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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첫 번째 구원자 (삿 03:7-11 , 수 1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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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방법은 양면적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축복과 저주를 위한 것입니다. 구원의 메시지를 믿어서 받는 구원의 축복이 있고, 믿지 않아서 받는 정죄의 저주가 있습니다. 이 두 측면의 진리는 우리 시대에서 흔히 경시되거나 아예 부정되기도 합니다. 현대판 ‘복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아성 더 잘 된다고 선전하면서도 회개나 생활자체의 근본적인 철저한 혁신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많은 현대인 크리스찬들은 하나님의 ‘부정적인 사역들’ 이 종내 구원의 목적을 채워주는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간과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예로 들어 보십시다. 하나님은 각 시대마아 악인들에 대한 진노를 불, 전염병, 전쟁, 악천후 등으로 분출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악인들을 향해서 ‘매일 분노’(시7:11)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시는 이러한 징벌들은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크게 기여합니다. 하늘의 징계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시험하시고 구원의 복음이 받아지도록 준비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크신 사랑으로 자기 백성들을 계속 부르고 계십니다. 가나안 정복 이후 30년간 모두 죽었고 언약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은 한 압제자를 일으키셨고, 그 다음 8년이 지난 후에 한 구원자를 보내셨습니다.

구원자 옷니엘
옷니엘은 유다 지파 출신으로서 갈렙과 가까운 인척이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탐을 갔었던 충성스런 정탐군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갈렙은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약속의 땅인 가나안 국경에 다다랐을 때 매우 긍정적인 보고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의 거인들이었던 아낙자손들이 두려워 감히 진입하지 못하고 광야를 40년간 방황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모세와 여호수아 및 갈렙을 제외한 모든 성인들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옷니엘은 갈렙이 정탐 대원으로 뽑혔을 때 아마 청소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여호수아15:17절에서 처음으로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이었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옷니엘을 갈렙의 조카였다고도 볼 수 있고 혹은 이복 형제라고도 읽을 수 있습니다(갈렙의 아버지는 여분네였습니다). 아니면 ‘그나스의 아들’ 이란 말을 가문의 일반적인 통칭으로 보면 옷니엘을 갈렙의 친동생으로 여기는 것도 가능합니다. 고대 유태인 학자들은 본문상의 이유로 이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하였습니다. 한편 현대 학자들 중에는 옷니엘이 아마 갈렙의 이복 동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옷니엘은 아낙 자손들로부터 드빌을 탈취함으로써 갈렙의 딸인 악사를 아내로 얻고 갈렙의 사위가 되었습니다(삿1:11-15). 이 아낙 사람들은 4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족속이었습니다. 악사는 옷니엘의 조카딸이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런 결혼은 율법에 금지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옷니엘은 가나안 정복 때에 이스라엘의 한 중요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여호수아가 죽을 당시 정력이 넘치는 중년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갈렙은 85세였고(수14:10-14절) 옷니엘은 50대 중반 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30년 이후 옷니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생 최대의 사역을 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삿3:7)하였습니다. 그드릉ㄴ 하나님을 잊고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겼습니다. ‘아세라들’은 주로 목재로 된 원주형 성물들인데 가나안의 여신인 아스다롯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탈선을 노여워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소포타미아의 구산-리사다임 왕에게 넘겼습니다. 이 왕의 이름은 ‘두 배나 악한 구산’이란 뜻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붙인 별칭이었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부르짖을’(3;9)때까지 8년간 구산-리사다임의 약탈을 당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실한 백성들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자구책은 바닥이 나 버렸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항상 그렇듯이 자신을 구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최종점은 하나님의 축복의 시발점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시고 앞 세대의 한 노장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는 드빌의 승자였고 아낙 자손들을 정복한 맹장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성령을 받고 전쟁터를 나갔습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군대들을 쳐부수었습니다. 성경은 힘있고 간결하게 ‘그 땅이 사십년 동안 태평하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에 옷니엘은 아마 이스라엘을 수 년 정도만 다스렸을 듯합니다. 우리 개역성경은 옷니엘이 40년을 계속 살면서 사사 노릇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런 암시가 없습니다. 옷니엘의 공헌는 이스라엘에 한 세대 동안 평화를 안겨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우리가 받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부흥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에 적용시킬 수 있는 교훈들은 세 가지로 제시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본문에 담긴 세 개의 구절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3:9) 옷니엘은 우연히 나타난 자
