들을 누리며 그분이 요구한 거룩한 성장을 계속하는가, 그것을 평가받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아간이 되지않기 위해, 라합 같기 위하여 그리고 누구나 그런 영광의 자리에 서기를 원하여 하나님이 부르신 줄 아는 감격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의 감정의 감격이 아니라 우리의 발걸음과 생활을 바꿔놓는 신앙고백적 삶의 현장으로 연결하는 신앙들이 되어야만 한다. 여기에 우리가 부름받고 있다. 모두가 자기의 책을, 자기 이름과 자기 인생으로 말미암는 책을 하나님 앞에서 지금 지어가고 있다는 사실 앞에 각자가 긴장하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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