가 아니였습니다. 유다에 용맹스런 역전의 노장이 마침 있어서 메소포타미아의 침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하는 중책을 떠맡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한 목적을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 이루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이점은 역사 연구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전체입니다. 옷니엘은 요즘으로 말하면 2차 세계 대전의 맥아터 장군과 같은 자였습니다. 그는 노년에 조국의 군대를 이끌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옷니엘을 들어 쓰셨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들이 일단 이같은 시각에서 보면 옷니엘의 초기 생활은 그의 최대 사역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옷니엘은 이집트에서 언약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소년 시절을 보냈었고, 홍해를 갈라지게 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목격했으며, 광야를 헤메면서 이스라엘의 불신실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같이 경험하였고 아낙 거인들을 정복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온 옷니엘이 이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사사이며 구원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에도 만약 교회가 곁길로 빠져들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 우리 육신의 해결책을 찾지말고 주님께 구원을 청원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궁극적인 구원자는 물론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해 교회의 리더쉽이나 복음 사역을 위해 필요한 ‘지금 이 시간의 일꾼들’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유일한 구주입니다. 모든 해결의 열쇠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분만이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다른 누구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3:10) 옷니엘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경험
2 도 쌓고 성품도 연마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천부적인 자질도 있었습니다. 그러
나 옷니엘은 자신의 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특별한 은혜를 입어야 했습니다. 그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넘치는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강론하시면서 자신에게 적용시켰던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사61:1,2).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에수님은 이 특별한 성령의 수취(受取)와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로 인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구원을 안겨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신자들은 예수님이 받으셨던 동일한 성령의 축복을 그들의 심령 속에서 누리게 된다는 약속을 보장받았습니다. 옷니엘이 받았던 성령과 그가 이스라엘에 끼쳤던 ‘구원’의 범위는 이세상을 위한 구세주의 사역에 비교하면 매우 부붐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성취된 온 백성들의 구원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충만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 그의 성령을 부어달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 ‘지금 이 시간에 필요한 인물들’, 곧 ‘내 마음에 합하는’(렘3:15) 자들이 나타나 어둠의 세상으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현재 그리스도의 몸이 감당해야 할 큰 사명들을 위해 성령의 임재와 은사로 자기 백성들을 무장시켜 달라고 주께 요청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성령께서 당신을 채워주시고 당신의 심령 속에서 힘있게 활동해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은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엡3:20)를 정말 모시고 싶어합니까 당신은 당신의 생애에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그같은 변화가 일어나기를 갈망하십니까 이러한 갈절한 여망이 있어야만 교회가 부흥되고 성도가 영적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

3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3:9) 이 구절은 맨 앞에 나오는 말씀
이지만 강조하기 위해서 맨나중에 넣어 말씀드립니다. 우리들이 여호와께 부르짖는 때는 영적 성장과 부흥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들은 믿음의 눈으로 자신의 무력성을 통감하고 우리 스스로는 믿음도 향상시킬 수 가 없고 주께 대한 헌신도 심화시킬 수 없음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됩니다. 주께 부르짖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개인 생활과 교회 생활에서 참된 위로와 평안과 기쁨을 가져다 주는 갱신된 믿음생활의 필수 사항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진심의 기도를 올릴 때까지 메소포타미아의 압제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다’(시119:67)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무서운 재난이나 불행을 당하면 흔히 고통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부르짖음은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슬픔과 우환들에 눈을 돌리고 우리 주변의 불의와 불공평을 놓고 괴로워합니다. 우리들은 주님께 부르짖어야 할 때에도 자기 연민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읊었습니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시107:6, 13, 19, 28).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본 장의 메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주께 부르짖으시오! 당신의 근심과 고통들을 은혜의 보좌 아래 놓으십시오! 주께서 당신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구해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이 구원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 구원은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았던 구원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의 구원자였던 옷니엘은 구세주되신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하나의 화살표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구주가 필요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그분은 자기에게로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내어쫒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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